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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을 개 취급했던, 영원한 장군 노백린(盧伯麟)

수로보니게 여인 2016. 9. 7. 23:47

역사 속 숨은 영웅 (7)

입력 : 2016.09.07 08:03 | 수정 : 2016.09.07 09:15  

 

이완용을 개 취급했던, 영원한 장군 노백린(盧伯麟)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후대에 잘 알려진 위인 외에도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그동안 몰랐던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
그 일곱 번째 문(門)은 호탕했던 대한민국의 장군 노백린으로 연다.

 

 

노백린은 독립운동가로 신민회(新民會)에서 활약했고 상하이(上海), 미국,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오가며 항일운동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최초의 항일비행사 학교를 설립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또는 임정)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군의 전투력 증진에 힘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노백린,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먹성 좋고 호방한 기질

몸집이 크고 체중이 상당했던 장군은 먹성이 좋아 식사량이 보통사람의 3배나 됐다고 한다. 그와 가깝게 지냈던 독립운동가 권동진 선생은 회고담에서 "그는 술도 맥주 같은 것은 한꺼번에 3~4 다스는 예사로 마시고 (서)양요리, 일본요리, 조선요리 할 것 없이 특히 요리 먹기를 좋아했다" 라고 말했다. 이시영 선생의 비서였던 박창화 선생도 장군에 대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시간 관념과 공사 구분에 절도가 있고 규율을 엄정히 지켰다. 그러다가도 사나이다운 기운이 발동하고 흥에 겨워 술자리에라도 앉으면 통음하기를 사양치 않아 맥주 12병을 앉은 자리에서 마셨다" 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상해에 있을 때 늘 주린 배를 안고 생활해야 했다. "정 먹을 게 없으면 중국인 집에 가서 먹다 남은 찌꺼기라도 먹고 기운을 차려야 왜놈하고 싸울 수 있소. 속히 그자들을 족쳐 물고를 내야 빼앗긴 조국을 찾고 그리운 서울로 갈 것이 아니오.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소." 그는 줄곧 낙천적인 기질을 잃지 않았다.
이완용을 개 취급한 '독립 광인(狂人)'
1906년 3월 일제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부임한 직후의 이야기다. 이토는 조선의 고관들을 초청해 큰 잔치를 열었다. 을사5적의 하나인 이완용과 친일파 송병준 등도 참석했다. 이때 30대의 한 군인이 그들 앞으로 다가가 "워리, 워리"하며 개를 부르듯 불렀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개 같은 인간들이니 개처럼 취급한다는 조롱이었다.
이를 본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칼을 빼들어 젊은 군인에게 덤비려 하자 젊은 군인도 지지 않고 칼을 빼 대결하려 하였다. 깜짝 놀란 이토가 하세가와를 급히 만류해 겨우 진정됐지만 잔치는 이미 흥이 깨진 뒤였다. 젊은 군인은 노백린이었다. 그는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밥상 위에다 대변을 봐놓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믿기 어려운 일화도 전해진다.

* 한국주차군: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널리 인정받아온 장군의 길 
장군은 해외경험이 풍부한 독립운동가였다. 일본 유학파인데다 러·일전쟁을 참관했고, 중국을 여행했다. 1916년, 장군은 일찍이 교류가 있었던 김좌진, 윤치성, 유장렬, 채기중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부흥시켰다. 이후 국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만주와 상해를 거쳐 하와이로 갔다. 하와이에서 국민군단을 창설해 독립군 300여 명을 양성한 데 이어, 미국 중동부와 서부를 돌며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장군은 미국 시카고에 들렀을 때 눈물을 흘리며 일본과의 일대 결전을 호소했다. "그런즉 죽을진대 한번 용맹스럽게 독립전쟁을 하고 죽읍시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왜(倭) 원수는 해군, 육군과 군기가 많고 우리는 아무 것도 없으니 전쟁을 하여 무엇하리오. 하지만, 이는 결코 뜻 없고 지식 없는 말이라… 지금 형편을 보아도 중국의 전 민족과 러시아의 3분의 2 이상 인민 또는 미국의 전 국민이 모두 우리 편인즉 우리는 4,500만 되는 왜를 두려워 맙시다…"

 

 

그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첫 군무총장이 되었으나, 임정으로 가서 업무를 시작한 것은 1921년 2월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장군은 한인 동포 300여 명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1925년 이승만 임정 대통령이 임시 의정원의 결의로 탄핵·면직된 뒤, 박은식 선생이 제2대 대통령이 되자 임정에서 군무를 보던 장군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장군은 군무총장과 교통총장까지 겸했다.) 초기 상해 임정의 군사정책을 총지휘하며 이동휘, 유동열, 신채호, 박용만 등과 함께 무관학교 출신자를 주축으로 무력증진을 도모했다.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산업 구국'에 나선 해직 군인들

 

 

 
군무부 포고 제1호(1920).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백린 군무부총장이 군인의 양성과 군대편성의 중요성을 설명하고,대한민국 군인으로 지원할 것을 권유하는 포고문. /독립기념관

 

 

장군은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놀라운 계획을 추진했다. 항공편대를 몰고 가 일제를 폭격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일반인은 비행기로 항일전을 펼친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장군의 계획은 실제로 추진됐다. 그가 미국 본토로 건너가 독립을 위한 무력전쟁이 필요하다며 '독립전쟁론'을 설파할 때, 김종림이라는 교민이 비행사를 양성하자고 제의해온 것이다. (김종림은 벼농사를 지어 미국동포 최초로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다.)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은 누구?
 
 
윌로스(Willows) 비행학교 교관과 학생들 /출처='인간적인 책'
당시 임시정부 군무총장이던 장군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한인 비행학교인 윌로스(Willows) 비행학교를 세우고 우리 비행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독립 공군이 창설된 것이 이보다 불과 2년 전인 1918년이었으니, 윌로스 비행학교는 창설 자체가 선진적이었다.

이 학교는 1923년까지 총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윌로스에 비행사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전쟁에 대한 장군의 강한 호소와 여기에 호응한 김종림 등 재미 한인들의 열망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김종림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환갑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에 입대했으며, 두 아들도 미국 해군으로서 태평양 전선에 나서 일본군과 싸웠다.

 

 

 

비행사 양성학교는 미국인 교관 브라이언트와 이용선·오림하 등 한인 교관 7명, 학생 30명으로 구성돼 훈련이 진행됐다. 하지만 윌로스 비행학교는 노백린 장군이 임시정부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상해로 돌아간 뒤, 비행훈련 중 추락사고가 발생하고 자금난이 겹치는 바람에 아쉽게도 문을 닫고 말았다. 배출된 졸업생들은 후에 임시정부의 육군비행병과 만주 군벌 장작림 부대의 항공병 등으로 활약했다.

임시정부의 '비밀 공군사관학교'
"조지 리처럼 전쟁 영웅 되자" 한인 청년들 목숨 건 비행
 
  

 

노백린 장군은 줄곧 낙천적인 기질을 잃지 않았지만, 말년엔 정신이상이 왔는데 이는 영양실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장군은 평소 "말 타고 군복 입고 남대문에 입성하면 참 좋겠다"는 말을 노래처럼 했다. 상해에서 장군의 옆집에 살았던 김명수 전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그는 별세하기 직전 거의 매일 밤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말달리는 시늉을 하면서 "서울로 가자! 나의 보금자리!"라며 미친 듯이 외쳐 중국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마지막 길은 쓸쓸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별세하기 직전 그의 참담한 건강상태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6년 전에 미국에서 상해로 건너온 이래 여섯 해 동안 정신상으로나 혹은 물질상으로 무수한 고통을 받고 지내던 계원 노백린 씨는 작년 겨울 이래로 우연히 병을 얻어 일시는 위독하다고까지 전하여 오더니, 최근에 이르러 그의 병세는 이상하게 변하여 실진(失眞)이 되는 동시에 상해의 어떤 정신병원에 입원치료 중이라는데 위문가는 사람의 얼굴도 몰라보고 늦은 가을 쓸쓸한 바람에 형용이 초췌하여 백발을 휘날리며 종일토록 무슨 말을 중얼거리면서 별안간 울다가 또 별안간 웃기도 한다는 바…"
장군은 1926년 1월 22일 상해에서 영면했다.

(참고=여시동 저 '인간적인 책')

 

 

노백린, 전 생(生)을 바친 애국(愛國)

 

노백린, 후대의 이야기

후대로 이어진 장군의 독립 의지
장남 노선경 지사는 만주 신흥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둘째 아들 노태준 지사는 광복군 구대장(區隊長)으로 항일전선에 나섰다. 노순경 지사는 3·1운동에 참가해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중국에서 독립군을 지원했다. 노순경 지사의 남편 박정식 지사는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있을 때 독립군에 군자금을 댔고, 중국 하얼빈으로 건너가 직접 독립군을 치료했다. 노백린 장군의 사위인 이 박정식 지사가 바로 대한제국군 해산에 항거하며 권총자살을 했던 박승환 지사의 아들이다.

'2월 독립운동가(2000년)'에 노태준 선생


추모식

2016년 1월 22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계원 노백린 장군 순국 90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군의 유해는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치돼 있다가, 1993년 임정요인 유해 봉환 때 고국에 돌아와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안장됐다.

 

1993년 8월 5일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박은식, 노백린, 김인전, 신규식, 안태국 선생의 유해가 국립묘지에 봉안되기 위해 상해로부터 돌아와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임시정부요인 박은식, 노백린, 김인전, 신규식, 안태국 선생 5인의 유해가 상해로부터 돌아와 1993년 8월 10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있다. 사진은 박은식 선생의 유해가 안장되고 있는 모습. /전기병 기자

 

독립운동에 투신해 살신한 노백린장군의 71주기 추모제가 유가족이 참여한 가운데 1997년 1월 22일 국립묘지 임정묘역에서 거행됐다.

/조인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