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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 관하여

수로보니게 여인 2007. 8. 23. 20:48
제1장 수필본질론 / 권대근

   지금부터 수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 논의에 앞서 해결해야 할 첫 번째 임무가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수필을 잘못 선도해 온 수필에 관한 정의부터 비판적으로 접근하여 새로운 정의를 이끌어 내는 일이다. 수필의 본질을 정의하거나 개념을 요약한 내용이나 문구는 많다. 문학이론서나 수필문학입문서에 언급되어 널리 알려진 것만 해도 무려 50여 항목에 이른다. 수필은 미완성의 문학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시나 소설과는 달리 그 정의에 있어 각기 의견이 다양하기 때문에, 수필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는 수필론을 올바르게 전개해 나가자면 어떻게든 수필의 정의를 이끌어 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논의의 대상에 대해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면, 논의 자체가 갈팡질팡해져 수필학의 연구는 엉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수필’의 개념을 먼저 정립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정의되어온 ‘수필’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접근하여, 수필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1. 수필의 정의

   수필의 개념은 수필의 특성을 가장 간단하고 분명하게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수필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은 수필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정의의 방법 중에서 가장 엄격한 것은 분류적 정의다. 분류적 정의는 정의되는 말, 정의되는 말의 상위종류(상위개념), 정의되는 말의 동의 종류와(동위 개념과)의 차이점(특성)을 포함한다. 부산대 이대규 교수는 수필의 개념을 분류적 정의에 의하여 규정하여,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지은이와 작품 속의 말하는 이가 일치하는), 제재 또는 주제 중심의 문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내려진 어떤 수필의 정의보다 정의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흔히 인용되는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정의와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운 글’이라는  정의는, 수필의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 못하며, 수필을 다른 종류의 문학과 구별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비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정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필을 잘못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잘못 쓰면서도 누구나 쉽게 쓰겠다고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이런 정의를 내린 사람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대규 교수는 지금까지 금과 옥조처럼 여겨온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정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란 한문의 ‘수’와 ‘필’을 번역한 것으로 보면서 "뜻이 불분명한 정의"라고 단정하고 있다. 정의는, 정의되는 말을 모든 사람이 같은 의미로 이해되도록 진술되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정의는 비유로 표현되지 않아야 한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정의는 의미가 불분명한 비유적 정의다. 이러한 정의는 수필에 속하는 작품과 수필에 속하지 않는 작품을 구별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필을 써본 사람이면, 이런 안이한 수필관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이란 소재와 주제가 겸비되어야 하고 또 매끈하게 다듬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형식과 내용이 조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수필도 하나의 작품일진대 이런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붓 가는 대로 써 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흔히 한국 문학자들은 위와 같은 정의를 하면서, ‘수필’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중국 남송 시대 홍매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홍매가 사용한 수필의 뜻은 문학의 한 종류를 뜻하는 수필의 뜻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홍매는 수필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나, 이 말을 문학의 한 종류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홍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는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운 글’이라는 정의를 살피고 있는데, 이러한 정의를 하는 사람들은 ‘형식’이 무엇을 뜻하며,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히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형식’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며, 형식이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질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언어로 구성되는 작품에서 형식이라는 말은 작품 쓰기의 규칙을 가리키는 수가 있다. 평시조는 네 음보가 한 행을 이루고, 세 행이 한 연을 이룬다. 평시조를 쓰는 사람은 이 규칙에 따라서 작품을 짓는다. 그래서 평시조의 형식은 네 음보가 한 행을 이루고, 세 행을 한 연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식적인 설명문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된다. 이것이 공식적 설명문 쓰기의 규칙으로서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필은 형식이 자유롭다’는 말은 수필에는 쓰기 규칙이 없으므로, 쓰기 규칙에 따라 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 중에는 일정한 쓰기 규칙에 따라 쓰지 않는 것이 많고, 현대 소설도 대부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창작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현대시나 현대소설 중에는 형식이 자유로운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형식이 자유롭다’는 정의는 수필을 현대시나 현대소설과 뚜렷하게 구별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다른 편으로 잘 쓰여진 수필은 작가가 설정한 규칙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발전하도록 구성되기도 한다. 이러한 수필을 형식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수필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운 글' 이라는 정의도 수필과 수필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이대규 교수의 비판 논리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만, 그렇게 받아드려진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애시당초 분명치 못한 정의 자체가 우리 수필을 오도해 온 결과로 오늘날 수필을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거나 ‘수필은 형식이 자유롭다’는 정의는 반드시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글은 붓이 쓰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어떤 사상과 느낀 감정이 있어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써지는 것이다. 그 의도를 표현함에 있어 수필은 일정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쓸 수 있으며, 그 형식은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이 갖고 있는 성격과 품격에 의해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작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인 주제가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필자와 작품 속의 화자가 일치하는 주제 중심의 문학으로 정의된다고 하겠다.

2. 수필의 속성

  수필의 본질론이라 함은 수필의 근본이 되는 진수를 따지는 장으로서 수필에 있어서 가장 중심론이 된다. 어느 문학 장르든 ‘본질’을 논하게 되면 그 장르를 대변할 수 있는 중요한 속성을 캐내어 열거하게 된다.  그 속성들을 다시 주워 모아 합쳐 놓으면 곧 수필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셈이다.
   본래 문학은 예술의 한 형태이고, 그리고 문학 예술은 여러 가지 장르를 가지고 있으며 각 장르마다 제 나름의 본질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각 장르가 갖는 특수한 본질을 좇아 무엇을 써야 문학이 될까하는 것은 어느 장르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또 이는 그 장르별 작가가 갖는 공통되고 영원한 고민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써야 수필이 될까는 어디까지나 본질적 고민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릇 문학의 정의를 들어보면, 크게 보아 문학이란 ‘인생을 그리는 글’이지만 달리 협의로서 문학이란 ‘미를 추구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필의 기본이 되는 본질은 첫째 미를 추구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미를 탐구하는 탐미성을 넓게는 예술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필을 쓸 때, 항상 수필은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새 수필의 범주가 넓다고 하니까 무엇이든 쓰면 수필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수필은 엄연히 ‘미를 추구하는 글’이기 때문에 미를 추구하지 않는 수필을 수필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수필은 문학이니까 철학과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고, 정치, 종교, 사상, 역사를 쓴 글과도 대별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이런 것들이 수필이 되려면 반드시 문학적 형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철학수필 사상수필, 사회수필 등 제 나름대로 갖가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유지만, 그러나 그 글들이 최종적으로는 문학(미의 구축)이 되지 않으면 수필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의 2대 기능으로 우리는 교훈성과 쾌락성을 든다. 쾌락이 감각이 되었던, 정서가 되었던, 카타르시스가 되었던 간에 쾌락설은 수필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본질임에 틀림없다. 어느 문학 장르든 미적 쾌락성 추구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재미가 없으면 수필은 읽혀지지 않는다. 우리가 한 편의 수필을 읽고 만면의 희색을 띄우는 것은 그 수필 속에 들어 있는 쾌락성 때문일 것이다.
   요사이 우리 수필을 돌아보면 반성할 점이 많다. 수필을 읽으면, 가슴이 뜨겁든지, 눈물이 나든지, 웃음이 터지든지, 무엇 하나가 있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뜨뜻미지근한 수필들이 주종을 이룬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수필을 읽을 것인가? 냉담한 수필은 냉담한 대로 쾌락을 느끼는 법이다. 포멀 에세이의 생명이 교훈성에 있다면, 인포멀 에세이의 진수는 바로 이 쾌락성에 있을 것이다.
   수필이 다른 장르와 두드러지게 달리 드러내는 본질은 진솔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을 자아의 문학이라고 부르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수필은 꾸밈없는 솔직한 자기현시의 글이다. 그리고 수필은 주제 의식을 가장 뚜렷이 나타내는 글이라, 저자가 주고자 하는 그 ‘무엇’이 주제라면, 그 주제가 직설적이든 암시적이든 가장 솔직히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글이 바로 수필인 것이다.
   다음으로 수필에 들어 있는 본질은 서정성이라는 것이다. 문학의 서정성은 모든 장르에 공통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본질이라는 사실이다. 운문이든 산문이든 이 서정성은 그 문학 장르의 밑거름을 이루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정수필이건 주지수필이건 그 수필의 문체에는 서정성이 깔려 있어야 된다. 서정성은 모든 문학의 밑거름이 될 뿐만 아니라 그 문학의 성패를 좌우한다고도 볼 수 있다.
   역시 수필에 필요한 것은 유머 감각이다. 수필에서 유머 감각이란 가장 독자적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머 감각은 수필을 한층 멋스럽게 한다. 오늘날 서양수필에서는 이 유머 감각이 빠지면 수필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은 에세이스트라고 하면 유머리스트라 할 정도로 수필에 있어서 유머 감각을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다루고 있다. 유머는 수필을 재미있게 해서 결국 독자에게 즐거움을 준다.  공덕룡은 즐거움을 정적 즐거움, 지적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 심미적 즐거움, 수사적 즐거움 등 다섯 가지로 나누고 우리 나라 수필은 대체로 정적 즐거움과 심미적 즐거움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익살의 본성은 경멸과 비웃음에서 나오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온정적인 연민에서 나오는 웃음으로, 슬픔과 웃음을 동시에 느끼게끔 한다. 웃음 뒤에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유머 감각은 그 본성이 선한 데 있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다분히 선하고 낙천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이 유머 감각에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