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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감독이라는 편견, 날리고 싶었죠"

수로보니게 여인 2009. 8. 13. 19:51

 

 

"코미디 감독이라는 편견, 날리고 싶었죠"

한현우 기자 hwh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9.08.13 03:02 / 수정 : 2009.08.13 11:17

 

윤제균
'해운대'로 영화계 강타… 관객 1000만 돌파 눈앞

생각했던 것보다 윤제균(40) 감독의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영화 '해운대' 관객이 800만 명을 넘어선 12일 서울 논현동 JK필름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얼떨떨해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800만 한 사람 한 사람에 정말 감사하고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시사회 전부터 '코미디 감독이 재난영화 찍겠느냐'는 식의 말이 돌았거든요. 보지도 않고 깎아 내려서 되게 속이 상했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에서 어느 날 갑자기 히트작 감독이 된 그는 영화계 안팎의 질시와 텃세를 꽤 겪은 듯했다. 그는 1999년 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2001년 '두사부일체(350만명 동원)'로 감독 데뷔했다. 영화판에서 잔뼈 굵지 않고 바로 통뼈가 된 셈이었다.

윤제균 감독은 “‘낭만자객’때 나락으로 떨어졌고 ‘해운대’로 최고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며 “이제 내 안에 뭔가 단단한 게 생겨났다”고 말했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히트작을 내고도 인정을 못 받은 면이 있지요.

"'두사부일체' 350만 명, '색즉시공' 420만 명, 그러다가 '낭만자객'에서 관객 평단 모두 등 돌리니까 영화계, 언론, 투자사 모두 그랬죠. '거 봐라. 윤제균 감독, 거기까지.'"

―'해운대'는 그들에 대한 대답인 셈인가요.

"좀 거만하게 얘기하면, 예, 그렇습니다."

낙민초―동래중―사직고를 졸업한 그는 부산 토박이다. "10년 전 영화 시작할 때 내 고향을 배경으로 꼭 영화를 찍고 싶었다"는 그는 '해운대'로 그 꿈을 이뤘다. 극중 설경구하지원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해운대 시장통에서 찍었다. "세트 짓는데 18억원이 든대요. 할 수 없이 시장이 쉬는 작년 추석에 딱 하루, 그것도 오전 6시간 동안 찍은 겁니다." 폭 10m, 길이 100m짜리 인공 풀장을 만들어놓고 촬영하는데 골목이 내리막이어서 물이 자꾸 기울었다. 감독과 배우, 스태프 전원이 해운대에서 모래를 퍼 날라 둑을 쌓았다. 누군가 그걸 보고 "해운대 모래 훔쳐간다"고 신고해 경찰까지 출동해 "하여튼 정신없는 하루였다"고 했다.

―하늘에서 컨테이너가 떨어지는 장면, 갈매기가 자동차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규모로는 할리우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 장면은 큰돈이 들지 않습니다. 쓰나미 장면은 한 컷에 1억원짜리입니다. 결국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지 않나 합니다. 한국영화가 갈 길도 그런 것 같고요."

그는 '해운대'를 시작하면서 두사부필름이었던 회사명을 JK필름으로 바꿨다. 코미디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무실 출입문엔 '大道無門(대도무문)'이란 팻말이 붙어 있었고 화장실 팻말은 '危機一髮(위기일발)'이었다. 농담과 재미가 그의 천성인 듯했다.

―평소 재미있는 분인가요.

"제가 좀 내성적이어서 친해지기 어려운데, 친해지면 저 되게 재미있습니다."

윤제균을 영화계로 이끈 동력은 재미가 아니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LG애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IMF 직후인 1998년 4월 결혼했고 그해 8월 한 달간 무급휴직을 해야 했다. 남들은 휴직 때 외국여행 간다는데, 은행대출 받아 신혼살림 시작한 그의 통장잔고는 늘 '0'이었다. 그는 "'나는 왜 이렇게 가진 게 없나' 하는 자괴감에 너무나 힘들었다"고 했다. 그때 그가 선택한 것이 집에서 시나리오 쓰기였다. 그것이 공모전 대상을 받았고 영화 '신혼여행(2000년)'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경험도 없이 어떻게 감독이 됐습니까.

"두 번째 시나리오로 '두사부일체'를 영화사에 넘겼는데 감독이 없대요. 그래서 '내가 해보겠다'고 했죠. 영화사에서 '미쳤느냐'고 하더군요."

이미 감독에 완전히 '꽂혀버린' 그는 국내외 영화 50편을 비디오로 빌려 원하는 장면을 뽑아 짜깁기했다. 그렇게 15분짜리 영화를 만들었다. 광고계의 프레젠테이션 기법인 '레퍼런스 무비(reference movie)'였다. 그 테이프를 영화사에 내밀며 "이런 식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일할 때 저의 원칙이, 상대가 100을 원하면 200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120이나 130 가지곤 안됩니다." 한 달간 설득 끝에 영화사에서 연출 허락을 받았다.

"인생 정말 새옹지마(塞翁之馬)입니다. IMF가 없었다면 휴직이 없었을 것이고, 휴직 때 제가 돈이 많았다면 여행이나 다녔을 텐데요. 그래서 98년 8월은 내 인생이 바뀐 시기입니다."

그는 거실에 네모난 밥상을 놓고 시나리오를 쓴다. 첫 시나리오부터 '해운대'까지 모두 이 밥상 위에서 썼다. "그 밥상은 우리 집 가보(家寶)입니다. 그 밥상에서 한국 코미디 계보를 이었으니까요."

―그 밥상이 흥행기록(괴물·1300만명) 계보도 잇겠죠.

"아유, 아닙니다. 아니에요. 지금도 정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 경상도 사나이의 겸손에도 불구하고, 영화계에선 '해운대'가 다음 주 10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더욱 겸손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