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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갈릴레이' 천문학자 오윤부

수로보니게 여인 2009. 6. 28. 20:59

 

[Why]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고려의 갈릴레이' 천문학자 오윤부

입력 : 2009.06.27 03:17 / 수정 : 2009.06.27 15:44

점성에 능해, 원나라까지 알려져
직언하다 관직 삭탈에 형장당해

오윤부(伍允孚)는 고려 충렬왕 때 활약했던 천문(天文)전문가였다. '고려사'에는 개인사와 관련해 "부흥군 사람으로 대대로 태사국(太史局) 관리를 지냈고 충렬왕 때 관후서 판사(觀候署 判事)로 승진됐다"는 기록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오(伍)씨는 이후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대대로'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몇 대 위에서 고려로 귀화한 중국의 천문 전문가 집안의 후손일 것으로 본다. 태사국은 천문 역수(曆數) 측후(測候) 등을 맡아보던 기관이고 관후서도 태사국과 비슷한 기능을 했던 기관이다.

태사국 관리가 역대로 수없이 많을 텐데 '고려사'에서 굳이 오윤부를 최고로 꼽은 이유는 뭘까? 그는 먼저 자기 일에 성실했다. "매일 밤 한 잠도 자지 않고 별자리를 살펴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병으로 앓지 않으면 하룻밤도 빠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점성(占星)에도 능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이 원나라에까지 퍼져 원나라 세조가 직접 불러들여 그의 별 점을 직접 시험한 후에는 더욱 유명해졌다. 한번은 원나라 세조가 정벌에 나서며 사위인 충렬왕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해 돕도록 명했다.

이에 충렬왕은 군사를 이끌고 평양에 이른 다음 유비(柳庇)라는 신하를 먼저 파견했다. 그리고 오윤부를 불러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점을 쳐보도록 했다. 오윤부는 "무슨 날이면 유비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전하께서는 출전하실 일이 없습니다"고 답했다. 그날이 되어도 유비가 돌아오지 않자 충렬왕은 오윤부에게 "네 점이 틀렸다"며 시종들로 하여금 잡아갈 것을 명했다.

오윤부는 성질이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습니다"고 맞섰다. 잠시 후 저 북쪽에서 유비가 말 먼지를 날리며 돌아왔다. 유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세조에게 당도하기 전에 정벌사업이 끝나는 바람에 동원령이 취소됐다는 것이었다. 이후 오윤부에 대한 충렬왕의 총애는 거의 절대적으로 바뀌었다.

사실 유교의 원칙에 따라 편찬된 '고려사'가 조금은 과할 정도로 오윤부의 별 점치는 사례들을 자세하게 소개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오윤부는 점에도 능했지만 하늘을 빌려 인간사(人間事)를 경계하는 유교적 관점의 천문가였기 때문이다.

재이(災異·기상이변)는 유학에서 곧 재앙의 조짐이었다. 오윤부는 이 점을 활용해 당시 충렬왕보다 더 큰 권세를 누리고 있던 왕비 제국대장공주(원나라 세조의 딸)와 여러 차례 충돌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충렬왕도 두들겨 패던 공주였다. 그 공주에 맞서려면 따라서 목숨도 걸어야 했다.

충렬왕이 태묘(太廟)에 새 신위(神位)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려 할 때 공주도 그 제사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이에 오윤부가 "태묘는 조상의 신령이 있는 곳"이라고 주장해 공주가 두려워하며 제사 참여를 포기했다. 또 공주가 궁궐의 신축 공사를 벌이려 하자 "지금 하늘에서 변이(變異)가 여러 차례 나타났으니 궁궐 공사를 중단하시고 덕을 닦음으로써 이 재변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다시 공주가 궁궐 신축을 추진하면서 오윤부에게 택일(擇日)할 것을 명하자 오윤부는 거부했다. 명분은 지금은 택일 자체를 해서는 안 될 때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오윤부는 관직을 삭탈당했고 충렬왕도 괘씸하다고 여겨 형장(刑杖)을 가하였다. 그래도 오윤부는 굴하지 않았다. "택일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이하는 것인데 위협하여 날을 가리게 한다면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나는 살육을 당하더라도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사례를 보면 오윤부는 공주를 맹목적으로 배척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번은 세조가 딸과 사위를 위해 전(前) 송나라 명의를 직접 고려로 보내 조양환(助陽丸)을 조제토록 배려했다. 명칭으로 보아 일종의 '비아그라'였던 것 같다. 충렬왕과 공주는 그 명의를 무척 아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윤부가 그 약의 맛을 보더니 통분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약은 수태하는 데 좋지 못한 것이니 삼한(三韓)의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는 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실제로 그 이전까지 거의 해마다 임신을 했던 공주는 충렬왕이 이 약을 먹기 시작한 후로는 더 이상 임신을 하지 못했다.

오윤부의 충성은 어쩌면 충렬왕 개인을 넘어선 고려 자체를 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늘 봉은사라는 절에서 새 달의 시작을 알리는 제사를 올릴 때마다 "태조시여! 태조께서 창안하신 이 나라 국정이 날로 틀려갑니다"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그는 하늘에 기대어 재상들도 하기 힘든 충간(忠諫)을 했던 인물이다. '고려사'가 그를 주목한 진짜 이유다. 이를 보면 귀화한 중국인 후손이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