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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엔 '다빈치 코드' 뺨치는 비밀 10가지가...

수로보니게 여인 2009. 6. 29. 19:48

 

조선왕릉엔 '다빈치 코드' 뺨치는 비밀 10가지가...

조선닷컴 

입력 : 2009.06.29 08:38 / 수정 : 2009.06.29 12:26

 

조선왕릉은 중국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띠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조선왕릉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10가지를 동아일보가 29일 보도했다.

1.조선왕릉은 왜 서울 경기에 몰려 있을까?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100리(40km) 떨어진 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라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2.어느 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힌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태종 능 위치는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조선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으로 왕이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에,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3.조선왕릉은 왜 거의 도굴이 안 됐을까?

이 신문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빼고 도굴된 적이 없다. 세종의 영릉(경기 여주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4.왕과 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 못한 까닭은?

왕릉은 당대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됐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명종을 수렴청정한 ‘여걸’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 정릉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결국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외로이 묻혔다. 태릉이다.

5.봉분 앞 혼유석의 정체는?

이 신문에 따르면 봉분 앞 돌상인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 북을 닮은 고석(鼓石) 4개가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 이 큰 돌은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숨어 있다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인 셈. 실제로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은 문고리를 물었다.

6.최장신 문·무석인은 어디에 있을까?

문석인(문관)과 무석인(무관)은 대체로 사람 키를 훌쩍 넘어 권위를 뽐낸다.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다. 3m 이상이다. 중종 시대(16세기)는 석물의 장엄미가 최고조였던 때다. 철종은 19세기의 왕이 아닌가. 전문가들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몄다고 말한다.

7.정자각의 계단은 왜 측면에 있을까?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라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8.봉분 뒤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

이 신문에 따르면 왕릉에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다. 봉분 뒤 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뜻했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했다. 지대가 낮은 홍살문(왕릉 입구)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태조의 건원릉(경기 구리시) 봉분에는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한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9.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황제릉?

고종은 1897년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대한제국)라고 선포했다. 경기 남양주시 홍릉과 유릉은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홍·유릉은 정자각(평면이 ‘丁’자 모양) 대신 중국의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의 석물도 코끼리, 낙타 같은 낯선 동물을 배치했다. 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인 반면 홍·유릉의 석물은 황제의 위용을 드러낸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10.서삼릉에는 왕족의 공동묘지가 있다?

세 왕릉이 있는 서삼릉(고양시)에는 왕자, 공주, 후궁의 작은 묘 46기가 모여 있어 공동묘지를 연상시킨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도시화 과정에서 자리를 잃은 묘와 원(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들이 서삼릉으로 쫓겨 왔다. ‘공동묘지’ 옆에는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 54기도 있다. 원래 태실은 전국의 명소에 묻었는데 일제가 서삼릉으로 몰아넣었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온전히 보존된 세계 유일의 조선왕릉"
 
 

 

 

내용출처 : http://realwindow.co.kr/842

 


조선 왕릉

 

최초작성 [Opentory1 05.14 16:15] | 마지막 업데이트 [Greensoup81 07.08 13:13] 이 문서는 총 150번 읽혔습니다.

조선왕릉은 서울과 경기, 강원도에 있는 조선시대(1392~1910) 왕릉 40기를 일컫는 것으로 519년 동안 존속된 조선시대 27대 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된 왕·왕비의 무덤을 망라한다.


목차

[숨기기]

| 편집 | 세계문화유산 등재권고

ICOMOS가 2009년 5월 13일 조선시대 왕릉 40기가 유네스코에 제출한 ‘조선왕릉에 대한 평가결과보고서’에서 ‘등재 권고’로 평가했다. 이로써 문화재청이 2008년 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조선왕릉’은 6월 22~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리는 제33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최종 보고 및 승인 절차만 남겨놓았다.

관례에 비추어 보면 지금까지 ICOMOS가 등재 권고한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거부된 사례가 없으므로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는 사실상 확정된 셈이다.


ICOMOS는 유교와 풍수 전통을 기반으로 한 조선왕릉의 독특한 건축·조경 양식과 제례의식의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왕릉이 최종 등재되면 우리나라는 종묘·창덕궁 등에 이어 총 9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된다.

| 편집 | 세계문화유산 등재

2009년 6월 26일(현지시간)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 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


유네스코는 등재 평가 보고서에서 조선 왕릉에 대해

▶ 유교·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 양식의 세계유산적 가치가 충분하며

▶ 제례의식 등 무형의 역사적 전통이 이어지고

▶ 조선 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관리되는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


권고 사항

▶ 일부 훼손된 능역의 원형 보존

▶ 개발 압력에 따른 완충 구역의 적절한 보존 지침 마련

▶종합적 관광계획과 안내 해설 체계 마련


| 편집 | 조선왕릉 분포도

출처:중앙선데이,2009.07.05
출처:중앙선데이,200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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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 | 조선왕릉의 특징

조선왕조 500여 년 왕위에 오른 사람은 27명이다. 이 중 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은 폐위됐다. 그래서 그들의 무덤은 왕릉이 아니다. 대신 나중에 왕·왕비로 추존돼 무덤이 왕릉으로 격상된 경우가 다섯 차례 있다. 성종·인조·헌종 각각의 부모가 그랬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의 부모도 있다. 사도세자혜경궁 홍씨는 훗날 장조·헌경왕후로 추존됐다. 정조는 양아버지도 있다. 영조의 맏아들이자, 9살 어린 나이로 숨진 효장세자다. 사도세자가 숨진 뒤, 영조는 훗날의 정조인 세손을 죽은 맏아들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잇게 했다. 정조로서는 큰아버지가 양아버지가 된 셈이다. 이런 왕·왕비의 무덤을 모두 합하면 42기다. 이 중 태조 이성계의 원비 신의왕후가 묻힌 제릉과 2대 정종의 후릉은 북한 개성에 있다. 2기를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40기 전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위치

왕릉은 주로 수도권에 몰려 있따. 이유는 왕릉을 도성을 중심으로 40㎞ 안에 두도록 경국대전에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후손인 왕이 궁궐에서 하룻길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효(孝)의 실천을 위한 입지로 해석된다. 예외는 있다.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은 사후 240년 만에 복위된다. 그가 묻혔던 무덤도 장릉으로 격상됐지만, 여전히 서울에서 먼 강원도 월 그대로다. 추존왕 장조, 즉 사도세자의 융릉도 비교적 멀다.


이름

왕·왕비가 숨진 뒤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새 왕이 정했다. 능호는 한 글자다. 태조 이성계만이 조선을 건국한 공을 기려 건원(建元), 두 글자가 붙었다. 겹치는 경우는 없다. 왕릉을 옮기더라도 능호는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죽은 이의 신분이 바뀌면서 무덤 이름이 바뀌는 경우는 있다.

예컨대 세자빈으로 숨졌다가 나중에 남편이 왕위에 오르면 왕후가 되고, 무덤도 능으로 이름이 붙여지는 원리다. 동구릉·서오릉·서삼릉은 능호가 아니다. 모여 있는 수를 헤아려 부르는 말이다. 동구릉이 동오릉·동칠릉이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봉분

조선왕릉의 봉분 형태는 다양하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각각 만들어 나란히 배치한 쌍릉, 하나의 능이되 각기 다른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배치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언덕의 위아래로 왕·왕비의 봉분을 배치한 동원상하봉릉(同原上下封陵) 등이 있다. 봉분이 하나인 합장릉도 물론 있다. 이 경우 내부의 석실은 분리돼 있다. 한 언덕에 왕·왕비·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삼연릉도 있는데, 헌종의 경릉이 유일하다. 왕이나 왕비가 혼자 묻힌 경우는 단릉이라고 부른다. 궁중 드라마에 곧잘 등장하는 숙종이 묻힌 명릉은 복합적인 형태가 특이하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봉분은 한 울타리 안에 쌍릉을 이루고 있고, 좀 떨어져 인원왕후가 단릉으로 묻혀 있다. 봉분은 셋이되 전체가 하나의 능이다.


석물

화강암으로 만든 석호·석양은 무인석·문인석·석마와 함께 조선왕릉마다 빠지지 않는 석물이다. 용맹한 호랑이와 온순한 양을 번갈아 배치한 것이 음양의 조화를 꾀한 의도로 추측되고 있다. 앉고 선 자세가 교차되는 것도 이런 추정을 돕는다. 중국의 왕릉에도 석호·석양이 등장하는데, 조선 왕릉과 달리 봉분 앞에 도열한 형태라 역할이 다른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왕릉의 석호·석양은 봉분 주위를 바깥쪽을 향해 둘러싸고 있다. 외부로부터 왕릉을 수호하는 의미다. 그 생김새가 친근하고 해학적이기까지 한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시대성덕왕릉은 네 귀퉁이에 사자를 배치하기도 했다. 석사자 대신 석호가 나타난 것은 고려시대다. 석양 역시 고려시대 무덤에도 등장한 기록이 있다.


가는 길

두 겹의 참도는 각각 신도(神道)·어도(御道)로 불린다. 둘 중 약간 낮고 좁은 쪽이 참배하러 온 왕이 다니는 길이다. 넓고 높은 길은 능의 주인인 죽은 왕을 위한 길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길을 구분한 것은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도 마찬가지로 두 겹이다. 제향을 드리는 곳인 정자각(丁字閣)은 죽은 자와 산 자가 교류하는 공간이다. 제향을 드린 뒤 돌아 나오는 것은 산 자다. 반대로 정자각 너머 봉분이 있는 언덕은 죽은 자의 공간이다. 조선왕조 말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격에 맞게 왕릉을 꾸민 고종·순종의 홍릉·유릉은 좀 다르다. 신도 양쪽에 어도가 있는 3겹 구조다. 정자각도 정(丁)자가 아니라 일(一)자 형태다. 또 조선 초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은 신도·어도의 구분이 없이 한 겹으로 만들어져 있다.


| 편집 | 관련표제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세계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