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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개론/ 고소설의 발달과정

수로보니게 여인 2009. 2. 17. 15:34

고소설의 발달과정

                                                                                                          국문학과 교수 박 태 상


고소설이란 결국 조선시대 초기에 발달하여 개화 이전까지의 구 관념에 입각한 국문과 한문으로 씌어진 소설을 의미하게 된다. 모든 민족문화가 다 그러하듯이 우리 고소설도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것은 아니고 상대에서부터의 점차적인 시험시기를 거치어 왔다. 고려 말 민족역사에 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많은 인물들의 전기가 사서에 수집이 되었고, 따라서 逸事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어 갔다. 이 결과 비록 正史에서는 논급되지 않았지만, 기억될 만한 개인의 사건들이 뜻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이 되면서 ‘傳’의 문학이 크게 부각되었다. 여기에서 실존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그 특성에 맞추어 전기를 창작하는 시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소설이 형성되어 갈 무렵에 한글이 창제되어 한글문학이 시작됨으로써 문자생활이 이원화하였다. 한글이 널리 보급되고 한자만을 사용하는 계층이 학대됨에 따라 한글로 된 소설이 형성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소설이 뚜렷한 하나의 문학양식으로 확립되기까지에는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던 여러 가지 형태의 문학 양식들 간에 접촉과 변화, 복합을 거쳐서 문화적,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서 널리 인정받게 될 바탕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 양식의 원초적 뿌리는 이야기 문학에 있다. 서사문학의 초기 형태인 口碑傳承的 이야기는 설화로 통칭되고 있다. 이 광의의 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으로 구별되지만, 우리 문학의 전통을 놓고 볼 때 신화, 전설, 민담이란 세 서사 문학의 영역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만은 아니다. 신화나 전설 또는 민담에는 소설의 형태가 됨직한 소재나 구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더러 있다. 이들 초기 설화문학 중에서 신격을 주인공으로 하는 신화, 사실을 근거로 하는 전설보다는 허구성과 흥미성을 더욱 강조한 민담형 이야기가 발전적 변모를 보이며,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기록문학인 傳奇文學의 형식을 일부 수용하면서 보다 새로운 양식으로 발돋움한 것이 소설양식이라 할 수 있다. 즉 소설은 다듬어진 敍事形態를 지니며, 설화적 이야기 이상의 것을 표현하려는 서사적인 기록문학의 한 형식이다. 이로 인하여 소설은 주제, 인물, 사건, 문체, 분위기, 시점 등 대립적인 여러 志向素의 통합에 의한 문학예술로서의 총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고조선의 단군, 북부여의 해모수,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혁거세, 가락국의 수로 등과 같은 시조신화에는 이미 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관심은 인물의 일생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그 탄생과 탄생전후의 자정을 신성한 것으로 인식하는 일반적인 고대 서사양식의 기본적인 형태의 하나이다.

신라시대의 설화를 모은 것으로 알려진 <수이전> 「虎願」이나 「심화요탑」 등의 설화도 일상적인 일이 아닌 기이한 사건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여준다. <국사기> 김유신전의 귀토설화는 전혀 사실이 아닌 가공적인 이야기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적인 사실과 결부된 도미의 이야기나, 전혀 이야기의 재미를 공상에 둔 旁㐌의 설화는 인간의 생활 공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나 인간의 강렬한 소망을 나타내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고소설을 살펴보면 그들 중의 많은 부분이 전래되는 설화와 같거나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소설은 장르론적 입장에서 보면, 작중 인물인 주체의 의식과 그를 에워싼 환경으로서의 세계가 상호 힘을 발휘하면서 야기되는 갈등을 주요한 구성 원리로 고 있다. 이런 서사적 축의 핵심을 이루는 갈등은 주체와 세계로서의 객체가 서로의 진실성을 추구하면서 지속적 분열을 보이므로, 그 분열의 양상 자체가 주요한 서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런 갈등의 전개로 논리적 서사구조 위에서 주인공과 그 對役的 인물이나 보조적인 주변 인물들의 성격이 극적으로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소설작품의 주제와 사상이 선명히 형상된다.

소설 속에 담을 내용의 질적인 수준을 올려 소설을 보다 높은 수준의 문학 양식의 반열에 끌어올리려는 일부 혁신적이고 개방적인 지식인에 의해 소설은 한시와는 전혀 다른 개성 속에서 질적인 성숙을 높여가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전환에는 중국문학이란 외래적 문학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들을 받아들여 土着的 소설을 형성해가는 데는 진취적 문인으로 평가될 수 있는 金時習, 許筠, 金萬重, 朴趾源 등과 같은 창의성 높은 작가의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귀족문학과 서민문학의 장벽을 허물면서 비롯된 소설 장르도, 한문소설인 상층소설이 임․병 양난 이후 서민적 국문소설로 중심이 옮아감으로써, 본격적 소설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초기의 중국적 한문소설은 한국적 한문소설로 변모하고, 국문소설은 번역체 국문소설에서 순수한 국어체의 국문소설을 발전하여, 우리 소설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모습의 고전소설이 출현하게 되었다.

초기의 한문단편과는 달리 구체적인 작가는 알 수 없지만 다수의 작가가 창작에 참여하여 국문소설을 생산해 냄으로써 소설의 발전 시대가 열리게 되자 다양한 내용의 고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문학적 욕구를 충족시키게 되었다.
이런 발전의 시기는 중세적 의식에서 근대적 의식으로 옮아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고소설의 세계관은 共同社會的 인간상을 바탕으로 한 신성小說에서 利益社會的 인간상을 바탕으로 한 世俗小說로 변모되고 발전되었다.



고소설의 발달과정                                                                            

軍談系 한글 영웅소설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귀족소설과 서민소설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이들
두 영역을 하나의 소설세계로 확장, 심화시킨 작가가 金萬重이다. 17세기 후반은 임․병 양난의 충격에 대처하는 시기였다. 많은 학자와 관료들은 침략 및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재편의 와중에서 당면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학문적 정치적으로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그 대립의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서포 김만중이었다. 그는 1665년 정시에서 장원급제하여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27년 동안 정치활동을 하였다. 당시 정쟁이 격렬하였던 탓에 정치 활동 기간 동안 그는 금성(1674년 1월 4월), 선천(1687년 9월 이듬해 11월), 남해(1689년 윤 3월 1692년 4월) 등지에서 세 차례 총 4년 6개월의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마침내 남해 유배지에서 타계하였다. 그는 당대의 풍속과 정치 현실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유불선을 통괄하는 사상적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것이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에 잘 형상화되어 있다. 그는 영웅소설의 구조를 수용하면서도, 보다 철학적이고 종교적 주제를 담은 새로운 형태인 夢字小說을 창안하여, 한문본과 국문본으로 함께 내놓았다. 그 결과 양반 지식인으로부터 외면 받던 고소설은 상업적 출판인인 판각업자에 의해 최초로 한문본 구운몽이 판각되어 소설 출판의 새로운 길을 마련하였다.

또 그의 「謝氏南征記」에서는 유한림이 淑德과 才學이 겸비한 사씨와 결혼하였으나, 사씨는 9년이 되어도 출산을 못하여 남편을 권하여 첩인 교씨를 맞이한다. 교씨는 天性이 악하여 자신의 자식을 낳고는 교만해져서 正室이 되려고 자기 자식을 죽이고서 사씨가 죽였다고 모함한다. 사씨를 쫒아내는 데 성공한 교씨는 동청과 간통하며 남편 유한림마저 참소하여 流配시키는 불의를 저지른다. 유한림은 비로소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남행을 하다가 먼저 관음보살의 자비로 그를 기다리는 아내 사씨와 재회한다. 또 조정에서의 석방 통보를 받고 사씨를 찾는다. 유한림은 사씨에게 스스로의 잘못을 사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씨 일당을 처벌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고소설의 작가층이 두터워지면서 한문소설과 국문소설이 공존하게 되지만, 국문소설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와 함께 고소설의 구조나 주제도 유형성을 지니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며 다수의 고소설이 창작된다. 이들 고소설의 주제는 조선왕조가 유교윤리를 바탕으로 倫理網常을 강조했기에, 이를 중심으로 한 충, 효, 열이 보편적 주제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충을 통한 개인의 영달이 부모를 세상에 드러내는 효의 최종적 실천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군담적 소재를 에워싼 영웅소설의 형태로 나타났다. 영웅소설의 골격인 주인공의 출세담의 진행과정에 의 애정담이 삽입되고, 불의를 격퇴하는 忠臣의 모습이 강조된다. 이 속에서 주인공의 만남과 이별, 고난과 행운, 충과 열에 의한 不事二君, 不更二夫를 지향한다. 이러한 군담계 영웅소설을 중심점으로 하면서 그 외면에 처와 첩간의 갈등과, 계모와 자식 간의 가정문제, 간의 애정문제, 형제간의 우애문제를 주제로 한 애정소설, 가정소설, 윤리소설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애정류는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귀족적 애정류, 서민과 궁녀의 애정류로 분류할 수 있다. 귀족적 애정류는 淑香傳, 淑英娘子傳, 白鶴扇傳, 金振玉傳 등이 있다. 이들은 귀족 출신인 의 연애담을 그린 것이다. 연애담의 전개는 의 결연, 이별, 재회 등으로 진행되며, 열열한 애정을 그리고 있으나 대부분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傳奇性을 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민적 애정류는 남주인공은 귀족출신이고, 여주인공은 기녀임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을 그린 작품이 중심이 되고 있다. 귀족들의 애정생활의 결핍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사회적 관습은 귀족의 자제와 女妓와의 애정을 소재로 하여 玉丹春傳, 靑年悔心曲, 芙蓉相思曲 등을 창작해 내었다. 이들 유형은 공간적 배경을 국내에 두고 있으며, 원래는 양반계급이었으나 불우한 여건으로 妓女가 된 여인들의 결연담을 기본구성으로 하고 있다.

가정소설은 가정 비극을 다루고 있다. 계모형 가정소설로는 薔花紅蓮傳, 콩쥐팥쥐전, 金仁香傳, 황월선전, 양풍운전, 김취경전, 김전전, 정을선전, 어룡전 등이 있고 爭寵型 가정소설로는 謝氏南征記, 소씨전, 소현성록, 일락정기, 월영낭자전, 정진사전, 화산기봉, 옥난빙 등이 있다.

셋째 단계는 고소설의 결실기에 해당되는 영조대 이후의 소설들로서 형태적으로 세련된 한문, 국문의 단편소설과, 대장편인 大河小說이 창작되는 시기다. 이와 함께 판소리의 성행의 여파로 판소리계 소설이 출현하여 창작계 소설과 새로운 각축을 벌리며 공존하는 시기다. 이 시기의 대표적 유명작가로는 실학자 朴趾源과 판소리의 개작자인 申在孝가 있다. 이 시기는 특히 영조, 정조, 순조代를 거치면서 서민문예가 본격적 성숙기를 맞이하던 때다. 이 시기에는 독자의 수요에 응할 수 있는 판각본 소설이 나와 소설의 대량보급을 가능케 하였고, 출판문화의 발전에 힘입고 독자의 수요를 위한 공급 상인으로서 세책점이 나오고, 전문적 이야기꾼인 傳奇臾의 출현으로 소설의 창작과 수용에 가장 확고한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다.

朴趾源의 단편소설은 실학파의 대가로서의 자신의 개혁의식과 사회비판독특한 수사기법으로 형상하여 단편소설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許生傳」은 於于野談에 나오는 李之涵의 사적을 바탕으로 참신한 경제관념을 제시하며, 허식적 양반의 예고주의를 공격하였다. 虎叱에서는 북곽선생과 동리자를 통하여 유학자와 貞婦의 이중적 행위의 문제점을 척결했다. 烈女咸陽朴氏傳에서는 改嫁禁止의 비정한 사회제도를 주인공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통하여 제시했다. 또 穢德先生傳에서는 왕십리의 똥장수를, 廣文者傳에서는 걸인을 내세워 서민의 우직과 진실이 지닌 생활의 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했다. 閔翁傳과 虞裳傳에서는 무관의 불우함과 서류에 대한 사회의 부조리를 과감하게 대변하고 있다. 또, 虎叱, 兩班傳, 許生傳 등은 강한 풍자성을 지니고 있는 소설이다. 虎叱은 도학자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北郭先生과 열부로 이름난 동리자를 중심으로, 양반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을 과감히 풍자하고 있다. 許生傳은 가난한 선비 許生의 행각을 소재로 해외무역을 장려하는 경제적 구상을 제시하고, 무인도에서 班常과 빈부의 차이가 없는 이상국을 건설하여, 사회모순의 개혁을 통한, 관념적 정치, 사회, 경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또 兩班傳에서는 정선의 무력한 양반과 재물을 축적한 천한 백성사이의 양반신분의 매매를 소재로, 비생산적 양반계층과 농공상인의 경제적 성장에 따른 사회계층의 모순을 풍자하고 있다. 閔翁傳에서는 조정의 인재등용에 대한 맹점을 지적하며, 양반을 곡식을 해치는 벌레에 비유하는 등 無爲徒食의 생활상을 풍자했다. 虞裳傳은 동역관 우상의 일본에 있어서의 외유를 통하여, 문호가 좁은 당시대를 비판하였다. 穢德先生傳은 분뇨를 퍼나르는 것을 직업으로 고 있는 천한 노인을 주인공으로 아, 賤業에 종사하는 근면한 사람의 생활상을 제시함으로써, 無爲徒食하는 양반관료를 풍자하였다.

한문단편과 달리, 야담계 국문단편이 출현한 것이 이 시기의 한 특징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京板本 소설집으로 알려진 三說記는, 본격적인 단편소설집으로 소설문학사상 독특한 지위를 지닌 작품이다. 이 단편집 속에는 당시대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행복관을 제시한 三士橫入黃泉記, 관원의 위선적 행위를 여지없이 파헤치는 초포수의 서민적 재치를 다룬 警世의 작품인 五虎大將記, 선비와 항우와의 만남에서 기개 있는 선비의 정신적 승리를 강조한 西楚覇王記, 신선관 위에 진행되는 세 서당 동기들의 뒷날 이야기를 다룬 三子遠從記가 있다. 또, 목사의 세 자식이 지닌 인간성을 기생과의 이별을 통하여 형상한 黃州牧使戒子記, 노처녀의 좌절과 꿈속의 성공담을 통한 재기를 다룬 老處女歌, 재판관의 타락상을 풍자한 황새決訟, 두꺼비의 나이자랑 설화를 다룬 老蟾上坐記, 鹿處士宴會의 9편으로 엮어진 작품집이다.

이들 작품은 유우머와 윗트를 통해 삶의 참다운 지혜를 보여주는 단편의 기교를 최대한 드러내는 풍자문학의 수준을 보여준다.

숙종대 이후에는 서민의 문학으로서 판소리가 생성되었다. 판소리는 천민인 광대에 의하여, 근원설화를 기초로 하여 한 편의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춘 이야기가 노래로 불리워짐으로써, 새로운 대중예술의 길을 여는데 기여하였다. 판소리의 국민적 공감은 판소리의 문학적 내용인 판소리 사설을 바탕으로 한 판소리계 소설의 출현을 보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롯된 판소리계 소설은 春香傳, 沈淸傳, 興夫傳, 赤壁歌, 裵裨將傳 등을 주축으로 다수의 독자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판소리계 소설을 발전시키는데 간접적 기여를 한 판소리 이론가로 申在孝를 들 수 있다. 그는 판소리 전성기의 인물로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여섯 작품을 손수 改作하였다. 그는 판소리의 사설을 근대적 합리주의로 재편성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다. 그 결과 새로운 의식의 판소리의 흐름을 주도하여, 그의 토별가는 완판본 소설이 되어 많은 독자에게 제공되었고, 변강쇠타령의 사설은 현전하는 유일한 대본이 되고 있다. 이러한 申在孝의 문학사상은 朴趾源의 문학사상과 궤적을 같이하며, 비록 한글소설의 작가는 아닐지라도 이 시기의 소설사에 우뚝 솟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재효(조선 판소리 이론가·개작가)  [申在孝, 동리]브리태니커

1812(순조 12) 전북 고창~1884(고종 21).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그의 가계(家系)는 본래 경기도 고양(高陽)이었으나, 서울에서 경주인(京主人)을 지내던 아버지 광흡(光洽)이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경영하면서부터 고창에 살게 되었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철종 때 고창현감이던 이익상(李益相) 밑에서 이방으로 일하다가 호장(戶長)에 올랐다. 1,000석을 추수할 정도의 부호였던 그는 1876년(고종 13년) 흉년에 구휼미를 내어 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 품계를 받았다.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고창지방 관청에서 열렸던 잔치에 판소리 광대를 포함한 각종 연예인들을 동원했던 경험과 자신의 넉넉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판소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판소리 광대들의 후원 및 이론적 지도자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동편제(東便制)의 명창 김세종(金世宗)이 소리 선생으로 초빙되어 판소리 전문교육을 도왔다. 이날치(李捺致)·박만순(朴萬順)·전해종(全海宗)·정창업(丁昌業)·김창록(金昌祿) 같은 명창들이 그의 지원과 이론적 지도를 받았다. 그밖에 진채선(陣彩仙)·허금파(許錦波)와 같은 최초의 여류 명창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는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동편제와, 잔가락이 많고 박자의 변화가 많은 서편제(西便制)에서 각기 장점을 취해 판소리 이론을 정립했다. 〈광대가 廣大歌〉에서 판소리 사설과 창곡, 창자의 인물됨과 연기능력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판소리 4대법례를 제시했다. 만년에는 향리직에서 물러나 판소리 12마당 가운데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6마당을 골라 그 사설을 개작, 정착시켰다. 이같은 작업은 당시 광대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작품들을 일단 정리하고 후대에의 전승을 매개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조선 후기 상하층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며 판소리 사설을 합리적·사실적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당대 하층민이 이룩한 발랄한 현실인식이 보수적 지향이 강한 유가적(儒家的) 합리주의에 의해 상당 부분 거세되었다는 한계를 함께 지닌다. 판소리 개작 외에도 〈치산가 治産歌〉·〈오섬가 烏蟾歌〉·〈방아타령〉·〈갈처사 십보가 葛處士十步歌〉 등을 비롯해 허두가(虛頭歌) 30여 편을 지었다. 이들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오위장본 申五衛將本〉에 개작한 판소리 6마당과 함께 실려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하거리(下巨里)에 그를 기리는 유애비(遺碑)가 남아 있으며, 묘소는 고창읍 성두리(星斗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