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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 ‘입과 손’ 일치해야 진짜 학문

수로보니게 여인 2008. 10. 30. 19:28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입과 손’ 일치해야 진짜 학문


조식과 이황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지른 진시황 같은 폭군에게는 학문이라는 게 삐딱한 선비들이 퍼뜨린 바이러스였을 터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빼고는 학문을 천시하던 사회는 별로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런저런 학습을 하고 지식을 얻는다. 그런데 무언가 더 고상한 목적을 위해서 하는 공부도 있다. 이를 학문이라고 하며, 학문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보통 학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학문은 왜 하는 것일까?

  공자는 '고지학자위기(古之學者爲己), 금지학자위인(今之學者爲人)'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했으나, 요새는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 공부한다는 것이다. 2천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도 어울리는 지적이다. 공자에 따르면 학문이란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사람의 가장 본질적 성향인 인(仁)을 살려내는 것이다. 이를 줄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한다. 서양철학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양론'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학문을 하는 목적을 두고 수많은 논쟁을 벌였다. 기실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입신과 출세를 위해 공부했을 터지만, 그들이 벌인 논쟁 속에서는 학문의 사회적인 목적과 의미를 밝히려 했다. 하지만 결론은 늘 뻔했다. '학문의 목적은 수양을 통해 도덕적으로 어진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그 대표적인 학자가 조선의 관학을 정립한 퇴계 이황이다.
공자의 충실한 후계자로서 퇴계는 수양을 강조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치중하면서 제자들에게 숙독(熟讀)과 정교한 이론을 강조했다.  

   그런데 모든 선비들이 학문의 목적을 단순한 도덕적 행위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이 그랬다. 남명은 퇴계 이황과 동시대에 나고 자란 동갑내기 선비였지만 퇴계와는 다른 학문관을 가지고 있었고, 삶의 방식 또한 달랐다. 남명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뛰어난 학문을 성취했음에도 대과를 치르지 않았다. 일찍이 숙부와 아버지를 모두 사화(士禍)때 잃은 기억 때문이었다. 결국 남명은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진주 덕산의 '산천재'에 은거하면서 평생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남명은 문장에 매달리기 보다는 스스로 문장의 의미를 깨닫도록 했고, 배운 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토록 종용했다. 그래서 당시 천하게 여기던 병법을 제자들에게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학문이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이었다. 이미 선인들이 다 써 놓은 책에만 몰두해 이러쿵저러쿵 말만 하는 것은, 시장 바닥에서 온종일 물건 흥정만 하고 정작 필요한 물건은 하나도 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의 말은 왠지 퇴계 이황을 겨냥한 듯했다. 실제로 남명은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어 시비를 걸었다.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직접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간단한 실천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도리어 남에게서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장로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때마침 방문 중인 제자 유성룡에게 소회를 털어놓는다.

  "남명은 유학의 큰 길로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초야에 묻힌 것을 핑계 삼아 노자나 장자 쪽으로 기운 듯하네. 선비들의 진지한 논쟁을 한낱 고담준론이나 공리공론이니 하면서 폄하하고 있어."                          ▲ 남명 조식 선생 초상 /조선일보 DB



  퇴계에 따르면, 학문을 연구해 이론을 세우는 것은 결코 공리공담이 아니었다. 선비들이 사화에 희생된 것도 결국은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가 자기 수양에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퇴계의 학문관과 실제 행동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 그는 입으로는 개인의 수양을 중시하면서도 평생 학문과 벼슬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오죽하면 당시 영의정 이준경은 "이황은 마치 산새와도 같아서 붙들어 길들이기 정녕 어렵다."고 했다. 후세에 그의 학파에 속하는 이익의 말에 따르면 '퇴계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는 난세요, 벼슬을 받아 한양으로 올라갈 때는 태평성대'라는 말도 나돌았다고 한다.


  한편, 학문의 목적은 사회적으로 실천이라는 신념과 정신을 강조한 남명 조식 또한 학문관과 실제 삶이 어긋났다. 남명은, 책은 이미 옛 사람들이 써 놓았으니 뒷사람들은 그 정신을 실천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은 조정의 부름을 완강히 거절하며 평생 초야에 묻혀 지냈다. 다만 그의 실천적 학문관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출전한 곽재우, 정인홍 등 오십여 명의 제자들에 의해 비극적으로 검증됐다. 또한 그 정신은 조선말 농민항쟁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입력 : 2008.10.29 16:11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 박남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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