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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내를 향한 강세황의 통곡

수로보니게 여인 2008. 6. 25. 23:47

죽은 아내를 향한 강세황의 통곡

표암 산문집 완역 “정선은 진경과는 거리 멀어”

연합뉴스 

 

조선 영ㆍ정조 시대에 활약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2-1791)은 그의 당대에 이미 시ㆍ서ㆍ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나다 해서 삼절(三節)로 일컬어졌다.

명문가 자손이지만 그의 삶은 굴곡이 많았다. 아버지가 64세에 낳은 막내라 해서 부모에게 유별난 사랑을 받았으나 얼마 뒤 양친이 모두 세상을 뜨는 바람에 한동안 곤궁한 삶을 살다가 60대에 들어서야 영화를 맛보았다.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하지만 ’기구유생과’라 해서 노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1등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나중에는 호조참판까지 지냈다. 또 72세 때는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뒤늦은 영달을 그의 아내 진주유 씨는 함께 하지 못했다. 15살에 강세황과 결혼한 유씨는 30년을 살다가 병자년(1756)에 돌림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내를 위한 제문에서 강세황은 통절한 사부곡(思婦曲)을 쓴다.

“그렇다면 그대의 가난도 나 때문이요 그대가 병든 것도 나 때문이며 그대가 죽은 것도 나 때문이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으며 내가 무슨 면목으로 구천에서 당신을 볼 수 있겠소.”

아내가 떠난 지 24년이 지난 기해년(1779). 이 무렵 이미 강세황은 가선대부에 제수되고 그의 아내 또한 정부인이란 칭호가 내려진다. 이 때 아내의 묘를 제사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긴 글을 다시 쓴다.

“정부인에 추증하는 교지를 내린들 아! 무슨 소용있으리오…이제야 비로소 하지 못하던 예(禮)를 거행하며 교지를 태워 올리고 한 잔 술 부으나 당신이 구천에서 살아나긴 어렵겠지요. 묵은 풀 앞 새 무덤에는 우리 작은 아들을 묻었소. 황천이 지척이니 신령끼리 혹 의지하겠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어찌 감당하리오.”

이 무렵 자서전을 미리 써 놓는 전통이 있었다. 강세황 또한 54세가 된 영조 42년 병술년(1766) 가을에 옹자지(翁自誌)라는 제목으로 자기 행장은 쓴다.

“어려서 등에 있는 흰 얼룩무늬가 표범과 비슷하여 (표암 豹菴 이라) 호를 삼았으나 장난삼아 해 본 것”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생계에 관한 일은 전혀 묻지를 않고 오직 문사와 붓과 벼루를 가지고 스스로 즐겼으며 또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해 때로 붓을 놀리면 질펀하고 우아하여 속된 글을 벗어나곤 했다”고 썼다. 또 “서법에서는 왕희지와 왕헌지를 본받고 미불과 조맹부의 서법을 섞어 자못 깊은 묘미를 이루기도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 행장에서 표암은 나아가 “옹(翁)이 일찍이 자화상을 그렸는데 다만 그 정신에 치중하여 그린 까닭에 세속의 재주 있는 무리가 그린 초상화와는 아주 다르다”고 하면서 이런 그가 행장을 미리 쓰는 까닭은 “내가 죽어 남에게 묘지와 행장을 구하게 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평소의 대략을 적어 놓으면 거의 사실과 비슷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강세황이라는 이름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라 해서 더욱 빛나기도 한다. 실제 표암이 남긴 글에는 김홍도를 극찬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단원기(壇園記)라는 글을 써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김홍도 군은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전공하여 못하는 것이 없다. 인물ㆍ산수ㆍ선불(仙佛)ㆍ화과(花果)ㆍ금충(禽蟲)ㆍ어해(魚蟹)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옛 사람과 견주어도 맞설 사람이 거의 없다.…우리나라 인물이나 풍속을 그리는 데는 더욱 능하니 예컨대 선비가 공부하는 모습ㆍ상인이 시장에 나서는 모습이나 나그네ㆍ규방여인ㆍ농부ㆍ누에치는 여자ㆍ장군ㆍ이층집ㆍ황량한 산ㆍ들판의 물에 이르기까지 모습을 곡진하게 그려 그 모양이 실물과 차이가 없으니 이는 옛날에는 일찍이 없던 일이다.”

요즘 미술사학계에서 유행하는 개념을 빌린다면 강세황에게 김홍도야말로 ’진경산수화’의 진정한 체현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표암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겸재 정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금강산을 유람하고 난 뒤에 표암이 쓴 글 한 대목이다.

“근래 정선(鄭敾)과 심사정(沈師正)이 그림 잘 그린다고 이름이 났다. 각자 그린 것을 보면 정선은 평소 익숙한 필법으로 자유롭게 휘둘러 돌 모양이나 봉우리 형상까지도 한결같이 ’열마준법’으로 어지럽게 그리니 진경을 묘사하는 데는 논하기에 부족한 듯한 반면, 심사정은 정선보다 조금 뛰어나지만 그 역시 고아하고 넓은 시야가 없다.”

표암이 보기에는 정선의 그림은 진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출신 소장파 한문학자들인 박동욱 박사와 서신혜 박사가 ’표암 강세황 산문전집’(소명출판)을 최근 완역해 냈다. ’표암유고’를 저본으로 삼으면서 강한신 소장 ’표암집’과 원문을 대조해 판본별 차이점을 지적했으며, 풍부한 설명을 달았다.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기에 그의 문집 번역은 적어도 몇 종은 이미 있으리라 생각하기 쉬우나, 놀랍게도 이번이 처음이라 한다. 표암의 시집 또한 완역본을 기대해 본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입력 : 2008.06.25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