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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괸 눈으로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수로보니게 여인 2008. 6. 3. 15:32

 

"눈물 괸 눈으로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고통 끝에 다시 만난 그림…
첫 한국 개인전 여는 척 클로스 전신 마비된 뒤 재활치료…
조금씩 사지 움직이기 시작해 손가락에 붓 묶고 이젤 앞에 앉아


척 클로스(Close·68)는 거대한 화면을 모눈종이처럼 나눈 다음, 한 칸에 하나씩 알록달록한 도넛을 그려 넣는다. 코앞에서 힐끗 보면 이 그림은 도넛 무늬가 나열된 조각보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는 순간 관객은 전율한다. 화면을 꽉 채운 도넛 더미가 불현듯 사람의 얼굴로 변하기 때문이다.

오는 19일
서울 성곡미술관에서 개막하는 《위대한 모험, 척 클로스 전》은 한국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이다. 현대미술 팬들에겐 클로스의 판화 140여 점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다.

맨해튼 작업실의 문을 밀자, 전동 휠체어에 앉은 6척 거인이 산타클로스처럼 활짝 웃었다. 오후의 햇볕이 그의 둥근 이마에 스며들었다. 클로스는 명랑하게 "우선 한 잔 하자"고 했다. 조수가 찬장을 열었다. 앞줄만 세서 스카치위스키 29병, 포도주 9병이 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조수가 얼음 넣은 유리잔에 위스키를 찰랑찰랑 따랐다. 클로스는 "지적(知的) 전통이 전혀 다른 아시아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대단히 궁금하고 흥분된다"며 건배를 했다.

"어려서부터 마술을 좋아했어요. 마술사가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장면에 흥분했지요. 내 그림도 마술이에요. 네모나게 구획된 추상적인 화면에서 사실적인 이미지가 튀어나오죠."

▲ 뉴욕 맨해튼 작업실에서 척 클로스는“나는 옛날 사람이라 바깥세상에 어떤 바람이 불건 내 세계를 추구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작가는 화려하게 떴다가 ‘한 물 갔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잊혀졌다가 재조명 받기도 합니다. 유행은 가고 또 오게 마련이죠.”

  클로스는 위스콘신주(州) 먼로에서 가난한 기계공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갖고 싶냐"고 묻자 어린 클로스는 망설임 없이 "이젤!"이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못쓰는 널빤지 조각을 모아 이젤을 만들어줬다.

"아주 어려서부터, 내겐 '그림이 내 인생'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림 말고 달리 잘하는 것도 없었고요. 난독증을 앓았거든요."

       난독증은 그가 인생에서 맞닥뜨린 여러 장애 중 하나에 불과하다.

       클로스는 10대에 안면인식장애 진단을 받았다. '맥락' 없이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증상이다.

       미술관장을 미술관에서 만나면 금세 알아보지만,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만나면 못 알아보는 식이다.

   부모는 가난했지만 교육열이 강했다. 그는
난독증과 안면인식장애를 정면돌파했다.

  예일대 합격에 대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농담 삼아  "예일대(Yale)에 가거나 감옥(jail)에 가거나 둘 중 하나라는 각오로 살았다"

  고 한 적이 있다. 그는 안면인식장애를 앓으면서, 한평생 인간의 얼굴만 그리는 외길을 걸었다.

  그는 친구와 가족의 얼굴을 사진 찍은 뒤 짧게는 4~5개월, 길게는 2년씩 화폭에 옮겼다.

     "어찌 보면 나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내 기억에 새겨두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지요."

   그 뒤에 찾아온 시련에 비하면 안면인식장애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화가로서 기량과 명성이 절정에 달한 1988년,

 클로스는 척추 장애로 목 아래가 마비됐다. 전신이 마비된 뒤 길고 고통스런 재활치료 끝에 조금씩 사지를 꿈틀거릴 수 있게 됐

 을 때, 클로스는 손가락에 붓을 묶고 이젤 앞에 앉았다. 그렇게 그린 친구 알렉스 카츠의 초상화로 그는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에서 격찬을 받았다. 클로스의 신조는 "시련이 닥치면 더 강해져서 컴백한다(come back stronger)"는 것이다.

 그는 "인생은 카드놀이 같은 것"이라고 했다.

         "게임은 좋은 패를 잡았다고 이기고, 나쁜 패를 잡았다고 지는 게 아닙니다.

         나쁜 패를 쥐어도 꾀를 써서 최악의 참패를 모면하거나 게임을 반전시킬 수 있지요.

         반대로 좋은 패를 쥐었다고 희희낙락하다가 상대가 지레 게임을 포기해서 큰 돈을 못 따는 경우도 있고요.

         요컨대 인생은 '어떤 패를 잡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승부했냐'의 문제입니다.

         " 클로스는 덤덤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그린다.

         그러나 평론가와 팬들은 "무표정에서 슬픔과 희망이 동시에 스며 나온다"고 숨을 멈춘다.

         클로스는 "전신마비 직후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눈물이 괸 눈으로 휘파람을 불었다"고 했다. "슬펐지요.

         동시에, 그런 엄청난 일을 겪고도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굉장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나는 낙천적인 인간인 모양입니다."     

 

        전시는 19일부터 9월28일까지. (02)737-7650  뉴욕=글·사진 김수혜 기자 goodluc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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