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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는 사람/엄승화

수로보니게 여인 2007. 12. 29. 17:55
 
 
 
 

 

 

송구 정해년(丁亥년)! 근하 무자년(戊子年)!!   

        온다는 사람

                         엄승화   

         

        기약 없지만 기다리고 있어요

        유리접시에 숨긴 과일은

        좀 더 성한 것만 골라 두어요

        그것이 시들어 갈 때

        또 싱싱한 소망을 따 넣어두는

        이 지독한 기다림일랑

        어서 거두어 가요

        그래도 어쩐지 못한 일인 양

        스스로는 접지 못해요

        저물도록 발소리는 문 앞에

        멈추지 않았어요

        라리 좀 더 빨리 어둠에

        갇히면요

        올 수 없노라 냉정한 전갈을

        읽을 수도 있겠어요

        오지 말아요 꽃이 다 피면

        문을 닫고 가만히 버려질 때

        함께 부풀어 가던 과실도

        제힘에 넘쳐 터져요

        튀는 과즙이 생살을

        문질러요

            

         

   저무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사랑 기다리며 촛불 밝힙니다


  또 한해가 저문다. 돌아보면 저무는 한 해는 늘 속절없다. 지나간 적바림 속에는 사람들과의 숱한 약속이 빼곡하게 적혀있지만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지나간 약속은 그렇게 지나간다.

그러나 앞으로의 약속은 늘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려진다. 내게로 온다는 약속, 내가 가겠다는 약속- 그것은 사람에게 약속이 아니라 온다는 것이다.

‘온다는 사람’,나도 당신도 그 온다는 사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약속이 부질없지만 온다고 약속한 사람, 온다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 그 사람을 위해 준비하는 것들도 싱싱하게 살아있게 한다. 엄승화 시인이 ‘기약 없지만 기다리고 있어요/유리접시에 숨긴 과실엔/좀 더 성한 것만 골라 두어요’ 라고 아프게 고백하는 것처럼.

세밑에 한 해를 돌아보면, 나는 참 많은 사람에게 ‘온다는 사람’이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온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爾)에서 광대 ‘공길’과 ‘장생’이 장님놀이를 통해 끝없이 ‘나 여기 있다 너 거기 있다’라고 외치던 것과 같은 확인이었을 뿐 사랑에 눈뜨지 않으면 소통이 되지 않는 약속이었다.

사랑은 소통이다. 가장 감미로운·소통이다. 그 소통을 우리는 연애라고 부른다. 연애시절을 보내야 우리는 사랑으로 가는 문을 찾는다.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랑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든다. 그리고 끊임없이 묻는다. 너 거기 있니? 나 여기 있어!

그래서 사랑은 불편하기도 하다. 기약도 없이 온다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시인이었기에 육당 최남선도 ‘혼자 앉아서’라는 시에서 ‘오마지 않는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열린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고 탄식했다.

우리는 지금 그 열린 듯 닫힌 문을 서로 바라보고 있다. 열린 것 같지만 닫혀있는 문, 닫혀있지만 열려있는 것 같은 문, 그 문밖에 온다는 사람이 서있다. 그렇게 오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사람에게, 엄승화 시인은 ‘차라리 좀 더 빨리 어둠에/갇히면요/올 수 없노라 냉정한 전갈을/읽을 수도 있겠어요’라고 가르쳐준다.

그렇다. 온다는 사람은 오지 않는 사람의 과거완료형이다. 온다는 사람이 오지 않는 것은 지금은 올 수 없다는 냉정한 전갈이다. 그 냉정한 전갈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 그것도 사랑이다.

나도 그런 사랑을 위해 ‘오지 말아요’라고 외치고 싶다. 닫힌 문을 박차고 나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싶다. 한 해가 또 저무는데 온다는 사람은 오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 하고 싶다. 당신이 나를 잊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을 잊고 싶다. 아니, 당신은 벌써 나를 잊었는지 모른다.

아아, 그러나 사랑의 미덕은 기다리는 일이다. 기다리는 일처럼 순백한 사랑의 자세가 없기 때문이다. 기다리지 않고 어떻게 사랑을 맞이하겠는가. 오랜 기다림의 끝에 닫힌 문을 열고 오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한다면 기다려야 한다.

지나간 시간의 적바림이 아니라 오는 날의 적바림에 온다는 사람의 그 약속을 현재진행형으로 남기자. 온다는 사람은 반드시 온다는 약속 앞에 겸허히 기도하자. 저무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촛불을 밝히며 기도하자.

온다는 사람의 약속보다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이 더욱 숭고하다. 당신이 지금도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젊은 연애가 아니라 기다릴 줄 아는 여여(如如)한 당신의 사랑은 오래지 않아 꽃망울을 터뜨릴, 그윽한 향기를 머금은 겨울 매화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꽃도 피는 법이다. 그 꽃을 기다리며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며, 나에게 온다는 사람에게도, 온다는 사람으로 나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도 인사 전한다.


  

                                    

                                 2007년 12월 29일 조선일보: 정일근의 연애시 추억  

 

    ** 적-바림
〔-빠-〕 [명사][하다형 타동사][되다형 자동사] 뒤에 들추어보기 위하여 간단히 적어 두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