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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타자기 발명가 공병우

수로보니게 여인 2012. 12. 20. 17:36

 

 
공병우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타자기와 한글 문명의 만남에 대해 먼저 알아볼까요? 영문 타자기를 비롯한 로마자 타자기는 서구 사회를 경험한 바 있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놀라움과 자괴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서양인이 타자기를 이용해 빠르면서도 정갈하게 문서를 작성하는 데 놀랐고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우리의 상황에 절망했던 것이지요. 타자기가 문명화를 상징하던 시대였지만 당시 조선에는 한글 타자기를 만들 만한 기술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글 타자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글쓰기 환경도 조성되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타자기로 글쓰기의 혁신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 문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은 한편으론 글쓰기의 혁신과 문자의 혁신을 주장하였고, 한편으론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글 타자기에 대한 요구는 근대 초부터 있었지만, 한글 타자기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34년부터였습니다. 1934년은 송기주宋基柱,1900~?가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여 상품화를 시작한 때이지요. 이미 1914년에 이원익李元翼이 한글 타자기를 만든 바 있지만, 송기주의 타자기가 특별히 관심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영문 타자기에 한글 활자를 붙여 개량한 것이 아니라 한글만을 위한 타자기를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에 나온 이광수의 논설은 송기주의 한글 타자기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송 씨가 발명한 것은 단지 마흔두 개의 키를 가지고 어떠한 조선글이든지 어떠한 철자법이든지 다 찍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영문이나 독일문 타자기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진실로 조선글을 위하여서는 획기적인 큰 발명이다. 만일 조선 사람들이 한문자를 버리고 조선글만을 쓴다 하면 이 타자기와 또 이 시스템을 기초로 한 인쇄술로 하여 조선 문화의 발달에 큰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중략 문필에 종사하는 이로서 아직 원고를 손으로 쓰는 것은 아마 동양 사람들뿐일 것이어니와 이제 조선글은 송 씨의 타자기로 하야 이 원시 상태를 벗어나게 되었다.
長白山人, 一事一言: 송기주 씨의 한글 타자기, <조선일보> 1934. 3. 2.
 
송기주의 타자기는 이처럼 세인의 관심을 끌어모았지만 워낙 비싸서 개인이 이를 구입해 활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우리글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지는 상황이어서 한글 타자기의 실용화는 더욱 어려웠지요. 결국 한글 타자기의 실용화는 해방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말글을 교육하는 일이 전 사회적인 과제가 되면서, 한글 타자기를 실용화하는 문제도 부각되었습니다. 한글 전용이라는 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한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타자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즉 세로쓰기 관습을 기반으로 개발된 송기주 타자기와는 다른 타자기가 필요했고, 영문 타자기의 속도를 능가할 만한 타자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분위기에서 '조선 발명 장려회'는 1949년 3월 한글 타자기를 현상 공모하였고, 이 현상 공모전을 통해 안과 의사 공병우가 한글 기계화 사업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공병우는 이미 1948년 2월 세벌식의 쌍초점 타자기로 특허를 출원한 상태였는데, 이 공모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여기에서 '쌍초점'이란 활자대를 인도하는 가이드에 홈을 하나 더 파서 두 개의 홈을 갖도록 만든 것을 말합니다. 초성이 오른쪽 가이드를 따라 찍히고 나면 둥글대가 한 칸 왼쪽으로 움직이고 난 자리에 중성과 종성이 왼쪽 가이드를 따라가서 찍히는 원리이지요. 이때 오른손이 치는 초성은 움직글쇠움직이는 글쇠로, 왼손이 치는 중성과 종성은 안움직글쇠움직이는 않는 글쇠로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작동 방식의 공병우 타자기는 가로 모아쓰기를 실용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타자기로 인정을 받습니다. 송기주 타자기와 비교해 그 장점을 알아볼까요?
 
송기주 타자기가 가로로 찍어 세로로 읽도록 설계되었던 반면 공병우 타자기는 가로로 찍고 가로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타자수가 글씨를 확인하면서 타자를 칠 수 있었던 거지요. 또한, 네벌식이었던 송기주 타자기는 글자를 찍을 때마다 해당 음절 글자가 받침이 있는지 없는지 또는 모음이 가로 모음인지 세로 모음인지 등을 생각하고 글쇠를 눌러야 했지만, 세벌식이었던 공병우 타자기는 타자수가 이런 판단을 할 필요 없이 기계적으로 타자를 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당연히 타자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졌지요. 모아쓰기를 해야 하는 한글 타자기는 영문 타자기에 비해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편견을 깼던 것입니다. 이는 한글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지요.

나는 해방 이후 한글을 공부하다가 우리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대왕의 업적에 깊이 느낀 바 있어 우리 한글이 현대 문명 과학의 기계화에 있어서도 또한 우수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우선 우리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타자기의 고안에 전력을 기울이어 본 결과 영문의 자모보다도 우리 한글의 자모가 타자기와 같은 문명 이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 더욱 간편한 우수성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게 되었다.
내가 고안한 쌍촛점 한글 타자기, <한글> 107호, 1949.

이처럼 속도의 한계를 깬 공병우 타자기는 한글의 우수성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한글 전용과 한글 가로쓰기라는 당시 국어 정책의 과제를 실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빠른 속도는 수요자의 요구를 충족시켰고 타자기의 수요가 늘면서 한글 전용과 한글 가로쓰기도 힘을 얻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장점이 아무리 많아도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법. 공병우 타자기는 한글의 조형미를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합니다. 받침이 있건 없건 짧은 모음 한 가지로 두루 쓰면서 글자들이 고르게 나오지 않은 점이 가장 비판을 받았지요.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공병우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국내의 모든 인사는 종래의 한글 활자의 체재에 대한 미적 관습상 글자의 높낮이, 동일한 실체로 찍을 수 있는 타자기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국내의 여러 연구자들은 한 갈래의 자모를 두벌, 세벌 만들어 가지고 복잡하고 비능률적인 타자기를 고안하고 있다. 나는 글자 체계에 대한 과학적 실용적 가치를 중시하고 종래의 근거 없는 다만 습관상의 미적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비과학적 자체를 찍는 비능률적인 타자기를 고안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과학적으로 조금도 모순이 없고, 실질적인 실체, 그 자신이 실용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반인에게 알려 주고 싶다. 중략 우리 한글의 자체도 과학적으로 검토하게 되어야만 실용적이고, 진실한 미를 나타내는 한글의 자체가 확립될 것이다. 과학의 근거는 변함이 없지만, 미에 대한 관념은 유행과 습관에 따라서 변하기 쉽다.
내가 고안한 쌍촛점 한글 타자기, <한글> 107호, 1949.

위의 글은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공병우의 생각을 잘 보여 줍니다. 그리고 전쟁과 건설의 시대는 곧 실용주의자 공병우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한글의 조형미보다도 한글의 기능성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던 공병우의 생각이 당시의 시대정신과 일치했던 것이지요. 특히 로마자 타자기의 속도를 따라잡을 만큼 기능성이 뛰어났던 공병우 타자기는 타자기의 가장 큰 수요자였던 정부, 군, 기업 등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들 수요 집단은 모두 속도와 능률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공병우 타자기는 불과 4~5년 만에 표준 한글 타자기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면서 한글 타자기에도 글자의 조형미를 요구하는 수요자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공병우는 실용성이 곧 진정한 미적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갈한 문서를 쓸 필요가 있었던 수요자들은 다른 유형의 타자기를 찾았고, 타자기 시장은 다변화됩니다. 공병우 타자기의 독점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속도와 효율성의 상징이었던 공병우 타자기는 컴퓨터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한글 타자기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였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큰 안과 병원을 운영했던 의사에서 가장 성공한 타자기 사업가로 변신한 공병우. 그는 왜 본업보다 한글 타자기 개발에 열성을 보이게 된 것일까요? 그의 자서전에는 1938년 조선어학회 간사장이었던 이극로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야 한글의 원리를 본격적으로 탐구했던 것으로 보아, 한글 타자기에 대한 관심은 해방 공간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사회 계몽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공병우는 독립 국가 건설기에 필요한 사회 계몽 운동으로 한글 운동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해방 직후 시력 검사표를 한글로 고쳐 만든 데에서 그의 의식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한글 타자기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의식의 연장 선상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과학적 합리주의와 기술적 실용주의를 신봉했던 공병우였기에, 한글 타자기의 개발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공병우는 한글 타자기의 개발을 통해 한글 기계화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그는 유능한 발명가의 역할을 뛰어넘어 한글 운동의 논리를 공고히 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특히 한글 전용의 논리는 한글 타자기의 기능과 용도에 기반을 두어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당시의 기술적 조건에서 한글의 기계화는 한글 전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니까요. 그는 우리나라의 과학과 기술이 선진국에 비해 뒤떨어진 근본 원인이 문화 발전에 해독이 심한 한자 혼용 때문이라고 확신하였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한글 전용 운동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병우의 논리가 당시의 과학 기술 수준에 기반을 뒀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한글 전용 논리는 공병우의 논리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습니다. 컴퓨터로 상징되는 과학의 발전은 한글 기계화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시대, 우리는 한글 문명의 발전을 위한 정책 논리를 어떻게 세워야 할까요? 아날로그 시대의 정책 논리를 상징하는 공병우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글 타자기의 역사와 기능에 대한 정보는 "김태호, '가장 과학적인 문자'와 근대 기술의 충돌: 초기 기계식 한글 타자기 개발 과정의 문제들 1914~1968, <한국과학사학회지>33-3, 2011"을 참조하였습니다.
 
    글_ 최경봉
최경봉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어휘 의미론, 국어학사, 국어 정책과 관련한 연구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글 민주주의>, <국어 명사의 의미 연구>, <관용어 사전>, <우리말의 탄생>,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우리말의 수수께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