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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에 반영된 허균의 호민론(豪民論

수로보니게 여인 2012. 9. 17. 22:23

- 이백 서른 여섯 번째 이야기
2012년 9월 17일 (월)
『홍길동전』에 반영된 허균의 호민론(豪民論)

  허균(許筠:1569~1618)은 선조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활약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한국사에는 수많은 인물이 역사의 무대를 장식하며 명멸해갔지만 허균처럼 극적인 삶을 산 인물도 흔하지는 않다. 당시의 사회에서 허균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허균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18년 역적혐의를 받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자료는 한결같이 허균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천지 사이의 괴물’로 까지 표현한 기록도 있다.

  합사(合司)하여 아뢰었다.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경운궁(慶運宮)에 격서(檄書)를 던지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역모를 꾸민 정상이 이미 민인길(閔仁佶)의 고발에서 드러났고, 이홍로(李弘老)와 결탁하여 동궁(東宮)을 해치려 꾀한 사실이 또 기준격(奇俊格)의 소에서 나왔습니다. 허균이 진 죄명(罪名)이야말로 오늘날 신자(臣子)된 입장에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것이었는데, 지난 1월에 2품 이상이 정청(庭請)한 일과 근일에 금부가 별도로 아뢴 것 역시 실로 이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신들은 이런 죄인의 이름이 있으니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더라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더라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하략)
[合司啓曰 許筠, 天地間一怪物也。投檄慶運, 萬端逆狀 已發於仁佶之告 締結弘老, 謀害東宮, 又出於俊格之疏。筠之所負罪名, 乃今日臣子所不共戴天者也。初春二品之庭請, 近日禁府之別啓, 實出於此。臣焉而有此罪名, 則轘其身猶不快, 食其肉亦不厭.(하략)]


         ▶ 필자가 답사 때 찍은 강릉초당동에 소재한 허난설헌 및 허균의 생가

  
  『택당집』은 허균 이외에도 16~17세기에 활약한 주요 인물의 행적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인물 평가에 대한 신빙성이 매우 높은 자료이다. 따라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임은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홍길동전』에 나타난 적서차별의 부조리한 사회현실 고발, 초능력을 지닌 영웅의 출현 등은 허균이 지향한 꿈이 구체화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허균은 1569년(선조 2) 당시의 명문 경상도관찰사 허엽(許曄)의 3남 2녀 중의 막내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맏형 허성(許筬)과 중형(仲兄) 허봉(許篈)은 그의 부친과 더불어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으며, 성리학과 문장, 외교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허균에게는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5세 위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있었다. 명문재사(名文才士)의 혈통을 이은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나면서 난설헌과 함께 중형의 벗인 이달(李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달은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조선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시재가 뛰어났지만 서자(庶子)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자신의 높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주인공을 서자로 한 것은 좁게 보면 스승의 불행을 몸소 체득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넓게 보면 당시 조선사회가 안고 있던 사회문제를 과감하게 폭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허균은 당시의 일반적인 학자들과는 달리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서학(천주교)에 두루 관심이 깊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오기도 했는데, 당시 명나라에도 막 천주교가 도입된 시점임을 고려하면 허균의 신학문에 대한 수용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에 두루 능통하면서 학문과 사상에 대해 개방성을 소유했던 학자 허균, 그에게는 주자성리학의 울타리 속에 지식인을 가두어 놓고 체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 조선사회는 너무 좁았다.
  허균은 「유재론(遺才論)」이나 「호민론(豪民論)」과 같은 글을 통하여 평소부터 역사 속에서 민중의 힘을 발견하고 능력있는 인재의 적극적인 등용을 소신껏 주장하였다. 허균의 민중 지향적 사상이 대표적으로 함축된 「호민론」을 보자.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화재․호랑이․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豪民)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 소리 지르면, 저들 원민이란 자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고무래․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秦)나라의 멸망은 진승(陳勝)․오광(吳廣) 때문이었고, 한(漢)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역시 황건적(黃巾賊)이 원인이었다. 당(唐)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고 일어섰는데, 마침내 그것 때문에 백성과 나라가 멸망하고야 말았다. 이런 것은 모두 백성을 괴롭혀서 자기 배만 채우던 죄과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편승할 수 있어서였다. 대저 하늘이 사목(司牧 임금)을 세운 것은 양민(養民)하기 위함이고,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메워도 차지 않는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우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저들 진․한 이래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이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天下之所可畏者。唯民而已。民之可畏。有甚於水火虎豹。在上者方且狎馴而虐使之。抑獨何哉。夫可與樂成而拘於所常見者。循循然奉法役於上者。恒民也。恒民不足畏也。厲取之而剝膚椎髓。竭其廬入地出。以供无窮之求。愁嘆咄嗟。咎其上者。怨民也。怨民不必畏也。潛蹤屠販之中。陰蓄異心。僻倪天地間。幸時之有故。欲售其願者。豪民也。夫豪民者。大可畏也。豪民。伺國之釁。覘事機之可乘。奮臂一呼於壟畝之上。則彼怨民者聞聲而集。不謀而同唱。彼恒民者。亦求其所以生。不得不鋤耰棘矜往從之。以誅无道也。秦之亡也。以勝,廣。而漢氏之亂。亦因黃巾。唐之衰而王仙芝,黃巢乘之。卒以此亡人國而後已。是皆厲民自養之咎。而豪民得以乘其隙也。夫天之立司牧。爲養民也。非欲使一人恣睢於上。以逞溪壑之慾矣。彼秦漢以下之禍。宜矣。非不幸也.]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에 두려워 할 바는 백성뿐이다’라고 전제한 후에 백성을 호민과 원민, 항민으로 나누었다. 여기에서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하며, 원민은 ‘정치가로부터 피해를 입고 원망만 하지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으로 지금의 개념으로는 나약한 지식인을 뜻한다. 이와는 달리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대의 사명을 인식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물이다.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들이 합세하여 무도한 무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허균의 「호민론」은 ‘국왕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의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강조하여 백성의 위대한 힘을 자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허균의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특히나 소설에서 설정한 주인공 홍길동의 캐릭터는 호민의 그것과 너무나 유사하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가정에서의 신분적 제약과 사회에 등용되지 못하는 사회적 모순에 부닥쳤지만 이를 극복해 나가는 호민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허균이 살았던 당시 조선사회는 밖으로는 임진왜란으로 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고, 안으로는 당쟁이 격화되어가는 시점이었다. 허균은 「유재론」이나 「호민론」과 같은 글을 통하여 신분이나 배경보다는 능력 있는 인재의 등용을 줄곧 주장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 의지는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의 창작으로 나타났다. 역모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 『홍길동전』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지식인의 책무를 허균 스스로가 실천했기 때문은 아닐까?

 
신병주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