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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친구 김시습(金時習)을 보내며

수로보니게 여인 2012. 8. 25. 14:52

- 이백 서른 두 번째 이야기
2012년 8월 20일 (월)
술친구 김시습(金時習)을 보내며
  세상 공간이 갈수록 좁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조금만 옆으로 움직여도 남과 부딪칠까 조심하는 표정들이다. 헐렁한 옷을 걸치고 그 옷만큼이나 엉성한 모습으로 넓은 세상을 한 눈에 쓸어 담았던 옛 선비들의 큰 인품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등 조선전기의 방외인(方外人)들은 노장풍(老莊風)의 멋을 풍기며 저자거리의 술집을 거침없이 누비고 다녔다. 홍유손(洪裕孫)은 제문에서 유(儒)ㆍ불(佛), 승(僧)ㆍ속(俗)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던 김시습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술친구를 마지막 보내는 절통한 심정을 잘 표현하였다. 그는 김시습이 거짓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싫어서 저 하늘나라로 훨훨 날아가서, 절친한 벗 남효온과 함께 이 혼탁한 세상을 굽어보며 손뼉을 치면서 껄껄 웃을 것이라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인편에 전해 듣고 모두들 크게 놀라고 슬퍼 콧등이 시큰하고 눈물이 흐르려 했으니, 슬픈 심정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달려가 곡하려 해도, 가는 길이 너무도 멀기에 이렇게 제문을 보내어 멀리서 조문을 드리며 평생의 감회를 말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 공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지 겨우 다섯 살에 이름이 크게 알려졌으니, 삼각산(三角山) 운운한 절구 한 수를 짓자 노사(老師) 숙유(宿儒)들이 탄복하였고 온 세상이 놀라 떠들썩하였으며, 이에 사람들은 “중니(仲尼)가 다시 태어났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은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머리를 깎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여, 공맹(孔孟)의 밝은 도에 통하는 한편 천축(天竺)의 현묘한 학설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무(空無)의 가르침에서 물아(物我)를 모두 잊고 일월(日月)과 같은 성인과 성정(性情)이 같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이에 문하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과(因果)와 화복(禍福)의 설을 물었으나, 공은 이윽고 그 설이 허탄함을 싫어하고 술에 의탁하여 화광동진(和光同塵)하였습니다. 이에 모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들 했지만, 그 내면에 온축된 참된 세계에 탄복하였으니, 많은 벼슬아치들이 공과 어깨를 나란히 벗하여 격식을 따지지 않고 흉허물 없이 지냈으나 공은 오연히 세상 사람들을 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의 인물은 공의 안중에 드는 이가 없었으니, 마치 구름이 걷힌 하늘처럼 아무도 인정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명산대천들이 공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기암괴석과 빼어난 하천(河川)들이 공의 품평에 의해 그 이름이 더욱 알려지곤 했습니다.
  만년에는 추강(秋江)과 서로 뜻이 맞아 지극한 이치를 유감없이 담론하였으며, 그리하여 함께 월호(月湖)에서 소요하였는데 헤어지고 만남이 언제나 약속한 듯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추강이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공은 그만 둘도 없는 지기(知己)를 잃고 말았습니다. 슬프다! 오늘 공이 시해(尸解)1)하심은 어찌 황천(黃泉)으로 추강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건대, 구천(九天)에서 두 분이 어울려 맘껏 시를 창수(唱酬)하고 너울너울 춤도 추면서, 필시 이 티끌세상을 굽어보고 손뼉을 치며 껄껄 웃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평소 저자 거리에서 공과 함께 술을 마시던 술꾼들이 다들 곡하며 몹시 슬퍼하고 있습니다. 아! 다시는 공과 만나지 못하다니, 길이 유명(幽明)을 달리하시고 말았습니다.
  생각하면, 공의 말씀은 그저 심상하여 전혀 색은행괴(索隱行怪)2)를 하지 않았으니, 비록 내면의 온축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들 평소의 깊은 수양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공은 비록 세상에 숨어 살았어도 그 마음은 실로 오묘했나니, 공을 알기로는 우리만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아아! 공이 이렇게 멀리 떠나신 것은 어쩌면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 사람들을 미워해서가 아닐는지요. 그러나 죽음이 오히려 삶보다 나으니, 만세(萬世)의 오랜 세월도 찰나에 불과합니다. 공이야 세상을 떠나고 세상에 머무는 데 조금인들 연연하겠습니까. 마치 남과 밤과 낮이 바뀌는 것처럼 삶과 죽음을 인식하여 조용히 받아들이실 뿐입니다.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공의 본모습을 뉘라서 보리요. 몽롱한 육안(肉眼)을 비웃을 뿐입니다. 환술(幻術)을 부려 기행(奇行)을 일삼는 것은 진실로 우리 공이 미워하던 바입니다.
  공이 떠남이야 사사로운 정이 없겠지만 사람들이 슬퍼함은 사사로운 정이 있습니다. 애오라지 세상의 습속을 벗어나지 못하여, 다시금 멀리서 제문을 보내 길이 사모하는 마음을 올립니다. 공의 정신은 허공에 두루 찼으니, 지금 이 작은 정성을 응감(應感)하소서!

1) 시해(尸解) : 도가(道家)에서 수련이 깊은 사람이 육신을 남겨둔 채 진신(眞身)이 빠져 나가는 것으로, 여기서는 죽음을 미화한 말로 쓰였다.
2) 색은행괴(索隱行怪) : 《중용》에 나오는 말로 일반적으로 남들이 하지 않는 괴이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人傳公之蟬蛻, 各驚悼而惻惻. 幾酸淚之潸然, 豈其情之有極! 欲奔馳而一臨, 路江南其綿邈. 故緘辭而遠唁, 敍平生之幽懷. 嗟我公之生世, 造五歲而名恢. 詠三角之一絶, 使老儒而心灰. 擧世爲之譁駭, 云仲尼之復生. 公不樂夫爲賓, 倚西敎以爲形. 通鄒魯之昭道, 究五竺之玄說. 渾物我於無家, 齊性情於日月. 人依赴之益衆, 詰因果與禍福. 公又厭其誕妄, 托烏程而光塵. 不知者之謂狂, 然亦服其內眞. 軒冕靑紫之貴, 皆朋儔之與肩. 相爾汝於形外, 然腆鮮以傲然. 眼扶桑其盡空, 怳雲掃乎紺天. 彼名山與大川, 惟公迹之編著. 奇巖怪石勝水, 待公賞而增色. 晚秋江之相遇, 談至理之無隱. 共月湖而逍遙, 離合不遺其信. 杏雨先公而廢, 令伯牙而絶絃. 哀今日之尸解, 盍欲追乎玄泉? 想遊戲於九天, 恣唱酬而蹁躚. 必俯視乎塵寰, 亦撫掌而大噱. 素市飮之酒徒, 咸哀哭而痛切. 喟不再夫邂逅, 憫幽明之永隔. 念公言之尋常, 不怪行而隱索. 雖不講其內蘊, 誰不知夫素賾? 公雖隱而心妙, 知公者莫吾曹若. 嗚呼公之遠逝, 無乃惡夫人詐? 然如死之逾生, 縱萬世其尙乍. 公豈意於去住? 隨晝夜而從容. 恒不滅兮誰見? 笑肉眼之曚曨. 現幻術而立奇, 誠我公之惡斯. 公之去兮無私, 人之悲兮有私. 聊未免夫世習, 却遙薦其永思. 公之神兮徧虛空, 庶幾感微誠於此時. ]

- 홍유손(洪裕孫),〈김열경 시습에 대한 제문[祭金悅卿時習文]〉,《소총유고(篠叢遺稿)》

                      ▶ 김득신(1754~1822)의 취선도(醉仙圖)(경기도박물관 소장)

  소총(篠叢) 홍유손(1431~1529)이 지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에 대한 제문으로, 정든 술친구를 보내는 절절한 슬픔이 잘 나타나 있다.
  삼각산 운운한 시는 아래와 같다.

     삼각산 높은 봉우리 하늘을 꿰뚫었으니          三角高峰貫太靑
     올라가면 북두성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겠네      登可接撫北斗星
     산봉우리에 구름과 안개가 일 뿐만 아니라      非徒岳峀雲霧興
     왕성의 번영을 만세까지 이어 가도록 하네      能使王都萬世榮

  김시습이 천재라는 소문을 들은 당시의 임금 세종이 불러 삼각산이란 시제(詩題)를 주자 겨우 다섯 살이던 김시습이 이 시를 지으니, 세종이 탄복하고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벼슬하지 않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했던 김시습과 같이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도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27세 때 어머니의 당부로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기도 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홍유손(洪裕孫), 이총(李摠)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면서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19세 연상인 김시습과는 망년(忘年)의 벗으로 절친하였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임을 표방하였지만 조선전기에는 대개 극성하던 불교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 있어 선비들이 불교, 노장, 유교의 경계선을 엄밀히 긋지 않았다.

  김시습과 남효온은 모두 생육신에 속한 선비들로 절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지켜 스스로 유자(儒者)임을 자처하였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노장과 불교 풍(風)의 방달불기(放達不羈), 자유분방 그 자체이다. 대개 상식이 통하지 않는, 포악한 세상에서 힘없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저항은 술과 객기,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표출되곤 하니, 김시습과 남효온의 삶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저항의 모습이었다. 또한 답답한 현실을 견디지 못한 천재의 일탈(逸脫)이었다.

  작자는 김시습의 본색은 유자(儒者)였고 색은행괴(索隱行怪)하지 않았음을 강조했지만,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공의 본모습을 뉘라서 보리요.”라고 한 말은 영락없는 불교의 말이다.

  평소 저자에서 김시습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술꾼들이 김시습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오늘날 술꾼들이 정든 술친구를 마지막 보내는 슬픔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한편 김시습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체취가 느껴진다.

  세상을 조롱하듯 술 취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허름한 대폿집에 앉아 있는 김시습, 남효온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인으로 이름난 홍유손도 그 자리에 끼어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들이 세상 북새통에 끼지 못할 새라 아등바등 다투고 있는 오늘날, 저만큼 세상을 비켜서서 득실과 영욕을 덧없는 몽환(夢幻)처럼 보았던 이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이상하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