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부흥회 100주년
조선 시대 벼슬 가운데 감사(監司)는 관찰사를 가리킨다. 요즘으로 치면 도지사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監司 중에서도 삼남지역의 전라감사나 충청감사, 경상감사보다도 이북 평안도 지역의 '평안감사' 를
최고로 쳤다. "평안감사도 자기하기 싫으면 안 한다" 는 속담이 생겼을 정도이다.
왜 평안감사 자리를 노른 자위로 쳤는가. 수입이 다른 곳보다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경세유표' (經世遺表) 에 의하면 "황주목사의 연봉이 3만냥이었지만, 평안감사는 24만냥이었다" 고
나온다. 공식 수입이 그렇다는 것이고, 여기에다가 뒤로 들어오는 부수입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은 액수를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평안도 지역이 중국무역의 교통로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으므로 무역수입이 있었고,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평안도에 사대부가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지역에 정년퇴직한 대감이나 당상관이 살고 있으면, 외지에서 부임하는 신인 사또나 감사가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착취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반이 많이 살았던 안동에 부사가 새로 부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지역의 원로들과 명문 사대부들에게 인사를 다니면서 협조를 부탁하는
일이 큰일이었다. 그러나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부임한 관리들이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지역민들은 착취를 당하면서 살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서북천대' 이다.
전국을 떠돌아다녔던 '택리지 (擇里志)의 이중한은 "태조가 '서북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 는
명을 내렸다. 평안, 함경 두 도에는 삼백 년 이래로 고위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 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북지역의 고위 벼슬은 거의 이남 출신들이 가서 차지했던 것이다.
서북은 조선조 500년 동안 기회박탈로 인한 불평등의 한(恨)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던 지역이다.
그 서북의 중심 도시였던 평양에서, 1907년 개신교의 '평양대부흥' 이 일어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주님 앞에 양반, 상놈 없다' 는 기독교의 평등사상이 서북사람들의 5백년 恨을 풀어주면서,
영적으로 거듭나게 한 사건이 1907년 '평양대부흥' 이었지 않았나 싶다.
조선일보 스크랩 : 조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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