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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배달하며
식당에서 가수 김창완 씨를 먼발치로 본 적이 있어요. 불현듯 ‘너의 의미’라는 김영하의 단편소설이 생각나, 그날 밤 집에 돌아와 그의 책을 꺼내보았답니다. 그는 지금 뉴욕에 머물고 있다지요. 몇 년 전 저도 미국 서부의 한 도시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요. 하늘과 바다와 호수와 숲이 마치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듯 제 색깔을 지닌 그곳에서, 저는 한낮에 모자를 눌러쓰고 고목 사이로 잔디가 깔린 뒷마당을 산책하기를 좋아했어요. 걷다가 때때로 갑자기 머리 위로 커다란 어둠이 덮여와 주변이 검고 서늘해지는 순간을 만나곤 했는데, 바로 새 그림자 때문이었어요. 공포를 느끼고 어깨를 움츠리는 다음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면 벌써 새는 하늘 높이 멀어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낮의 잔디 위에서 햇빛이 투명하게 반짝거리고 있죠. 이상한 느낌이었어요. 짧고 비현실적인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내 몸에 새겨져 있는 공포의 흔적. 수상한 광선에라도 쬐인 것은 아닐까---. 직업정신(!)을 잃지 않고 언젠가는 그 느낌을 소설에 써먹으리라 생각했는데, 한국에 돌아와보니 이렇게 먼저 쓴 사람이 있더라구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니 내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생겨난 것일 텐데’ 이 문장, 재미있군요. 보통은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 혹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이라고 쓰기 십상 아닌가요? 이처럼 허를 찌르는 뜻밖의 문장도 이 작가에게 따라다니는 ’전복적 사고‘라는 평가와 관련이 있을까요?(썰렁-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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