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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수로보니게 여인 2009. 7. 10. 00:29

 

[만물상] 위구르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입력 : 2009.07.08 05:36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가 고구려 유민 출신 장수 고선지(高仙芝)를 기려 쓴 시가 있다. "안서도호 푸른 말(馬)/소문 자자하더니 홀연 동으로 왔네/이 말 전장에서 대적할 자 없었고/사람과 마음 맞춰 큰 공 세웠지…" 오늘날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인 파미르 고원 일대 원정에 나서 눈부신 전과를 올린 고선지의 명성이 당대 최고 시인의 마음도 움직였나 보다. 이때 고선지의 벼슬이 안서절도사였다. 당나라 군대 서부지역 사령관쯤 되는 것으로,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 사령부가 있었다.

▶고려 가요 '쌍화점'에는 회회아비가 떡의 일종인 쌍화를 사러 간 여인의 손목을 쥐더라는 구절이 있다. 고려시대엔 회회인(回回人·무슬림)들과 교류가 많아 그들 중 일부는 궁중에서 왕을 위해 연회를 열기도 했고 시장에서 장사도 했다. 그들은 조선 건국 후에도 그냥 남아 사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태조는 설장수라는 회회인에게 '경주 설씨'라고 본관을 하사했는데, 실록에선 그를 '회골(위구르) 사람'이라고 했다.(이희근 '우리 안의 그들')

▶위구르는 몽골, 티베트와 트로이카를 이룬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었다. 한때는 제국을 건설해 실크로드의 요충을 지배하며 동서 교역을 장악했다. 위구르가 중국 영토로 편입된 것은 18세기 청나라 중엽이었다. 명나라 때 400만㎢에 불과하던 중국의 영토는 청나라 강희·옹정·건륭제 때 티베트, 몽골, 위구르를 합병하며 1300만㎢로 늘었다. 지금의 중국 영토는 외몽골을 제외하곤 청나라 때 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위구르 자치구는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을 합쳐놓은 크기다. 이 땅에 2100만명이 살고 있다. 1949년 인구가 400만~500만명일 때는 한족이 약 30만명, 6%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족이 823만명, 39%나 된다. 중국 정부가 '서부대개발'을 통해 티베트, 위구르 개발에 나서고 한족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위구르인들의 삶과 문화도 급격한 변모를 겪고 있다.

▶5일 위구르 수도 우루무치에서 일어난 유혈사태로 156명이 사망하고 8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표면적 원인은 한족·위구르족 노동자 간 충돌에 대한 경찰의 편파 수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 밑에는 위구르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격차, 고유문화 불인정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다. 중국이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인정 않는 정책을 고집하는 한 위구르와 티베트는 화약고로 남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