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노비도 권력 잡았던 고려사회의 역동성
입력 : 2009.05.23 03:04 / 수정 : 2009.05.24 08:04
김준 형제는 최씨집안 가노 출신
강윤충은 재상 올라 왕비와 간통도
형 강윤성의 딸이 이성계 둘째부인
조선과 비교할 때 고려사회만의 특징 중 하나가 역동성이다. 물론 사회가 안정되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왕조의 불안, 잦은 외침, 무신정권 출현, 몽골에의 예속 등 수도 없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500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에너지인지 모른다.
고려의 노비 만적(萬績)이 "장상(將相)의 씨가 어찌 처음부터 있었겠느냐"며 노비반란을 일으킨 것이 무신난이 한창이던 고려 신종(神宗) 원년(1197년)의 일이다. 만적의 난은 당시 반란에 가담했다가 배신한 노비 순정(順貞)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만적의 절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사회에서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진 62년 최씨 정권(1196~1258년)이 무너지자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김준(金俊) 김승준(金承俊) 형제가 바로 최씨 집안의 가노(家奴) 출신이다. 흔히 하극상(下剋上)으로 불리는 이같은 급격한 신분상승의 기회는 원나라 간섭기에 더욱 다양화된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선의 노비들과 달리 고려의 노비들 중에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글공부 등을 통해 '미래'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기회를 잡은 인물 중 하나가 관노(官奴)로 충숙왕을 가까이에서 섬겼던 강윤충(康允忠· ?~1359년)이다. 노비문서 등을 관리하던 관가의 노비였던 강윤충은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 노비를 면한 것은 물론 무관 4품직인 호군(護軍)에까지 오른다. 오늘날로 치면 군인으로 별을 단 것이다. 이때 오늘날의 영관급에 해당하는 낭장의 아내를 강간했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풀려났고 1339년 '조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충혜왕을 도와 난을 진압하고 1등 공신에 책봉되고 2품직인 밀직부사에 오른다. 조선시대로 치면 판서급으로 승진한 것이다. 이때 강윤충이 한 일은 외형적으로는 노비를 주관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색을 밝히던 충혜왕에게 미색(美色)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1344년 충혜왕이 원나라로 소환돼 왕위를 잃자 8살 아들 충목왕이 즉위했다. 실권을 장악한 강윤충은 재상이 되어 '대비'격인 충숙왕의 어머니와도 노골적으로 간통을 했다. 아마도 노비출신으로 왕비와 간통한 유일한 인물이 아닐까?
강윤충의 안하무인(眼下無人)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려사'의 한 대목이다. '언젠가 강윤충이 재상 조석견을 방문하여 담소를 나누었다. 그때 조석견의 처 장씨가 강윤충을 엿보고는 미남이라 여겼다. 조석견이 죽자 장씨는 여종을 시켜 강윤충을 초청하였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종이 세번이나 찾아오자 강윤충은 그때서야 장씨와 간통하였다. 후에 더러운 소문이 있었으므로 강윤충이 장씨를 버렸다.' 그러나 강윤충이 장씨를 버린 이유는 '더러운 소문', 즉 다른 남자와의 혼인설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목적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고려사'다. '강윤충은 현재 본처가 있는데도 아직 상복도 벗지 못한 고인(故人) 조석견의 처에게 장가 들어 조석견의 유산을 빼앗았습니다.'
이 일화에서 보듯 강윤충은 자기가 유혹하기보다는 여자들이 유혹할 만큼 미남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 그의 처세술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환관이 되어 고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고룡보(高龍普)가 반(反) 강윤충 세력의 요청에 따라 강윤충의 군모(君母)간통을 조사하기 위해 고려를 찾았다.
고려출신 원나라 환관과 노비출신 재상이 정면충돌했다. 원나라 환관은 임금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다. 결국 강윤충은 고룡보의 어머니를 몰래 찾아가 엄청난 뇌물을 찔러주었다. 조정에 모습을 드러낸 고룡보는 강윤충을 쳐다보며 "당신은 계속 일을 보아도 좋소!"라고 말한다. 강윤충이 이긴 것이다.
이후 충정왕을 거쳐 공민왕 때에도 수완을 발휘해 공민왕 3년(1354년) 정승(시중) 바로 아래인 1품직 판삼사사(判三司事)에까지 오르지만 2년 후 충혜왕의 서자를 왕위로 삼으려는 역모에 간접 연루되어 하루 아침에 동래현령으로 좌천됐다가 3년 후인 공민왕 8년(1356년) 공민왕의 명에 따라 살해당했다.
강윤충에게는 위로 강윤귀, 강윤성, 강윤휘 등의 형제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 중 강윤성은 윤충처럼 판삼사사에까지 올랐고 강윤휘도 판도판서에까지 올랐다. 천출이면서도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집안이었던 것이다. 공민왕 5년 반원(反元)정책에 따라 친원 노선을 걸었던 신천 강씨 집안이 한때 위축되기는 했지만 결국 강윤충의 형 강윤성의 딸이 신흥무장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 됨으로써 조선이 건국되는 데 무력(武力)차원에서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이성계와 결혼해 방번 방석을 낳은 신덕왕후 강씨가 바로 강윤충의 조카인 것이다. 만일 이방원의 '왕자의 난'이 실패하고 강씨 소생으로 세자에 책봉됐던 방석이 이성계의 뒤를 이었더라면 강윤충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크게 달라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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