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덕일& 정민

[이덕일 사랑] 그림책의 부활

수로보니게 여인 2009. 4. 1. 17:14

 

그림책의 부활

조선 중기 최립(崔笠)은 '간이집(簡易集)'의 첩면(帖面)에서 "우리나라의 명화는 재능이 뛰어난 종실(宗室)에서 많이 나왔다"면서 석양정(石陽正)과 학림수(鶴林守)를 예로 들었다. 석양정 이정(李霆)은 매죽(梅竹)으로 이름났고, 학림수 이경윤(李慶胤)·영윤(英胤)형제는 수석(水石)으로 이름났다. 다산 정약용은 '영명위(永明尉)의 화첩에 네 절구를 쓰다'라는 시를 남겨 정조의 딸 숙선 옹주(淑善翁主)의 남편 영명위 홍현주(洪顯周)도 그림에 뛰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분은 높지만 정치에 관여하기 어려운 처지를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표출한 것이리라.

정약용은 태학생(太學生) 윤용(尹容)의 그림책을 평한 '발취우첩(跋翠羽帖)'이란 글도 남겼다. 윤용이 자신의 그림을 너무 애지중지하자 사람들이 "비취(翡翠:물총새)가 제 깃(羽)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비웃은 데서 취우첩(翠羽帖)이란 말이 나왔다. 다산은 윤용이 화조도(花鳥圖)나 축수도(蓄獸圖:짐승 그림)를 잘 그렸다면서 "그가 호랑나비나 잠자리 등을 잡아 그 털과 분(粉)가루까지 그 세밀한 데를 묘사했다"고 세밀화의 대가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다산은 "끝이 무지러진 붓〔禿筆〕으로 수묵(水墨)을 듬뿍 묻혀 형태와 달리 기괴하게 그려놓고도 '사물의 내면을 그린 것이지 그 겉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다(以畵意不畵形)'라고 이름 붙이는 자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당시의 한 화풍도 비판했다. 윤용의 조부는 '자화상(自畵像)'으로 유명한 정약용의 외조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였다. 윤두서의 재능은 아들 윤덕희(尹德熙)에게 전해졌다가 다시 손자 윤용에게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정약용은 "예(藝)는 갑자기 이룰 수 없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그림평론가였던 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은 이병연(李秉淵)이 소장한 화첩의 발문에 "그림을 소장한 자(蓄畵者)는 완상(翫賞)하고 나서 마음에 흡족하면 주객(主客)이 하나가 된다"고 말했다.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한국 그림책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림을 중요한 소양 중의 하나로 여겼던 선인들의 전통이 다시 꽃피고 있는 것이다.


입력 : 2009.03.27 23:03 / 수정 : 2009.03.30 14:49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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