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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이제야 실현"

수로보니게 여인 2008. 11. 5. 18:36

 오바마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이제야 실현"

김우성 기자 rahar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4일(현지시각) 민주당 대선주자인 버락 오바마 당선자가 선거 당일 시카고 그랜트 파크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당선 연설을 하고 있...


5일 자정(미국 현지시각) 미국 시카고 그랜트 파크.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가 연단에 나타나자 이 자리에 모인 수십 만 명의 군중이 환호성을 질렀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오바마 후보가 "헬로, 시카고"라는 인사로 연설을 시작하자 그랜트 파크는 오바마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환호성이 잠잠해질 즈음, 오바마 후보는 대통령 당선 수락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미국이 모든 것이 가능한 국가라는 점에 회의를 가졌던 분이라면 우리 선조가 가진 꿈이 가능하단 걸 보여드렸다”며 “오늘이 바로 그 해답이었다”고 말했다. “투표소에서 그 어느 때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했고 수 시간씩 투표소 바깥에서 기다리며 귀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는 것.


이어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다양성에 대해, 미국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회의론을 펼쳐왔으나 오늘은 회의론을 떨칠 수 있는 희망의 날이다. 오늘 대선에서 우리가 이뤄낸 일들이 미국이 가져올 변화”라고 자축했다.


오바마 후보는 지난 긴 대선 기간 동안 경쟁상대였던 매케인 공화당 대선후보를 언급했다. “나와 길고 치열한 선거 경쟁을 벌였지만, 그분의 모든 노력이 미국에 대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한 그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기심을 없애고 함께 나아갈 것이다. 매케인 후보와 사라 페일린 부통령 후보에게 감사드린다. 우리가 약속한 것들을 이뤄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감사의 말을 이었다. 조지프 바이든 민주당 부통령 후보와 아내 미셸 오바마, 두 딸이 그의 감사의 첫 대상이었다. 오바마 후보는 “스크랜튼 지역에서 클리블랜드까지 항상 같이 유세해줬던 바이든 부통령 후보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0여년간 저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지지를 보내준 미셸 오바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딸도 몹시 사랑한다. 이제 그 아이들과 함께 저는 백악관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일 사망한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도 빠질 수 없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외조모는 이 자리에 없다. 그리움에 사무친다”며 “그분에게 제가 진 빚과 입은 은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덧붙였다.


그는 “푼돈을 모아 작은 선거유세장에서 선거를 시작했다”며 “여러분들의 힘이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젊은이들뿐 아니라 나이 든 분들도 악천후를 뚫고 선거유세장으로 와 지지를 표명해줬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제야 탄생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젊은이와 노년층, 부자와 가난한 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인, 인디언, 동성연애자와 이성연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할 것 없이 미국인들은 전세계에 우리가 단순히 공화당과 민주당의 집합체가 아님을 보여줬다”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하나의 미국이 될 것”이라고 화합과 단합을 역설했다.

오바마 후보는 현재 미국이 직면한 위기들을 언급했다. 그는 “여러분들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저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국가 현안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라며 “지금
금융위기도 극복해야 하고 이라크아프간에서 우리 미군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주택 대출에 대한 환수금을 어떻게 갚아야할지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우리 앞에는 산적한 문제들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선거 구호이기도 했던 “예스, 위 캔(우리는 할 수 있다)”를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문제점을 해결해나갈 것이고 여러분의 굳은 살 박힌 손으로 이 나라를 재건할 것”이라고 말한 그는 “오늘의 승리는 변화를 시작하는 계기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의 힘으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링컨 대통령 시절 때는 더 분열된 국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민의 단결을 그 어느 것도 깨뜨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이 앞으로 더욱더 빛나는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부와 돈 때문이 아니라 기회와 민주주의, 땀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바마 후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듯이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 불가능하던 모든 일들이 여러분의 한 표를 통해 이뤄질 것이다”며 “그동안 냉소주의와 많은 의혹들이 있었지만 앞으로 번영과 자유, 진실을 이뤄낼 것이다. 미국에 신의 은총이 있기를”이라고 연설을 마쳤다.

  • ▲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대통령 당선 연설을 보도한 CNN 방송/출처 유튜브  

 입력 : 2008.11.05 14:33 / 수정 : 2008.11.05 16:05

 


  오바마 키워낸 `자유주의자' 어머니 앤

연합뉴스 

 

 

◀ 흑인 최초의 대통령을 꿈꾸는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백인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 소에토로를 뉴욕 타임스가 장문의 기사로 집중 ... /뉴시스 

 

“어린 나이에도 세계관을 갖고 있고, 큰 꿈을 꾸었던 이상주의자.”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 소에토로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은 14일 앤의 친구와 동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1995년 암으로 작고한 오바마 모친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재조명했다.

오바마 의원은 선거운동기간에 자신의 어머니를 ‘싱글 맘’이라고 불렀지만, 그를 키워낸 어머니의 범상치 않은 삶을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백인 어머니 앤은 2차 세계대전기간 군 기지에서 태어났고, 가구 세일즈를 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남자 아기를 원했기 때문에 ‘스탠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그녀의 가족은 1960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하기 전까지 보다 나은 돈벌이를 위해 캘리포니아, 캔자스, 텍사스, 워싱턴을 전전했다.

이듬해 앤은 하와이 대학의 러시아어 수업중에 이 학교 최초의 흑인학생있었던 남편과 만났고, 당시 미국내에서 백인과 흑인간 결혼이 극히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1963년 이들은 파경을 맞았고, 앤은 롤로 소에토로라는 인도네시아 출신 학생과 재혼했다.

앤의 고교친구들은 앤이 백인 남학생과 데이트한 것을 본 적이 없다며 “그녀는 인종문제 기준으로 삼아 다름을 멀리하기 보다는 다름을 수용하는 쪽이었다”고 회고했다.

첫 결혼과 재혼문제에 대해서도 지인들은 “그녀는 얼마나 깊게 사랑하는지가 문제지,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특별히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앤은 1974년 호놀룰루로 돌아왔다가 3년후 대학원 인류학 논문을 위한 현장탐사차 인도네시아로 다시 갔으나, 소년 오바마는 하와이에 남았다. 어머니와 아들이 떨어져 있던 이 기간은 서로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오바마는 2살 이후 자신의 생부를 거의 본 적이 없고 어머니와도 떨어져 살아서 성장기의 오바마에게서 ‘부모의 흔적’을 찾아내기 힘들지만, 앤의 지인들은 지금의 오바마 의원에게 그녀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녀는 소년 오바마에게 정직함과 직설적인 언변, 독립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그녀의 많은 지인들은 앤이 아들에게 남겨준 ‘유산’으로 자신감, 추진력, 경계 허물기 등을 꼽았다.

그러나 포드재단과 인도네시아의 은행에서 소액금융대출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등 왕성하게 일하던 앤은 9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바마 의원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유물이 무엇이냐는 AP통신의 질문에 “어머니의 유해가 뿌려진 하와이 오하우 남쪽 해변의 절벽이 담겨있는 사진”이라고 답한 바 있다.

 

입력 : 2008.03.14 16:15 / 수정 : 2008.03.16 11:20     


 

시련이 키운 '검은 케네디'… "미국에 빚 갚겠다" 정치의 길로

● 오바마 누구인가
흑백혼혈로 태어나 외조부모 슬하에서 성장
고교시절엔 정체성 고민으로 마약 손대기도
컨설팅회사 다니다 빈민 위한 지역활동 시작

이혜운 기자 liety@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소년에게 10대 시절은 누구나 힘든 시기다. '버락(Barack)'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소년도 그랬다. 그는 하와이의 명문 사립 푸나후 스쿨의 몇 안 되는 흑인 학생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처럼 부자도 아니었고, 부모와 떨어져 외조부모의 손에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는 케냐 출신 하와이 유학생이었다. 수업을 같이 듣던 17세의 백인 처녀 앤(Ann)과 사랑에 빠져 마우이섬으로 도망가 그를 낳았다. 하지만 두 살 때 아버지는 집을 떠나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났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케냐로 돌아가 버렸다.

소년은 학교에서 아버지가 '케냐의 왕자'라고 허풍을 쳤다. 이후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러 요양차 하와이에 온 허약하고 초라한 아버지를 보고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슈] 미국은 '희망'과 '변화를 선택했다 

 

어린 시절 그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살았다.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일 때 인도네시아 유학생 롤로(Lolo)와 재혼한 뒤 그를 데리고 자카르타로 갔다. 어머니는 새벽 4시면 그를 깨워 영어 공부를 시켰다. 언젠가는 미국 주류사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바마는 "나는 인도네시아 아이이자 하와이 아이로, 흑인 아이이자 백인 아이로 자랐다. 그 과정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고교 시절엔 '아버지 없는 흑백 혼혈'이라는 출신 배경 때문에 정체성 고민에 빠져 마리화나와 코카인에까지 손을 댔으나 결국 극복했다.

교환학생으로 뉴욕 컬럼비아대학을 다닐 때는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다. 하루에 4.5㎞씩 달리고 일요일에는 금식을 했으며 삶의 기록을 남겼다. 책도 많이 읽었다. 수업이 없거나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걸어서 도시 이곳저곳을 다녔다. 이때의 생활은 그의 지적 수준을 급속히 향상시켰다.

그는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승진도 했고 비서도 생겼으며 은행의 잔고도 제법 쌓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관용과 평등을 지키고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 편에 서라." 그는 결국 빈민을 위한 지역 활동을 하러 시카고로 떠났다.

이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일리노이주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성장하면서 전형적인 정치인 코스를 밟는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진보적 미국과 보수적 미국이란 없다.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라는 명연설을 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2006년 그는 미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담대한 꿈'을 실현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연설할 기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고, 민주당 동료 의원들이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발벗고 나섰다. 참모인 데이비드 액설로드(Axelrod)는 "지지자들은 늘어났지만 그 역시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 말했다.

그는 종종 선배 정치인들에게 자문했다. 가장 신뢰한 사람 중 한 명이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톰 대슐(Daschle·2005년 은퇴)이었다. 톰은 "머뭇거리는 그에게 저는 단호하게 말했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은 버리라고. 상원에 오래 있을수록 '그 표결에서는 왜 찬성했나?'따위의 질문에 변명할 게 많아진다고요"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친한 친구들과 보좌관들을 불러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데 대해 떠봤다. 대선 출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 중엔 성공한 흑인 친구들이 많았다. 한 친구는 "아직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는 안됐어" 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럴 거야. 내가 그런 선입견에 도전하겠어" 라고 답했다.

2001년 오바마는 한 인터뷰에서 부모 얘기를 꺼냈다.
"그 분들은 이 나라에서 제 이름이 성공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제게 아프리카 이름 '버락'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가 더 큰 미국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과 제가 이전에 이 땅에 왔던 모든 이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버락은 이제 그 빚을 짊어진 채 더 큰 미국을 위해 백악관으로 들어간다.

 

 물에서 목숨 건진 순간도 웃던 오바마

 웃으며 축하 집회 들어서는 오바마

 방탄 유리 사이에 두고 지지자 만나다

 오바마, '끝없는 추락' 미국 경제에 구세주 되나

입력 : 2008.11.06 00:55 / 수정 : 2008.11.06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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