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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참 좋다고 말해주면 일부러 시(詩)를 거칠게 만들었죠"

수로보니게 여인 2008. 5. 19. 10:56

"시(詩)가 참 좋다고 말해주면 일부러 시(詩)를 거칠게 만들었죠"
부인 김현경이 밝힌 '인간' 김수영 시인
6·25 전쟁중 의용군 입대는 길에서 붙잡혀 끌려간 것
시인이 쓰던 모든 물건 간직 서재 그대로 복원하는게 꿈
 

               ▲ 아내를 등장시킨 김수영의 시.
 
"김 시인이 우리집 바깥 길가에서 휘파람을 불어요.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잘 따라 불렀어. 조바심이 나서 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 그래서 몰래 구두 갖다 놓고 또 이쪽으로 오버코트 갖다놓고…. 이런 식으로 기어이 나가서 만나곤 했지요."

"시여 침을 뱉어라"며 엄정한 시정신을 추구했던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의 부인 김현경(金顯敬·81)씨가 회상한 시인과의 연애시절 한 장면이다. 올해로 시인의 40주기를 맞아 시단에서 '김수영 르네상스' 현상이 일고 있는 가운데 부인 김씨가 문학평론가 신수정 교수(명지대 문창과)와 대담을 갖고, 시인의 개인사에 얽힌 일화들을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이 대담은 이번 주 나올 계간지 《문학동네》 여름호에 실린다.

김수영 시인과 부인 김씨는 6·25 전쟁에 김 시인이 의용군으로 끌려나가고 종전 후에는 한 때 별거를 하는 등 거센 풍파를 겪었지만 그 후 시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신 교수는 "김수영 시인은 자신의 생활에서 소재를 따온 일상시(日常詩)를 많이 썼다는 점에서 부인의 증언을 통해 공개된 내용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용군 집단 사살 현장에서 살아 돌아와

부인 김씨는 6·25 전쟁중 김 시인이 의용군으로 입대하게 된 계기에 대해 "길에서 붙잡혀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김 시인의 의용군 입대에 대해서는 그간 자원입대와 강제 징집 사이에 논란이 있어 왔다. 부인 김씨는 "내가 만들어 준 셔츠를 입고 외출한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수소문 끝에 서울 일신초등학교에 수용된 것을 알고 감자를 한 보따리 삶아 찾아갔다"고 회고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던 김 시인이 살아 돌아온 사실은 그간 '탈출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가 그녀의 증언을 통해 이번에 세밀하게 드러났다.

'큰 구덩이에 세워놓고 빵(집단사살)해버렸는데… 어느 순간 자기도 쓰러졌는데 자기 위로 팍팍 시체고 사람이고 겹쳐지면서 쌓이더라.… 어떻게 해서든 죽은 시늉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그러고 있었다.'
▲ 김수영 시인의 초상화 앞에 선 부인 김현경씨. 김씨는“초상화 속 남편이 입은 옷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 준 것들”이라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해 넣은 틀니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김수영 시인은 단순하게 반복되는 생활을 못 견뎌 했다. 부인에 따르면, 서울로 돌아왔다가 경찰에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시인은 야전병원장 통역관으로 일하며 일상이 안정되자 "시간을 견디기가 너무 힘이 드니까 이를 하나씩 뺐다"고 증언했다. 김 시인은 훗날 부인에게 "너무너무 자극이 필요하다. 뭐가 아프든지, 뭐가 쓰리든지, 뭔가 통증이 나를 일으킬 것 같았다"는 말로 생니를 뽑아가며 견딘 수용소 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

◆폭음과 틀니 분실사건

김 시인은 술에 취하면 틀니를 빼서 손수건에 싼 뒤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부인은 시인이 만취해 돌아온 날이면 주머니에서 틀니부터 찾아내 컵 속에 넣어 둔다. 1960년대 초의 어느 날, 평소처럼 주머니를 뒤졌는데 틀니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어디서 술 잡수셨어?" 하고 물었더니 시인은 "무교동에서 먹고 청진동에서 먹고 광화문이 마지막"이라며 화를 냈고, 부인은 그런 남편을 살살 달래 술집을 시간 순서대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어느 술집 들통 속에 빠진 틀니를 찾아내 닦아서 끼워줬더니 시인이 아주 좋아했다고 부인은 기억한다.

◆별거와 재결합

부인 김씨는 김수영 시인의 선린상고 선배이자 영문학자인 이모씨(작고)와 자신이 잠시 동거한 사실을 두고 떠도는 풍문에 대해서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고 말했다. 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 있는 시인을 찾아갔던 그녀는 일자리를 알아본다며 평소 안면이 있던 이씨를 만나러 갔다. 부인 김씨는 그러나 당시 40대 노총각이었던 이씨의 집에 그대로 눌러 앉았다. 두 사람이 살던 집에 김 시인이 나타나 부인 김씨에게 "가자"고 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시인에게 돌아온 것은 2년이 더 지난 뒤였다. 김씨는 (이혼하기 위해)김 시인의 도장까지 받았지만 "이러다가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고, 재결합을 결심한 뒤 서울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다. 부인은 재결합하던 날의 상황도 증언했다. "삼선교 어디에서 5시쯤 만나자"고 엽서를 써 보내자 시인이 '이발을 깨끗하게 하고 딱 나와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그냥 삼선교를 빙 두 바퀴 돌고 그날 밤 이후 다시 부부로 같이 살기' 시작했다.

부인 김씨는 대담에서 김 시인이 "술을 무지무지하게 먹고 들어오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은 길에서 이○○를 만났다든지 하는 자극이 있는 날"이라는 말로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부인은 또 "1년에 한두 번 무지무지하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내가 꼭 냉수를 떠다 줬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남편에게로 돌아온 뒤 "시인과 밤을 새가면서 얘기를 참 많이 했다"고 했다. 남편에게 "시인 중의 시인, 최고의 시인"이라고 말해주면 김 시인이 아주 좋아하며 "나는 인류를 위해서 시를 쓰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인으로서의 남편에 대해서도 나름의 평가를 내렸다. "똑같은 기분으로 절대로 시 두 편을 안 써요. 그리고 곱게 쓰는 것도 싫어하고." 아내가 "어머 이거 참 좋다"고 하면 시인은 일부러 더 거칠게 시를 만들어서 대중성을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왜 이렇게 어려워요?"라고 물으면 "내가 좀 덜 됐지"라며 난해하다는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김현경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지금도 남편이 남긴 시 원고를 보면 가슴이 뜨겁고 이런 대 시인과 살았다는 것이 흐뭇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시인이 쓰던 물건은 재떨이 하나도 버리지 않고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며 "1980년대 초에 충북 보은 속리산 자락에 집을 사 둔 것이 있는데 이곳에 생전에 시인이 사용하던 그대로 서재를 복원하는 것이 내 생의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했다.

입력 : 2008.05.18 23:46 / 수정 : 2008.05.19 0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