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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종환 시인

수로보니게 여인 2008. 1. 20. 16:11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읍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읍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 개 햇살을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 날 몇 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 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벌판을 지나
벌판 가득한 눈발 속 더 지나
가슴을 후벼파며 내게 오는 그대여
등에 기대어 흐느끼며 울고 싶은 그대여

눈보라 진눈깨비와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쏟아지는 빗발과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종이배 사랑

 

내 너 있는 쪽으로 흘려보내는 저녁 강물빛과
네가 나를 향해 던지는 물결소리 위에
우리 사랑은 두 척의 흔들리는 종이배 같아서
무사히 무사히 이 물길 건널지 알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가 굽이 잦은 계곡물과
물살 급한 여울목을 더 건너야 하는 나이여서
지금 어깨를 마주 대고 흐르는 이 잔잔한 보폭으로
넓고 먼 한 생의 바다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이 흐름 속에 몸을 쉴 모래톱 하나
우리 영혼의 젖어 있는 구석구석을 햇볕에 꺼내 말리며
머물렀다 갈 익명의 작은 섬 하나 만나지 못해

이 물결 위에 손가락으로 써두었던 말 노래에 실려
기우뚱거리며 뱃전을 두드리곤 하던 물소리 섞인 그 말
밀려오는 세월의 발길에 지워진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내가 쓴 그 글씨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내 너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그물을 들고 먼 바다로 나가는 시간과
뱃전에 진흙을 묻힌 채 낮선 섬의
감탕받에 묶여 있는 시간이 더 많아도

내 네게 준 사랑의 말보다 풀잎 사이를 떠다니는 말
벌레들이 시새워 우는 소리 더 많이 듣고 살아야 한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지금 내가 한 이 말이
네게 준 내 마음의 전부였음을

바람결에 종이배 실려 보냈다 되돌아오기를 수십 번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이 한마디 네 몸 깊은 곳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내 이 세상 떠난 뒤에 너 남거든
기억해다오 내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멀리 가는 물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렵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길을 가지 않는가.
때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처처불상

 

수펑나무 뿌리가 석굴을 덮으며
천천히 폐허가 되어 버린
따프롬 사원 무너진 회랑 한 귀퉁이에
잘려진 돌부처의 발 두 개를 주워다 놓고
발 아래 촛불과 향을 피워 놓은 채
늙은 보살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처처불상

발목도 그녀에겐
부처의 전부인 것이다
무너진 절 틈에서 걸음을 멈춘 채
오랜 적멸에 들어 있던 부처의
발을 주워 가슴에 안고
보살은 얼마나 간절하였을 것인가
사랑하면 부처 아닌 게 없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귀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비둘기

 

양식을 하늘에서 찾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광장의 돌바닥 위에 먹이가 뿌려지면
새들은 일제히 날개를 펴고 지상으로 날아든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먹이는 푸석푸석하고 따듯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긴장과 저항도 없고
씨앗을 지키는 떫고 시큼한 과육도 없는
밋밋한 먹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부리를 쪼아대는 습관이 어느새 몸에 깊이 배었다
부피는 작지 않지만 허기를 메꾸기엔 부족한
지상의 양식들을 입안에 넣었다가 목이 메어
뱉어낼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순간들을 자주 만나곤 했다
그때마다 발갛게 언 발로 땅을 차곤 하지만
그것이 날아오르기 위한 발돋움은 아니다
오늘도 상가 옥상에 재푸른 몸을 기대고 있거나
가등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곤 하지만
날개는 오르는 일보다 쏜살같이 내려가는 비행에
길들여져 있다 하늘을 다 잊은 건 아니라고
자신에게 주문처럼 되뇌어 보지만
비대해진 몸은 지상에 던져지는 먹이를 향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시의 건물 아래쪽 허공만을 제 영토로 축소시킨 채
크고 푸른 하늘은 접어버린 비둘기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비둘기, 비둘기떼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 사람

 

내 목소리를 듣기만 하여도
내 가슴속에 비가 내리고 있는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지
금방 알아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노랫소리를 듣고는
내가 아파하고 있는지
흥겨워하고 있는지
금방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다.
내 마음의 음색과 빛깔과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나를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전 재산

-김군자 할머니 말씀

 

외로운 거 그게 제일 힘들지 뭐

어려서 부모 잃고 열일곱 살 때 일본 군대 끌려가

악몽 같은 삼 년을 위안소에서 보냈지

행인지 불행인지 사랑한다는 사내 하나 있더니

저 먼저 목을 매고 딸은 다섯 해를 살다가 죽고

술집 식모살이 막일 단추 끼우기

그렇게 살았어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뼈 마디마디가 저려오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왜 이렇게 살이 시리고 힘이 드는지

나만 힘든 건지

남들도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아픈지

 

돈을 왜 다 내어놓느냐고?

나도 그애들처럼 고아였잖아

정선에서 장사할 때 모은 돈하고

지원금.....

안 쓰고 모은 건데

나무 적은 돈이라 미안해

전 재산이랄 게 있나

요란 떨 거 없어

 

지금도 아프지 별 차도가 없어

시간도 얼마 안 남은 것 같고

 

.............혼자 살았으니까

외로운 거 그게 제일 힘들었지 뭐

 

 

 

자작나무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못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새벽별

 

새벽하늘에 들어가지 못한 

별 하나 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가장 고요해지는 때를 기다려

우리들 가장 가까운 곳까지 내려온 별인지도 모르지요

오손도손 사랑하고 가슴 아파도

하는 얘기에 귀 기울이다

모두들 소리도 발자국도 없이 돌아갈 때에

너무도 가까이 내려와 오래오래 혼자 눈물짓다가

돌아가는 시간이 길어진 별인지도 모르지요

남들보다 늦게까지 한 사람을

사랑하던 마음인지도 모르지요

 

 

 

 

속리산 자락 산방(山房)에서 느릿느릿 안분지족하는 도종환 시인

 

 

“빠른 삶은 병든 삶이요, 느린 삶은 건강한 삶, 조용한 삶은 거룩한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에게서 섬세하게 흔들리는 여린 감성을 보았다면 아마 맞을 것이다. 그에게서 굽힐 줄 모르는 지사적 면모를 발견했다면 그 역시 맞을 것이다. 시인 자신이 노래했던 ‘부드러운 직선’은 마치 자화상과도 같은 표현이다. 도종환은 부드럽고도 올곧은 시인. 성품이 그러하고 삶이 그러했다. 볕 좋고 바람 선선한 날, 속리산 자락 그림 같은 산방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첩첩 산중에 그림처럼 서 있는 외딴 황토방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골길을 달렸다. 서울 밖으로 고작 두어 시간 나왔을 뿐인데 코끝에 와 닿는 공기의 감촉이 다르다. 순도 높은 바람이 가붓하게 불었다. 기분 좋은 세기로 뺨도 살짝 간질인다. 더 이상 차로 들어가기엔 길이 너무 좁아 보이는 지점에서 차를 내려 걷기로 한다. 마중 나온 도종환(52) 선생이 특유의 착한 미소로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선생의 집은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들어온 다음에도 또 한 번 산속에 폭 파묻혀 있었다. 첩첩산중에 버섯 모양으로 자리 잡은 외딴 황토방.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오래오래 살라’는 뜻에서 구구산방(龜龜山房)이란다.

앞마당에는 담요를 덮어놓은 듯 정갈하게 잔디가 깔려 있다. 마당 한켠엔 멋스럽게 기운 넓적 바위 사이로 어여쁜 연못이 고여 있다. 일부러 만들어 꾸민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라니 더욱 어여쁘게 보인다. 집 앞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계곡이 흐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라니가 물을 마시러 오고 오소리, 너구리가 먹을거리를 찾아 찾아든다고 한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에 마음 뺏기기 십상이다.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후배가 암 판정을 받고 요양 차 지은 집이에요. 집 위쪽으로 법룡사라는 절이 있는데 거기 스님이 후배에게 이 집터를 소개했다고 하더군요. 3년 전 후배가 저 세상으로 가 내가 여기 들어와 살게 됐지요.”

시인이 충북 보은의 이곳 산방에 머문 지도 어느새 3년이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 어렵사리 복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병이 들어 이곳으로 피신했다. 자율신경실조증. 이름조차 낯선 이 병은 특히 워커홀릭들을 노리는 병이라 한다. 몸의 균형이 깨져 심신이 무기력에 빠지는 상태로, 이 병에 걸렸을 땐 잔병이 들어도 잘 낫질 않는다. 감기라도 한번 걸리면 주사, 약 다 써봐도 1년 넘게 낫질 않을 정도란다. 발병 당시 그는 전교조, 민예총, 지역 운동에 학교 일, 원고 마감, 방송 일까지 한꺼번에 너무 여러 가지 일을, 그것도 너무 잘하려고 애쓰며 살았다.

“심신이 무기력하니 제자들에게 활기찬 수업을 해주지 못하겠더군요. 몇 번의 휴직 끝에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요. 이 집에 있다 보면 온종일 새소리를 들으며 사는데 한번은 새 한 마리가 처마 끝을 빙그르르 날면서 ‘선생님, 선생님’하더라구요. 영락없이 그 소리예요. 그러면 ‘아 왜 자꾸 불러 임마’ 하고 대꾸를 하지요. 아마 제자들 생각이 나서 그렇게 들리는 건지….”

시인은 자연 치유의 힘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건강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얼마 전 있었다는 에피소드로 답을 대신한다. 하루는 장미농원을 하는 친구가 장미꽃을 갖다가 산방 거실에 꽂아놓았단다. 한 열흘이 지나도 꽃이 시들지 않아 기특하다 싶었다. 그렇게 20일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나도 그 모양 그대로 있더란다.

거기서 또 한 달이 지나니까 이번엔 잎이 다 지더니 새잎이 돋더라는 것이다. 해준 것이라곤 물 준 것밖에 없는데 뿌리도 없는 장미꽃대는 그렇게 석 달을 살았다. 그런 걸 보면서 ‘이 집 안에 생명을 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한다. 황토와 숲, 맑은 공기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연치유’의 힘이 내재돼 있음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큰 위안을 받았단다.

“여긴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없으니 하루 종일 조용한 가운데 새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가 없어요. 이곳에서 내 삶의 패턴도 바뀌었지요. 몸의 균형을 되찾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어요. 그전에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삶이었다면 이제는 평온한 속도, ‘느림’을 실천한다고 할까요. 이곳에서 지내면서 무엇보다 많이 변한 것은 마음의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입니다. 빠른 속도의 삶은 병든 삶이요, 느린 속도의 삶은 건강한 삶, 조용한 삶은 거룩한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산방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찬사일색인 손님에게 시인은 산방에서 겨울을 나는 혹독함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봄, 여름, 가을은 더없이 아름답고 평온하지만 겨울이 되면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한다.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심야전기만 들어오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나무를 직접 해다가 벽난로에 불을 지펴야 한다. 한파가 몰아치면 수도가 꽁꽁 얼기 일쑤지만 산길이 얼어버리면 수리하는 사람도 들어오질 못하니 꼼짝없이 며칠씩 물도 없이 지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땐 눈을 퍼다가 녹여서 끼니를 끓여먹곤 한단다. 겨울엔 그 혹독한 추위에 정신이 다 가팔라지지만 그런 것도 작가에게는 필요한 시간이라 여기고 견딘다.

“식구들도 종종 다녀갑니다. 큰아이는 군대 가 있고 작은 아이는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있어요. 또 한 분(아내)은 직장 다니시고….(웃음) 외롭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외롭게 보내는 시간도 작가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초여름 산방의 햇살을 즐기고 있자니 어느덧 점심때가 다 됐다. 시인은 늘상 먹는 대로 텃밭에서 나물 뜯어다가 비빔밥 정도 대접할 수 있다고 일어선다. 연못 위로 난 비탈길을 따라 몇 발자국 올라가니 소담스럽게 가꾼 자그마한 텃밭이 나온다. 쑥갓이며 아욱이며 상추며 고추며 하는 푸성귀들이 옹기종기 자라고 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 마냥 여리고 부드러운 푸성귀들을 따다 열무김치며 오이무침 따위와 함께 섞어 커다란 양푼에 참기름을 넣고 쓱쓱 비볐다. 시내에선 맛볼 수 없는 무공해 비빔밥은 소박하지만 한편 호사롭다. 밥값하겠다고 텃밭에 나가 잡풀을 뽑고 설거지도 뚝딱 하고 나니 손님에게도 산방은 내집처럼 친근하다.

마음속의 풍랑이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로 가는 길

시인은 듣던 대로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기야 1백만 명의 심금을 울린 ‘접시꽃 당신’의 시인이 아닌가. 결혼 3년 만에 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내고 가슴 저릿한 사부곡을 시로 노래한 것이 벌써 20년 전 일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은 후 자신마저 병마와 싸우면서 시인은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가 아파서 이를 하나 뺀다고 할 때 처음에는 빼기가 싫죠. 빼고 나면 별거 아니에요. 아, 이게 내 것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내 몸의 하나하나가 다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걸 주신 분이 달라고 하면 다시 드려야 되는 것…. 그것이 다리 한 쪽이 됐든 몸통이 됐든 내놓으라고 하면 그때는 전체라도 다 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그 집착을 풀고 죽음 앞에서 언제든지 ‘네’하고 대답하려면 수양하고 훈련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큰 고통입니다. 하지만 의미 없이 오는 고통은 없지요. ‘죽음’에서 뭔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무엇에서도 깨닫지 못할 겁니다. 내 몸이 아플 때도 이것을 통해 내가 또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 무엇을 깨달아야 하나… 그 고민들이 이번 시집으로 묶여진 거구요.”

그의 신작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은 그가 산방에서 머물며 텃밭을 가꾸고 장작을 패고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완성했다. 지난해 2월부터 올 1월까지 ‘아름다운 가게’ 홈페이지에 매주 한 편꼴로 기증했던 60여 편의 시를 묶은 것이다. 시인은 시집 인세를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기로 했다. 수익금은 충북 민예총을 통해 베트남 평화학교 짓기 사업에 쓰일 예정이다.

시집의 제목인 ‘해인으로 가는 길’은 곧 그의 산방 생활을 의미한다. ‘해인’은 풍랑이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 불교 용어다. 말하자면 번뇌의 물결, 탐욕의 물결이 가라앉은 상태에 대한 시적 비유인 셈이다. 한편 ‘화엄’이라는 것은 조화, 어울림, 나눔, 평등의 추구를 말한다. 화엄을 추구하면 참여적인 삶으로 발현되기 쉽다.

“여기 오기 전에는 화엄의 삶을 지향하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해인과 화엄, 이 두 개의 삶은 별개의 것인가, 하나가 될 수 없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다가 불경을 보니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라고 써 있더군요. 두 개가 하나 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맞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성찰이 부족한 채 행동이 앞선 삶을 산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더군요.”

시인은 최근 시를 배달하는 집배원으로 나섰다.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www.for-munhak.or.kr)에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도종환의 시 배달’을 시작한 것이다. 매주 월요일 그가 직접 고른 시 한 편을 메일로 받을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좋은 시 한 편 읽으며 한 주를 아름다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시를 배달 받고 싶은 독자는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된다.

“우리 동네에 착한 집배원이 한 명 있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마을 집집마다 우편물을 배달하는데 우편물만 던져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집안 사정, 건강 상태까지 관심을 가지고 살핍니다. 바쁘게 오가는 길에 산이나 언덕에 올라 몸에 좋다는 산도라지, 칡꽃 등을 뜯어서 연로하신 어르신들 드시라고 갖다 드리기도 하구요. 산삼 뿌리 캐다가 마을 어르신 갖다 드린 것만 해도 70뿌리가 넘어요. 그걸 갖다 팔면 돈도 꽤 될 텐데 그렇게 하질 않더군요. 누군가를 향해 가는 길에 잠시 멈춰 서서 그 사람을 위해 나물을 뜯고 산삼을 캐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시인은 자신도 그 집배원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마음으로 한 편 한 편 시를 골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리라. 바쁜 세상에 내 갈 길 가기도 바쁜데 나물 뜯을 시간, 산삼 캘 시간이 어디 있냐고 혀를 차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구구산방의 느린 기운 속에서 마음 안으로 작은 깨달음이 조용히 스며들어왔다.

글 / 박연정 사진 / 김준수(프리랜서)

 

사람과 세상
[인권이 만난 사람] 산방의 배 깎는 시인
  
             

시인은 시에 매달리며 한꺼번에 몰아닥친 슬픔과 절망을 버텼다. 민족, 민중의 아픔이든 시대의 아픔이든 시인이라면 아픔에 정직해야 하는 게 우선인데 개인의 아픔에도 정직해야 한다는 문제를 고민했고, 그렇게 고민한 것들이 시가 되었다.


이곳까지 왔으니 일일랑 놓고 쉬었다나 가세요


몇 차례 비가 뿌리던 흐린 날, 오후 세시가 넘어 충북 보은의 외지고 작은 마을, 거기서도 간신히 난 좁디좁은 비포장길을 달려 시인의 산방에 도착했다. 11월 중순이니 오후 세시가 넘은 시간이란 곧 저물 녘인데 비까지 내린 흐린 날이어서 사진 촬영이 걱정스러웠다.

도착해 인사가 오가자마자 사진작가는 카메라를 들이대며 급하게 사진 먼저 찍어야 했다. 산방 뒤편에서부터 앞마당으로 도는 동안 햇살이 잠시 나와주어 다행히 그 햇살에 의지해 사진도 찍고, 떨어지고 남은 잎들만으로도 아름다운 나무들의 모습을 고운 물감이 번진 수채화처럼 감상할 수 있었다.

‘외지고 고요한 곳에 사는 이는 복이 있나니….’ 이런 문장이 저절로 떠오를만치, 시인의 산방은 꾸밈도, 위세도, 소리도 없이 풍경 속에 깊이 들어 있었다.

“이곳까지 왔으니 일일랑 놓고 쉬었다나 가세요.”
안에 들어 다탁에 마주앉자 시인의 첫마디는 이랬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런 인터뷰 일일랑 단박 파투 놓고, 시인의 산방살림 얘기와 저녁이 내리는 숲속 나무들 모습만 지켜보다 오고 싶었다.



구구산방

 

시인이야말로 그의 첫마디처럼 모든 일일랑 놓고 무조건 쉬어야 했다.

시인이 수십 년 동안 몸과 마음을 밤낮없이 일과 사람에 쏟아 부으며 한 시대를 통과해오는 동안, 신경이 혹사를 더는 견뎌내지 못하고 그를 쓰러뜨린 거였다. 시인 자신도 처음 들어보았다는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병명. 한번 쓰러지고 난 뒤부터는 면역력이 떨어져 잔병이 걸리더라도 낫지 않는다. 아무리 약을 먹고 병원을 다녀도 그로 인해 생긴 다른 질환들이 낫지를 않는다. 도리 없이 세상의 일을 무조건 놓고 이곳에 들어와야 했다. 자연을 호흡하고 자연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기 4년. 자연치유의 힘 덕분으로 4년 전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우리 심신의 병이란 너무 빠른 속도로 사는 데서 온다고 본다며, 자신이 쓰러진 것도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산방의 처음 주인이 거북처럼 오래 산다는 의미로 지은 구구산방이라는 이름을 그는 느리게 느리게 살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구구산방에 들기 전, 시인은 해직교사에서 10년 만에 복직하여 중학교 아이들과 연애하듯이 5년 동안 함께했었다. 복직해 처음엔 아이들과의 괴리로 갈등했지만, 나중엔 그 학교가 EBS에서 주는 ‘제 1회 신나는 학교 상’을 받으며 함께한 프로그램들이 다른 학교에도 소개되는 보람과 성과, 기쁨이 있었다. 이제 퇴직한 지금 그 5년이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된 셈이다. 시인과 선생님이라는 인생의 두 큰 길이었는데, 양보한다면 어느 쪽을 양보하고 싶으시냐고 물었다(시인이 그 둘 중 어느 쪽도 양보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학교는 이제 그만뒀으니 그쪽에 할 일은 없고, 시 쓰는 일을 더…, 시를 잘 써야겠지요.”


시인은 산속 생활은 겨울이 문제여서 땔감 준비가 큰일이고, 보일러가 얼어 터져 물도, 불도 안 들어올 때가 많다며 다가온 겨우살이 걱정도 내비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건강이 회복됐고, 올겨울엔 시 쓰기에 집중하며 미뤄둔 산문도 마무리할 것이라고 했다. 시인의 구구산방에는 텔레비전과 신문은 없지만, 전화와 노트북은 두고 있다. 또 클래식 음악을 즐기므로 오디오를 두고 있다.

접시꽃 당신

시인 도종환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그의 두 번째 시집 「접시꽃 당신」.
32세 때 시인은 아내를 잃었다. 생후 4개월 된 갓난아기와 두 돌 된 어린 아이를 남기고 아내는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죽음이란 한참 뒤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던 삼십대 초반. 갑자기 덮쳐온 아내의 죽음도, 짧은 사랑도, 남은 두 어린 아이도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 대한 책임, 아이들에 대한 책임, 어떻게든 눈앞에 닥친 이 상황을 추슬러야 했다. 다행인지 어쩐지 그런 상황을 추스르게 해준 것이 시였다.

1985년 8월 아내와 사별, 그해 12월 동인지 「분단시대」에 ‘접시꽃 당신’ ‘암 병동’을 비롯해 5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런데 이 시들이 문제가 되어 시 구절에 빨간색 밑줄이 그어지고, 장학사에게 불려가 “이것이 의미하는 속뜻이 무엇이냐”는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 일로 시인은 옥천의 벽지 학교로 쫓겨 갔다. 당시 시인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정적으로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시기였는데, 어미도 없는 아이 둘을 부모님께 맡기고 벽지로 쫓겨 가야 했으니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도대체 그렇게 한꺼번에 온 슬픔, 아픔, 절망, 상실을 어떻게 견디셨느냐 했더니, “그래도 그곳 아이들이 시골아이들답게 순박하고…, 그래서…”라는, 학교의 아이들을 사랑하던 선생님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있다가 붙이는 한마디, “그때 시대가 그랬어요.”

도대체 어떤 시 구절이 그리 문제이길래 아내의 사별을 몇 달 전에 겪은, 또 남은 두 어린 아이를 돌보아야 할 아버지를 좌천시켜 벽지로 떼어놓아야 할 정도냐고, 문제 된 그 시 구절을 알려달라고 했다. 시인의 지난 상처와 아픔을 상기시키는 것 같아 송구스러워하면서.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이런 구절이 ‘접시꽃 당신’의 문제 부분이고,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 믿음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일 때도 / 우리들은 온몸 던져 싸우거늘 /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 / 참답게 산다는 것은 / 참답게 싸운다는 것 / 싸운다는 것은 지킨다는 것 / 빼앗기지 않고 되찾겠다는 것…’ 이런 구절이 ‘암병동’의 문제 부분이라는 것이다.

“아내도, 암병동의 다른 환자들도 암과 싸워 이기기를 기원하며 쓴 시였는데…, 그때 시대가 그랬어요.”
시인은 좌천돼 간 벽지 학교에서 시에 매달리며 한꺼번에 몰아닥친 슬픔과 절망을 참아내며 버텼다. 민족, 민중의 아픔이든 시대의 아픔이든, 시인이라면 아픔에 정직해야 하는 게 우선인데 개인의 아픔에도 정직해야 한다는 문제를 고민했고, 그렇게 고민한 것들이 시가 되었다. 그러다 당시 실천문학사에 있던 시인 김사인의 출판 권유에 처음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개인의 일을 쓴 걸 가지고 시집을 내느냐”며 거절했던 그 시 모음이 1986년 12월 「접시꽃 당신」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게 된 것. 뜻밖에 시집이 100만 부가 넘게 팔리며 갑자기 유명 시인이 되고 유명세를 치렀는데, 그 또한 시골학교 선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혹시 내가 아내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팔아서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이어졌고, 그 고민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위해서도 실천의 길에 들어서서 함께하며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고 했다.


시인은 교육 현장의 당사자로서 교육 현실의 오랜 모순을 변혁하고 교육민주화와 희망의 참교육을 위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이전 단계인 전국교사협의회 일에 2년간 관여했다.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되자마자 당시로서는 불법인 국가공무원법 위반 집단행동 등의 이유로 즉각 해직당하고 감옥으로 가게 됐다. 이렇게 해서 문학을 시작한 첫길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을 수십 년 동안 걸어오게 된 것.

「접시꽃 당신」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우리 삶의 근본주제에 개인적 진정성의 힘이 더해진 기념비적인 시집이다. 100만이 넘는 판매 부수로 미루어 5.18 민주화운동 이후 고통과 상처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로와 희망이 필요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인으로 가는 길

시인은 산방에 파묻힌 후, 그곳에서만 쓴 시 60여 편을 묶어 아홉 번째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을 올해 봄 펴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산방에서 “자연이 내는 소리를 그저 받아 적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쓴 시들”이라고 했다.
‘축복’이란 시에서 시인은 ‘내게 오는 모든 건 다 축복이라고,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했던 어린 날도 축복이고,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축복이고, 병든 것도 통증도 축복이고, 죽음도 시련도, 이젠 이른 봄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고, 작게라도 물결 치며 살아 있는 게 다 축복’ 이라고 산방생활의 지금을 요약해줬다. 여러 겹의 생을 돌아온 사람의 자유와 대긍정을 노래한 것이리라.



시집 출간 직후 서울에서 「해인으로 가는 길」의 출판기념회와 인세 기증식이 열렸다. 시인은 몸과 마음의 치유, 그리고 재탄생의 의미 있는 실천행으로 「해인으로 가는 길」의 초판뿐 아니라 이후 판의 인세 전부를 베트남 푸엔성의 어린이들을 위한 평화학교 건립기금으로 내놓았다. 이는 “베트남에 대한 마음의 부채도 있고, 시로 인해 생긴 이윤이 내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축복의 내면을 누리는 시인이, 다른 한편 대중의 사랑을 흠뻑 받아온 시인이 그 축복과 받은 사랑을 되돌리는 세상 사랑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 하나의 현직, 문학집배원

이제 시인은 무슨 위원회 위원장, 무슨 단체의 공동대표라는 직함을 모두 내놓고, 학교마저 퇴직하고 올 5월부터 단 하나의 현직 ‘문학집배원’으로 산다. 문학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사업의 하나인 이 일은 1주일에 한 편씩 좋은 시를 골라 감상을 붙여 직접 낭송으로 독자를 찾아가는 일이다. 좋은 시를 찾아 읽는 즐거움이 있어 좋고, 독자에게도 유익한 감상이 되도록 배달부 노릇을 잘하고 싶다고 했다. 시인은 이 시 배달부 일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해인으로 가는 길」에 묶인 시 작품은 먼저 ‘아름다운 가게’ 홈페이지 ‘시인의 선물’란에 1년간 매주 1편씩 기증한 시들이었다. 아름다운 가게 상임이사로 있는 박원순 변호사가 그에게 시인이니 시나 1편씩 기증하라 하길래 시인이 뭐 달리 내놓을 것도 없고, 그거야 어려울 것 없다고 생각해 시를 기증했던 것.

그러니 처음부터 이번 시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참, 시 기증 아이디어를 낸 박원순 변호사가 더 시인 같네요”라고 말하니 시인도 흔쾌히 웃었다. 시인을 둘러싼 동네는 가게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일이 다 아름다운 동네인가 보다.

배 깎는 시인은 눈물겨워라

처음 다탁에 같이 앉았을 때, 시인은 산야초 차와 배 한 개를 깎아 냈다. 시인이 털스웨터를 입은 등을 한껏 구부리고 또 고개를 많이도 수그리고 배를 깎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저 배 깎는 시인의 모습을 얼른 찍어요, 저걸 찍어야 해요” 하며 사진작가를 독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컷의 사진 촬영이 끝나고 시인이 말했다. “산방에 온 지인들이 내가 과일 깎고, 북엇국 끓여 밥상 차려내는 것 보면서 다들 그럽니다. 도종환이 이제 시집보내도 되겠다고, 과일 잘 깎지, 밥 잘하지, 이제 고마 시집보내 뿔자고.” 아름답고 깊은 농담이 지금 여기 있었다. 깊숙이 구부린 두툼한 털스웨터 등의 어둑신한 실루엣. 과도와 배를 모아 쥐고 깎는 저 두 손의 공손함이라니, 그 얼굴의 골똘함이라니, 온 몸태에 흐르는 조신함이라니, 몇 겹의 생을 돌아와 어둑신하게 앉아 오직 한 알 과일을 깎는 큰 누님만 같구나. 저절로 지분기(脂粉氣) 내려지고 말조차 돌아앉은 덕성의 큰누님만 같구나. 시인은 실제 4남매의 맏이이기도 했고, 수십 년 동안 세상의 큰형님 일도 책임껏 다했으니, 큰형님은 큰누님 아니런가, 또 큰누님은 큰형님 아니런가.

별, 그리고 풍경 소리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 차 타고 나가 저녁식사하자고 권했지만 시인은 귀찮다고 했다. 먹겠으면 자신의 집에서 먹어야 한다고, 인근엔 먹을 데가 없다고, 밥은 자신이 얼마든지 할 테니 먹겠으면 먹으라고 했다. 사진작가와 나는 시인의 북엇국도 궁금하고, 하여 모른 척 주저앉아 결국 시인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았다. 손님이라고 생선도 넓게 한 마리 구워냈고, 예의 북엇국도 끓여 낸 아주 괜찮은 밥상을 받은 거였다. 시인은 벽난로 앞에 앉아 자신이 방금 피워놓은 타는 장작불을 바라보다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여기 생활이 그래요…, 자기 하나 따뜻하자고 이렇게 불 때고…” 참으로 못 말리는 죄의식, 못 말리는 순결성이다. 바깥에는 춥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이 많은데 자기 한 몸 따뜻하자고 이렇게 불 때는 일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서는 여전히 불편한 사람. 어쩌면 그런 여린 마음 때문에 일과 짐을 너무 많이 져오다가 병이 난 사람인데 말이다. 판화가 이철수 씨가 구해다 밖에 매달아줬다는 풍경이 시인을 만나고 나서 댕그랑댕 처음으로 울었다. 작으면서도 맑고 또렷한 소리였다. 풍경 소리마저 다 들었다. 이젠 일어설 시간이다. 내려선 뜨락에는 시인이 많이도 좋아하는 별이 흐린 날씨에도 제법 떠올라 있었다. 오늘은 시인의 별을 시인 혼자만 줍게 놔두지 않고 이렇게 산방까지 밀고 들어와 기어코 한 줌을 빼내 가는 짱! 좋은 하루였다.


★ 이진명님은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단 한 사람>등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다.

[원재훈 시인의 작가 열전]

흙 씻어주는 ‘詩 배달부’ 도종환
“숲 속 산방에서 꽃뱀과 동거 중입니다”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시인을 만나고 오는 길에 반짝반짝한 단어들이 떠올랐다. 연필로 손바닥 공책에 이렇게 적었다. 충청도, 구룡산, 법주리, 구구산장, 살쾡이 똥, 생강꽃차, 민들레, 다람쥐와 꽃뱀, 북두칠성, 까치와 까마귀, 해인(海印), 편지, 혼혈아, 호아빈(평화), 벌레, 옥수수와 누룽지, 장작패기, 풍경, 우편집배원…. 이 단어들로 도종환 시인을 그려봐야겠다.

살다가 시가 된 사람들이 있다. 시를 읽다보면 한 인간이, 구체적인 한 인물이 시 속에서 살아 숨쉬는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다. 사랑하는 연인, 친구,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 평범하게 살았지만 비범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들…. 시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시 속에서 되살려낸다. 시 속에서 그들은 모두 한결같다. 성자와 청소부,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이 모두 한결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시는 아름다운 조화이기도 하다. 도종환(都鍾煥·53) 시인이 살고 있는 산방으로 가는 마을에서 나는 시인의 시를 몇 편 읽었다.

시집 ‘접시꽃 당신’에서부터 최근의 ‘해인으로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중적으로 이미 유명한 시인이면서도 소월의 시에 나오는 ‘저만치 혼자 피어 있는’ 꽃과 같이 살았다. 참으로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삶이다. 부러운 삶이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법주리’라는 마을 이름을 보고서 나는 무릎을 쳤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면서도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말이 그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이었다.

법주리

압구정동, 상계동과 같은 동네 지명에 익숙한 사람들은 법주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덜컥 걸린다. ‘법이 머문다’는 말은 어렵다. 법이 머무는 곳은 불가의 절이거나 암자이리라. 그리고 그곳에는 반드시 그 법을 지키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이 마을에는 시인이 그 법을 지키고 있었다. 혹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시인은 아닐까. 법주리 초입에 내려 큰 나무 아래에 잠시 머물렀다.

까마귀가 낯선 사람의 침입을 경계한다. 마치 동네사람들에게 다 알리려는 듯이 울어댄다. 개가 짖는 것 같다.

한적한 오후다. 마을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을이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는 형세였다.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청주에서 보은 쪽으로 피반령을 넘어서서 지방도 변에 위치한 법주리는 도로를 마주 보고 두 개의 큰 당나무가 있고, 그 나무 아래에 돌부처가 모셔져 있다. 법주리라는 마을 이름은 아마도 이 돌부처에 머무는 법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법주리에서 구룡산 쪽으로 난 길을 걸어간다. 혹시 도종환 시인을 찾아갈 일이 있다면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가기를 권한다. 좁은 산길을 차를 몰고 갔다가 낭패를 본 손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견인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산길이다.

시인을 만나기 전에 이미 이 마을에서 나는 한마음을 놓았다. 고속도로에서 밀리는 차량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이 이곳에서 풀어졌다. 이렇게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다 시인 덕이다. 시인은 이렇게 세파에 찌든 중생의 마음을 보듬어주었다.

마을의 초입에 있는 돌부처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배고프니 밥 주랴, 배고프니 법 주랴”

어제 낮엔 양지 밭에 차나무 씨앗을 심고
오늘 밤에 마당에 나가 별을 헤아렸다
해가 지기 전에 소나무 장작을 쪼개고
해 진 뒤 침침한 불빛 옆에서 시를 읽었다
산그늘 일찍 들고 겨울도 빨리 오는 이 골짝에
낮에도 찾는 이 없고 밤에도 산국화뿐이지만
매화나무도 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화는 매화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고요하였다

- 시 ‘산가’ 전문

 

이 시는 시인의 요즘 생활을 잘 보여주는 풍경화다. 시인의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낮과 밤, 볕과 별이 모두 시인의 품에 머물고 있다. 한 인간이 어떻게 한 우주가 되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좋은 시처럼 그가 사는 곳이 좋았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곳으로 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구구산장

“5년 전에 몸이 아파서 찾아온 곳입니다. 이곳에서 처음 1년은 그냥 쉬었지요. 병든 몸을 후배들이 떠메고 와서 던져놓은 곳이니까요. 1년이 지나자 몸이 다시 살아났어요. 마치 봄에 새 기운이 돋는 것처럼 말이지요. 사실 그동안 너무 무리했지요. 10년 만에 복직을 했으니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이런저런 강연에 TV 방송 진행까지 했으니까요. 몸이 간헐적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무시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푹 쓰러진 겁니다.”

구구산장은 거북 구(龜)자가 두 개다. 두 마리의 거북 산장이라는 뜻인데, 건축을 해준 사람이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아픈 몸을 쉬는 곳이라 거북처럼 오래 살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이지만, 도종환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산방에서 거북처럼 느리게 살라는 뜻입니다.”

구구산장은 병들고 지친 몸을 치유한 곳이다. 이제 5년째 이곳에 머문다. 청주 집에 있는 시간보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구구산장에서 머무는 시간은 거북처럼 느린 시간이다. 시인은 그 시간을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밖에 머무는 시간이 많으면 그 시간은 바쁘고 시끄러운 시간이다.

느릿느릿한 도종환 시인이 마치 거북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큰 아픔을 겪고 난 뒤에 체득한 생에 대한 겸손한 자세인가. 시인은 지인들에게 성품이 착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다. 산방 안에는 작은 서재와 책상, 그리고 벌레 한 마리가 조용히 기어 다니고 있었다. 시인은 조용히 벌레를 집 밖으로 내보내면서 말했다.

“이놈아, 여기보다 밖이 더 살기 좋아. 먹을 것도 많고.”

海印

서재를 보니 불교에 관한 책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최근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은 불교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책이다. 해인은 불경 화엄경의 한 구절인 해인삼매에서 나온 말이다. 즉, 세상을 큰 바다에 비유하고 그 바다에 이른 거친 파도와 비바람이 현세를 사는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이다. 이 번뇌망상이 멈추는 경지가 해인삼매다. 바닷물(海) 속에 떠오르는(印) 절대경지를 말한다.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불심으로 가득 찬 시집이지만, 시인은 정작 가톨릭 신자다. 이 시집을 읽은 수녀님들이 작은 토론회를 벌였다. 그 자리가 끝나자 수녀님들은 ‘그분’에게 기도했다. “주여, 도종환 시인이 개종하지 않게 하소서.”

시인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이 집터는 근처에 있는 스님에게 다녀가는 길에 발견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인연은 인연을 낳는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주인은 하느님이다. 믿는 신은 다르지만,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시인으로서 받아들인다. 시인에게 시가, 모국어가 유일신이면서 조국인 것이다.

올 2월에 나온 동화 ‘나무야 안녕’도 이곳에서 쓴 책이다. 산방의 뒷마당에 있는 작은 자두나무를 보고 쓴 것이라고 한다. 그 나무는 허리가 꺾인 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나무에서 자두가 한두 개 열린다. 지독한 아픔을 겪고 나서도 저 혼자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에서 어쩌면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아프고 나서 펴낸 모든 책은 이곳에서 썼다. 이곳에 머물며 아무 생각을 안 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겸손한 수사가 아닐까. 조용함 가운데 불타오르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이 시심(詩心)이다. 구구산장은 언어의 집인 시라고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았다. 그의 시와 글들은 산속의 풀과 나무와 짐승과 어울려 있다. 그리고 해인이라는 큰 깨달음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이문재 시인이 시집의 발문을 썼다. 그는 도종환의 시가 시인으로서의 귀환이면서 동시에 한국 시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했다. 시집에 나오는 첫 시를 인용한다. 이 시가 아마도 구구산장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다. 이 시집의 서시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이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시 ‘산가’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의 산이 보인다. 그 산에서 쓴 시는 경전처럼 내게 다가온다. 흙이 저절로 씻겨 내려가는 문장을 읽으면서 내 마음의 그 무엇도 조용히 쓸려 내려간다. 일종의 세례의식처럼 한 편의 시가 마음을 씻어준다. 마음의 얼룩은 눈에 보이지 않아 병이 들면 더 아프다. 우울증은 마음의 얼룩이 깊이 스며들어 탈이 난 것이다.

최근에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한 적이 있다. 언제 내가 아무 말 없이 하루 종일 있었던 적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가끔 시집을 읽는 동안에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말을 줄인다는 것이다. 말을 줄이고 책을 보면 그 자리에 생각이 머문다. 그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삶의 길이 보일 수도 있으리라.

법원의 등기부등본에는 구구산장이 도종환의 땅과 집으로 등재돼 있다. 그러나 막상 산에 들어가보니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헛갈렸다. 시인은 산속에 사는 산짐승들과 마당을 공유하고 있었다. 산방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흐른다. 이 물은 짐승들의 식수다. 처음에는 인간의 눈을 피해 밤중에 와서 물을 먹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시인을 빤히 쳐다보면서 아무 때나 드나든다.

살쾡이 똥

“이놈들이, 나를 인간 취급하질 않아. 허허. 이것 좀 봐요. 이 똥 좀.”

마당에서 난생 처음 살쾡이 똥을 보았다. 마당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살쾡이 똥이 있었다. 군데군데 전날 잡아먹었을 짐승의 털이 박혀 있었다. 짐승들은 오줌이나 똥으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한다. ‘여기 들어오는 놈들은 죽어’ 하는 식이다. 즉, 이곳은 자신의 영역이라고 울타리를 친 것이다.

시인은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다면서 너털웃음을 날렸다. 그는 살쾡이 똥을 치우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쾡이를 몰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동물이 사는 산속에 인간이 잠시 머무르는 것이다. 마당을 가로질러 개울가로 내려간다. 개울가로 이어지는 비탈에 꽃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산수유네?” 하고 탄성을 지르자 시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비슷하지요. 똑같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런데 저건 생강나무입니다. 나무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손님에게 차 대접을 해야지요.”

그러곤 막 돋아오르는 꽃잎을 손으로 땄다.

생강꽃잎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는 나무 탁자에 이철수 선생의 판화 글씨를 새긴 보자기가 덮여 있었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는 정호승 시인의 시 구절이었다. 이문재 시인은 이 시구로 자신의 시 엮음집의 제목을 달았다. 멀리 내다보이는 산속에 꽃봉오리가 움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 분명 꽃은 피고 또 질 것이다. 시인이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썼는지는 이미 활자화되어 있다. 책이나 글로 선생은 자세하게 심경을 토로했다.

“내게 오는 모든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지내는 동안 아침마다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나와 내 삶을 끌고 가는 것이 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의 주인도 내 몸의 주인도 아니었습니다. (중략)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분이 나의 수발을 들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욥의 말처럼 ‘주셨던 분도 그분이요 도로 가져가시는 분도 그분’이시라면 나를 세우고 쓰러뜨리시는 분 역시 그분이신 걸 알고는 그분께 다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구약의 욥은 말했다. 고통은 인생의 섭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신의 뜻이라고. 그것 역시 인생을 알기 위한 한 방편인 것이다. 오로지 안락함과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허상이다. 그래서 세상에 없는 행복한 나라가 유토피아라고 했던가.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나는 조금 전에 본, 마당에 피어 있는 민들레 이야기를 했다. 아직 풀이 돋아나지도 않았는데 넓은 마당에 딱 한 송이의 민들레가 흙 속에서 솟아올라 있었다. 귀엽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어떻게 저 무거운 땅을 뚫고서는 고개를 내밀었단 말인가. 무엇을 보고 싶어서.

 

다람쥐와 꽃뱀

시인은 산속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암자의 노스님은 된장만으로 밥을 드시는데, 산에서 난 것들을 드신 까닭인지 다리 근력이 허약한 젊은이보다 낫다. 보은이나 청주까지 수십km를 걸어서 다니신다. 노스님이 입적하시면 시인은 그 자리를 사서 산장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스님이 자신보다 더 오래 사실 것 같아 힘들지 않나 싶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산방에는 고라니, 살쾡이, 산토끼, 오소리, 다람쥐와 같은 짐승과 이제 막 솟아오른 복수초를 비롯한 생강나무, 산벚나무 등 식물이 어울려 있었다. 밤이 되면 북두칠성이 처마에 매달아놓은 풍경 끝에 걸린다. 이 모든 것 속에서 도종환의 몸과 마음은 되살아났다. 뜰에는 다람쥐와 꽃뱀이 살고 있다. 이 꽃뱀이 여름이 되면 가끔씩 방으로 들어오곤 한다. 뱀을 무서워하는 내가 이야기만 듣고도 호들갑을 떨자 웃으면서 말한다.

“뱀이 무서워요? 그러면 뱀은 사람이 얼마나 무섭겠어요. 사람이 무서운 것보다 더 무서울 겁니다. 꽃뱀이 들어오면 조용히 내보내면 돼요.”

“어라, 그럼 선생님은 꽃뱀과 같이 사시네요?”

“어, 그렇네. 허허, 내가 꽃뱀하고 살다니. 이거 쓸 때는 조심해서 쓰세요. 허허.”

‘시인 도종환, 구룡산 깊은 곳에서 꽃뱀과 살다’라는 기사 제목이 나간다면, 아마 인터넷 검색 순위 일등이 아닐까? 말이라는 게 참 우습다. 그리고 그 꽃뱀 곁에는 다람쥐가 있다. 선생은 뜰에 밤 같은 견과류를 내놓으면 다람쥐가 맛있게 먹어댄다고 말했다. 짐승과 나누고, 사람과 나누고, 시인은 무엇이든 나누어주고 있었다.

다람쥐를 보니 선생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내가 문학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사춘기 때 쓴 편지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연애편진가요?”

“허허, 아니요.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집안사정으로 저는 외가에 맡겨졌죠. 중학교 때입니다. 가난 때문이었죠. 어머니 아버지는 객지를 떠도시면서 온갖 일을 했습니다. 부모님이 그리웠고, 그 마음을 참다참다 부모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선생님 말씀이, 편지를 쓸 때는 계절인사를 잘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주위를 자세히 관찰했지요. 어떻게 인사를 드리면서 편지를 쓸 것인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날씨나 풍경을 유심히 보다보니 이것이 아마도 시인으로서의 통찰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한참 먹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이라 용돈이 필요했지만 한 번도 부모님께 돈 이야기를 쓴 적은 없습니다.

무척 외로웠습니다. 방학이 되면 부모님이 답장을 보내온 편지지 봉투를 들고 그 주소지를 찾아갔습니다. 갈 때마다 주소지가 달랐어요. 어머니는 멸치장사를 하기도 했고, 아버지는 국수틀을 돌리기도 했지요. 그 시절에 쓴 편지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저의 시였을 겁니다.”

그의 시 ‘점자’에 이 시절의 이야기를 담았다.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은, 그런 글자를 만난다. 열 몇 살 때부터 편지 앞에 수없이 썼던 글자들 겨울이면 산맥 위로 총총히 돋아나던 외로운 점자…”

이전에 인터뷰를 한 소설가 윤대녕과 김형경도 어린 시절을 친가와 외가에서 보냈다고 했다. 묘한 연결고리가 있었다. 어릴 때의 외로움이 이들 문학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편지를 쓰면서 중학생 도종환은 부모와 따뜻한 밥 한 끼 먹는 소망을 품지는 않았을까. 학교에 다녀오면 어머니가 준비한 따뜻한 밥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러한 평범한 삶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호아빈

 

도종환 시인은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청주에서 살고 있다.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사생활을 하던 중 전교조 문제로 해직됐다 1998년, 10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요즘은 작가회의 일을 하고 대학원에 강의를 나간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좋은 일에 연관돼 있다. 최근에는 안도현 시인과 ‘북한에 나무 심기 운동’을 하고 있고, 뜻있는 분들과 더불어 베트남에 호아빈 학교를 설립하는 데 열심이다.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의 인세는 모두 이 학교에 투자된다.

 

호아빈은 베트남어로 평화라는 뜻이다. 왜 베트남의 어린이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시인은 치열한 현실참여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구산장에서 자신의 병든 몸을 돌보면서도 ‘내가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반성을 한다. 뭔가 개운치 않다는 것이다. 이 마음은 ‘나 하나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삶’이 아닌가 하는 자성의 시간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그가 말했듯이 이러한 시간 속에서 더 가치 있는 의무를 분명히 만나게 될 것이다.

시인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혈아 차별에 대해 우려의 말을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지역만 봐도 엄마 10명 중에 4명이 외국인입니다. 농촌 총각들이 국내에서 배우자를 구하지 못해 동남아시아 각지의 처녀들과 결혼을 한 거지요. 그런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겁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면서 온갖 차별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태어난 나라에서 소외되고 있는 거지요.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조만간 사회 문제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알제리 청년들의 폭동 문제는 먼 유럽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닥칠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교육을 올바르게 한다면 앞으로 이들이 비뚤게 성장해서 일으킬 수 있는 일로 말미암아 치를 사회적 비용이 줄어들 것입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인간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가 돼야지요. 이들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즉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한 인간이 성숙하듯이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는 다양성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지난 시절 우리는 도시화 과정 속에서 발생한 도시빈민 문제, 철거민 문제, 점점 더 극악해지는 빈부격차 등 각종 사회현상을 보아왔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병리현상을 진단하고 고발하는 문학과 그것의 치유방법을 찾는 행동하는 지식인들의 희생 아래 이만큼이라도 사는 꼴을 갖춘 것이다. 혼혈 아이들을 차별대우하고 소외시키는 행위는 반드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교육자와 시인이기 이전에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 현상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추진하고 있는 것이 베트남의 학교 설립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이 결국은 조직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구구산방에서 기력을 회복한 시인은 이제 더 큰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 있는지도 모른다.

옥수수와 누룽지

스콧 니어링에게 바치는 시를 쓴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스콧 니어링 역시 미국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거세게 저항하다,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버몬트에서 ‘땅에 뿌리박은 삶’을 산 인물이다. 도종환 시인 역시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대를 살고 있다. 니어링에 대해서는 이심전심으로 뜻이 통하는 사이 같았다. 그것은 아마 영혼의 교감일 것이다.

“시에도 썼지만 생의 후반기에 그를 알게 돼 무엇보다 기쁩니다. 그는 균형 잡힌 인격의 소유자였지요. 어쩌면 그는 이 숲 속의 별밭에서 숨쉬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지금도 자아의 완성을 향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자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스콧 니어링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현실참여에 누구보다도 앞장선 사람이었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또 다른 삶의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진정한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살아낸 사람들이다. 자연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곳이 아니다. 어쩌면 그곳이 진정으로 인간이 살아야 할 현실인지도 모른다. 고단한 삶을 피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옥수수와 누룽지를 먹었다. 식은 밥을 프라이팬에 올려 누룽지를 만드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유안진 선생이 놀러 오셨다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한 것이라고 한다. 고소하고 바삭한 게 별미다. 산속이라 간식거리가 마땅치 않아서일까, 누룽지 맛이 각별했다. 옥수수는 지난 여름에 수확한 것을 냉동실에 저장했다가 가끔씩 쪄 먹는다. 옥수수 알을 뜯어 먹으면서 가까이 있다는 암자에 가서 노스님을 뵙고 싶었지만 이미 날이 저물어 다음에 가기로 하고 마당으로 나갔다. 시인이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여기 풍경에 달려 있던 쇠 물고기 찾아봅시다. 지난 겨울 바람에 어디론가 날아갔는데 도대체 찾을 수가 없네.”

산방에 달려 있는 풍경은 이철수 화백이 선사한 것이다. 종에 물고기가 달려 있는데, 그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쇠 물고기가 흔들리면서 소리를 내는데 그것이 없어졌다. 둘이 마당과 비탈을 다 뒤졌지만 결국 찾을 수가 없었다. 산짐승이 물어간 것일까?

지난 여름에 심어놓은 고추밭을 같이 정리하면서 말라버린 고추대를 뽑아냈다.

“이 고추대를 보니까 생각나는데…혹시 마을에 들어올 때 까치나 까마귀가 울어대지 않던가요?”

그렇다고 하자 시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새대가리라는 말이 있지요. 그건 완전히 인간의 오만이에요. 새들이 얼마나 영리한데요. 그리고 감정도 있어요. 근처 마을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이 까마귀 한 마리를 죽였는데, 까마귀들이 바로 보복을 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고추 모종만 모조리 뽑아내버렸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수군댔지만, 그놈들도 알 건 다 안다는 겁니다. 새가 고추 모종을 뽑아내는 일은 어쩌면 지구의 환경 문제와 비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난개발을 해대다가는 언젠가는 우리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지요. 지구 온난화 같은 조짐은 전주곡일 겁니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이런 산속도 폐허로 변할지 모르지요. 끔찍하지요.”

뒷마당에 있는 장작더미로 갔다. 실내에서 타오르는 장작은 여기서 패 들이는 것이다. 지도를 받아 몇 번 도끼질을 했다. 서툴게 몇 개비의 장작을 쪼갰다. 시는 어쩌면 이렇게 장작을 쪼개듯이 한 방에 삶의 중심을 갈라버리는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제대로 겨냥해서 한 번에 장작이 쪼개지면 황홀한 기분이 든다. 다시 마당으로 나아가 겨우내 보온을 위해 스티로폼으로 친친 동여매놓았던 수도를 손보았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물이 콸콸 나온다. 이제 봄이다.

시를 배달하는 사람

요즘 나는 시 한 편을 읽으면서 일과를 시작한다. 도종환의 ‘시배달’이라는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도종환은 우편배달부처럼 아침마다 시를 배달하고 있다. 어떤 날, 한 편의 시가 마음에 들어오면 내가 시인이었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한다. 시를 읽고 자극을 받아 낙서와 같은 시를 써보기도 한다. 물론 지워버리거나 휴지통에 버리는 일이 더 많다. 그러나 그가 배달하는 시를 받아보고 나서 꼭 하나 하는 일이 있다.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는 것이다.

‘아침에 휴대전화를 켜기 전에, 컴퓨터 모니터를 켜기 전에 시 한 편을 읽으라’는 이문재 시인의 메시지는 사람의 삶을 여유하려는 노력이다. 시는 짧지만 그 여운은 오래 간다. 어떤 어수룩한 소년은 소월의 시 한 편을 읽고선 평생 시를 쓰겠다는 결심을 한다.

장작을 패고 나서 산방에 앉자 수고했다면서 산삼주를 한 잔 따라주었다.

“여기 다니는 우편집배원이 주고 간 산삼이에요. 그 사람은 심마니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양반은 산삼을 돈 받고 팔지 않아요.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몸이 아픈 이가 있으면 그냥 준다는 거예요. 내게도 한 뿌리 주었는데 그 산삼으로 술을 담근 겁니다.”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살게 마련일까? 이 마을의 우편집배원은 귀한 산삼을 아픈 사람들에게 그냥 주었다. 도종환 선생은 요즘에 시를 배달하는 집배원이다. 그것은 한 뿌리의 산삼처럼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산방에서 나와 산길을 바라보았다. 등 뒤로는 마을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깊은 산에도 길은 있다.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 길, 사람의 발길이 다듬어놓은 산길. 그 길을 집배원도 다니고, 도종환도 다니고, 나도 다닌다. 이제 피반령을 넘어 다시 서울로 가야 한다. 어둑어둑해지는 산길을 걸으면서 그의 시를 떠올렸다.

돌아보니 산은 무릎까지 눈밭에 잠겨 있다
담채처럼 지워져 희미한 능선
내려와서 보니 지난 몇십 년
저런 산들을 어찌 넘었나 싶다
회인 지나면 수리티재 또 한 고개
그러나 아무리 가파른 산도
길을 지나지 않는 산은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멀리 서서 보면 길보다
두려움이 먼저 안개처럼 앞을 가리지만
아무리 험한 산도
길을 품지 않는 산은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길은 언제나 바로 그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는 걸

- 시 ‘피반령’ 전문

시인은 시를 먹고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말 배고프듯이 시가 고플 때가 있다. 이것은 마치 쇼핑 중독자가 쇼핑을 하는 것과 비슷한 심경이다. 시가 고프지 않은 사람들도 다른 영혼의 양식을 찾아 헤맨다. 그것이 시가 됐건, 성경이 됐건, 우리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영적인 어떤 것을 찾는다. 그것은 산속에 있는 것도, 바다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다.

원재훈
196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등

한나절이었지만, 도종환 시인을 만나고 오는 길에 나는 깊은 숲 속에서 잠시 머물다 온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어쩌면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길을 보고 온 것일까.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쓰든 간에 이제는 그 깊숙한 길을 열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찬 방에 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패면서도, 나무 쪼개지는 소리에 다람쥐 고라니 같은 짐승과 어제 심은 강낭콩과 감자가 불편해할 것 같아 도끼질을 멈춘다는 도종환 시인. 인간관계에서도 이러한 배려가 있다면 인간은 지금 살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낙원을 만들어 살 것이다.

 

 

 

“마음 움직이는 ‘문학의 힘’ 확인”

‘이메일 배달 1년’ 묶어 낸 문학집배원 도종환 시인

 

 

한겨레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도종환 시인
“일주일에 시 한편 읽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잠자는 시간까지 부족한 바쁜 세상에서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비 오는 날 비에 관한 시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의 삶의 질은 차이가 크게 날 겁니다.”
 

지난해 5월부터 지난 4월까지 1년 동안 월요일마다 시 한편씩을 이메일로 배달했던 도종환(53) 시인이 그동안 배달했던 시를 책으로 묶어 냈다. <문학집배원 도종환의 시배달-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창비)의 출간을 기념해 14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시를 읽고 독자들이 보낸 답메일을 보면 정서적으로 극명한 울림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어버이날 한 독자가 ‘시를 들려줬더니 엄마가 울었어요’란 메일을 보낸 걸 보고 문학이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고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에서 시작한 ‘문학집배원 도종환의 시배달’은 지난 1년 동안 온라인의 30만 독자들에게 도 시인의 ‘울림’을 배달했다. 도 시인은 “대구교육청에서는 2만명이 시를 배달받아 학생들과도 함께 감상했다”며 “수치상으로는 30만명이지만 이렇게 시를 나눈 사람들을 생각하면 실제로는 더 큰 울림”이라고 했다.

시집에는 도 시인이 직접 고르고 해설을 붙여 보냈던 시인 52명의 시 52편이 실려있다. 김선우·이원규·김사인·정우영 시인 등 자신의 시를 직접 낭송한 15명 시인과 아나운서, 연극배우 등의 시낭송을 듣고 그동안 제작된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시디도 함께 나왔다.

도 시인은 지난 1989년 전교조활동으로 해직된 지 10년만에 복직해 부임했던 충북 진천 덕산중학교에서도 월요일 아침마다 시를 프린트해 담임 선생들한테 나눠줘 학생들이 읽게 했던 ‘시 배달부’ 인연이 있다.

그는 “처음에 5000명에서 시작해 독자들이 30만명까지 많아지는 걸 보니 그냥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시 안 읽는다고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앞으로도 사람들이 시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획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학집배원 코너는 얼마전 안도현 시인과 성석제 소설가가 바통을 넘겨받아 이어가고 있다. 안 시인은 월요일마다 시 한편을, 성 소설가는 목요일마다 문장을 골라 신청자들에게 배달한다. for-munhak.or.kr에서 신청할 수 있다.

 

 

글·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pearl@hani.co.kr

사진·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anaki@hani.co.kr

 

 

 

도종환 시인을 찾아서

 

 

 

오늘의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돌풍을 동반한 비가 오겠다고 하고

어디라할 것 없이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고 하는 방송을 듣고

미리 겁을 내어 비옷까지 챙겼다.

 

홍명희 시인이 도종환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했던 것이다.

 

청주를 거쳐 보은가는 두산 삼거리에서 꺾어져

피반령고개를 넘고, 쌍암재 고개를 다시 넘으니 법주리 이정표가 나온다.

 

 

 

 

장화를 신고 도종환 시인이 마중나왔다.

 

 

아담한 황토집이다.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시인을

오늘은 가까이 할 수 있어 한껏 행복하여 두리번 거린다.

 

 

가마솥 걸려있는 아궁이를 보니 마치 고향집에라도 온 느낌

 

 

입구에는 龜龜山房이란 당호가 걸려있는데

거북이같이 장수하고 느릿하게 살라는 뜻이 담겼다.

 

 

 

집안에 들어서면 발로 칸을 막은 주방이 보이고

 

 

옆에 자리한 벽난로가 격을 높인다.

 

 

천장은 또 어떻구...

 

 

벽의 그림조차 태고를 연상시키는 상형문자(?)

 

 

 

집필실을 기웃거렸다.

"선생님도 돋보기를 끼십니까?"

"네.."

"그러면 돋보기를 끼고 집필하시는 모습 찍고 싶은데요."

"에구...그건...싫습니다."

 

손을 저으며 거절하시는 모습이 또 천진하여 우리는 웃었다.

한 사람으로 하여 우리 모두는 즐겁게 웃었다.

 

 

 

아! 저거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

 

장로 수보리가 부처님께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응당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오리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네 이제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일러주리라."

하신 그 대목의 글귀이다.

 

도종환 선생님께서는 가톨릭신자인데

불교도 공부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문학을 하려면 불교를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하고 오히려 묻는다.

 

 

 

홍명희씨가 준비해온 점심을 차리는 동안

나는 도종환 시인하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4년의 칩거가 지루하지 않았느냐

겨울엔 어떻게 지냈느냐

사람이 그립지 않았느냐는 둥....

 

 

시덥지 않은 질문을 해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조용하고 다정하게 응답해주는 도종환 시인

 

 

밥상머리에서 감탄한 일 하나-

내가 수저 들고난 다음 수저를 드는 시인의 모습에서

長幼有序를 보았다. 예의바른 그의 태도를 엿본 것이다.

 

밭의 무공해 상추며 풋고추를 따다가 쌈싸 먹고나서

도종환 시인이 뒤늦게 술 한잔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데

내 어찌 마다할까? 더구나 귀한 산도라지술인데....

 

 

병뚜껑에는 이런 글씨가 씌어있다.

               

                 -2005.8.27 토 20시

                 정말로 깊은 산속에서 캐냈음

                 늘 건강하시기를- 

 

도종환 시인을 사랑하는 이웃이 담근 술인데

어찌 우리가 다 마시랴. 미안해서이기도 했지만

식후에 배가 부르기도 해서였다.

 

차맛 같은 은은함에 조용히 다가서는 술 기운이 있기는 하지만

술꾼(?)인 나에게는 未及했다. 그래도 특별한 술이어서 좋았다.

 

 

홍명희씨의 차분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문학을 하게 된 동기는..?'

 

집이 가난해서 돈 안드는 사범대학에 가기로 했죠.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당치도 않은 일이라서

선택권도 없이 무조건 돈 안드는 과인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한 거였습니다."

 

"첫 부임지는...?"

옥천 청산고등학교

 

"선생님께서 시낭송을 하실 때 꽤 수줍어하시던데요.."

그거 촌스러워 그런거고, 누구나 단상에 오르면 그래지는 거 아닙니까?

 

 

저렇게 즐거워 파안대소하시는 분이

혼자일 때, 어떤 표정으로 온종일을 지낼까 궁금하다.

 

나도 얼마 전, 2주간 산에 있어봤지만

묵언하고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더러는 사람하고 대화도 하고 싶고 웃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

사람은 때로 실없는 이야기도 하고

시원스레 웃으며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유리창 밖에서 안을 드려다보았다. 그도 재밌다.

 

 

 

 

 

 

 

비가 그쳤다.

마당에 나와 잔디를 밟으니 보드랍다.

 

 

 

"이제 선생님 곁에는 선녀만 있으면 됩니다"

"아닙니다. 선녀보다 나뭇꾼이 필요합니다.

 나무를 해야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크게 웃었다.

 

 

"적적하신데, 개라도 기르시면 어떻겠습니까?"

"길러봤지요. 산짐승이 내려오고, 메가 날아와서 닭을 잡아가기도 하고....."

 

 

 

 

 

마당의 잔디가 비온끝이라 훌쩍 자란 느낌인데

도종환 시인은 광에서 낫을 들고 나온다.

잔디를 깎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헤어져야할 시간이라는 걸 느꼈다.

 

 

"저희들 이제 가겠습니다"하니

그때서야 몸을 일으키는 도종환 시인

 

문학하는 사람들은 그저 눈만 마주해도 정겨운데

함께 먹고 마시며 대화하였으니 어찌 정감이 오가지 않으리.

 

앞으로 집필하시겠다던 시와 관련된 이야기와

4년간의 이야기가 출간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돌아오는 길에 피반령에서

6.25때 격렬한 전투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 쉬었다 가라"는 팻말을 써 놓은 할아버지는

사람이 그리웠던지 우리에게 별에별 얘기를 다 들려주었다.

 

 

피로해서 먼저 간다는 홍명희씨를 두고

우리는 시원한 맥주 한잔씩을 하고 헤어졌다.

 

이제부터 인터뷰를 정리할 홍명희씨의 수고를 생각하면

공연히 미안해진다. 우리만 즐기고 고생은 홍명희씨가 하는 것 같아서.

 

안전운행을 하신 이수호씨 수고하셨고

푸짐하고 맛있는 점심 준비한 홍명희씨도 수고 많았습니다.

 

두고두고 오늘을 잊지 않겠습니다.

 

 

- 그대 그리고 나

 

도종환 시인을 찾아서

 

 

 

오늘의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돌풍을 동반한 비가 오겠다고 하고

어디라할 것 없이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고 하는 방송을 듣고

미리 겁을 내어 비옷까지 챙겼다.

 

홍명희 시인이 도종환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했던 것이다.

 

청주를 거쳐 보은가는 두산 삼거리에서 꺾어져

피반령고개를 넘고, 쌍암재 고개를 다시 넘으니 법주리 이정표가 나온다.

 

 

 

 

장화를 신고 도종환 시인이 마중나왔다.

 

 

아담한 황토집이다.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시인을

오늘은 가까이 할 수 있어 한껏 행복하여 두리번 거린다.

 

 

가마솥 걸려있는 아궁이를 보니 마치 고향집에라도 온 느낌

 

 

입구에는 龜龜山房이란 당호가 걸려있는데

거북이같이 장수하고 느릿하게 살라는 뜻이 담겼다.

 

 

 

집안에 들어서면 발로 칸을 막은 주방이 보이고

 

 

옆에 자리한 벽난로가 격을 높인다.

 

 

천장은 또 어떻구...

 

 

벽의 그림조차 태고를 연상시키는 상형문자(?)

 

 

 

집필실을 기웃거렸다.

"선생님도 돋보기를 끼십니까?"

"네.."

"그러면 돋보기를 끼고 집필하시는 모습 찍고 싶은데요."

"에구...그건...싫습니다."

 

손을 저으며 거절하시는 모습이 또 천진하여 우리는 웃었다.

한 사람으로 하여 우리 모두는 즐겁게 웃었다.

 

 

 

아! 저거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

 

장로 수보리가 부처님께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응당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오리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네 이제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일러주리라."

하신 그 대목의 글귀이다.

 

도종환 선생님께서는 가톨릭신자인데

불교도 공부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문학을 하려면 불교를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하고 오히려 묻는다.

 

 

 

홍명희씨가 준비해온 점심을 차리는 동안

나는 도종환 시인하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4년의 칩거가 지루하지 않았느냐

겨울엔 어떻게 지냈느냐

사람이 그립지 않았느냐는 둥....

 

 

시덥지 않은 질문을 해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조용하고 다정하게 응답해주는 도종환 시인

 

 

밥상머리에서 감탄한 일 하나-

내가 수저 들고난 다음 수저를 드는 시인의 모습에서

長幼有序를 보았다. 예의바른 그의 태도를 엿본 것이다.

 

밭의 무공해 상추며 풋고추를 따다가 쌈싸 먹고나서

도종환 시인이 뒤늦게 술 한잔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데

내 어찌 마다할까? 더구나 귀한 산도라지술인데....

 

 

병뚜껑에는 이런 글씨가 씌어있다.

               

                 -2005.8.27 토 20시

                 정말로 깊은 산속에서 캐냈음

                 늘 건강하시기를- 

 

도종환 시인을 사랑하는 이웃이 담근 술인데

어찌 우리가 다 마시랴. 미안해서이기도 했지만

식후에 배가 부르기도 해서였다.

 

차맛 같은 은은함에 조용히 다가서는 술 기운이 있기는 하지만

술꾼(?)인 나에게는 未及했다. 그래도 특별한 술이어서 좋았다.

 

 

홍명희씨의 차분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문학을 하게 된 동기는..?'

 

집이 가난해서 돈 안드는 사범대학에 가기로 했죠.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당치도 않은 일이라서

선택권도 없이 무조건 돈 안드는 과인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한 거였습니다."

 

"첫 부임지는...?"

옥천 청산고등학교

 

"선생님께서 시낭송을 하실 때 꽤 수줍어하시던데요.."

그거 촌스러워 그런거고, 누구나 단상에 오르면 그래지는 거 아닙니까?

 

 

저렇게 즐거워 파안대소하시는 분이

혼자일 때, 어떤 표정으로 온종일을 지낼까 궁금하다.

 

나도 얼마 전, 2주간 산에 있어봤지만

묵언하고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더러는 사람하고 대화도 하고 싶고 웃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

사람은 때로 실없는 이야기도 하고

시원스레 웃으며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유리창 밖에서 안을 드려다보았다. 그도 재밌다.

 

 

 

 

 

 

 

비가 그쳤다.

마당에 나와 잔디를 밟으니 보드랍다.

 

 

 

"이제 선생님 곁에는 선녀만 있으면 됩니다"

"아닙니다. 선녀보다 나뭇꾼이 필요합니다.

 나무를 해야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크게 웃었다.

 

 

"적적하신데, 개라도 기르시면 어떻겠습니까?"

"길러봤지요. 산짐승이 내려오고, 메가 날아와서 닭을 잡아가기도 하고....."

 

 

 

 

 

마당의 잔디가 비온끝이라 훌쩍 자란 느낌인데

도종환 시인은 광에서 낫을 들고 나온다.

잔디를 깎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헤어져야할 시간이라는 걸 느꼈다.

 

 

"저희들 이제 가겠습니다"하니

그때서야 몸을 일으키는 도종환 시인

 

문학하는 사람들은 그저 눈만 마주해도 정겨운데

함께 먹고 마시며 대화하였으니 어찌 정감이 오가지 않으리.

 

앞으로 집필하시겠다던 시와 관련된 이야기와

4년간의 이야기가 출간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돌아오는 길에 피반령에서

6.25때 격렬한 전투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 쉬었다 가라"는 팻말을 써 놓은 할아버지는

사람이 그리웠던지 우리에게 별에별 얘기를 다 들려주었다.

 

 

피로해서 먼저 간다는 홍명희씨를 두고

우리는 시원한 맥주 한잔씩을 하고 헤어졌다.

 

이제부터 인터뷰를 정리할 홍명희씨의 수고를 생각하면

공연히 미안해진다. 우리만 즐기고 고생은 홍명희씨가 하는 것 같아서.

 

안전운행을 하신 이수호씨 수고하셨고

푸짐하고 맛있는 점심 준비한 홍명희씨도 수고 많았습니다.

 

두고두고 오늘을 잊지 않겠습니다.

 

 

- 그대 그리고 나

 

 

 

 

 

 

출처 : 들꽃 향기
글쓴이 : 세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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