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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ocaust

수로보니게 여인 2018. 12. 25. 21:16

홀로코스트

이는 남은 자의 고뇌, 슬픔, 운명 따위의 명사와 그 어떤 형용사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언어이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허무주의적 독백도 아니다.

 

 

 

 

'제이 세계 대전 나치 독일 저지른 유대 대학살'이라는 사전적 의미만은 더욱 아니다.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인 자들보다 더욱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이지 않고는 멸종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어느 산상에서 울려 퍼지던 성자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원치 않는 죽음의 심부름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느 소년의 독백이고 부르짖음이다.   

 

아니, 차라리 '홀로 살아남아 미쳐버린 자의 외침이다'라고 정정하겠다.

 

 

 

궤도를 벗어나 달리며 써가는 미친 인간 역사의 진로를 바꾸기 위한 하나님의 직능,

그것을 행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이의 메스꺼움…

 

 

 

그 미친 인간이 자신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있는지 없는지, 제복을 입었을지를 생각하다,

하나님은 저항 운동의 일원이며 테러리스트의 일원일 뿐이라고 읊조리며 살인하는 이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그의 신앙 고백은 무수한 의문만 던져 놓은 채, 짐승의 그것에서 인간과 함께 전락한 하나님의 성품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는 날의 시작(자정)이 되자,

'자정은 死者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지.

그리고 여호와의 신전이 파괴되었음을 슬퍼하며 흐느끼는 시간이구.

또 인간이 자기 존재의 깊이를 재야하고 폐허에서 여호와의 신전을 찾아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지.

흐느껴 우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자들……'이라고 독백한다.  

 

    이는 "산 사람들 속에서 죽은 사람들의 使者가 되어야 했던 이의 신념"(본서 299쪽)이고 신앙이다.

 

  그런 그를 성자라 일컫는 이에게, '어떻게 그런 농담을……'이라며 웃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성자는 웃지도 않고, 성자는 다 죽었다라고.  

그렇기에 웃기도 하고 더욱이 살아있는 자신은 성자가 아니라고.

자신은 죽었다는 생각에 음식을 먹을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울음을 울 수도 없었다고.

자신이 죽은 것을 보았고, 다만 살아있는 것은 꿈속에서 그렇게 상상한 때문이라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참된 자아는 '거기'에 있다고 믿고,

다만, 뱀이 벗어 놓은 허물(본서 302쪽)일 뿐이라고 자신을 규정한다.    

 

그렇게 죽은 자로 살던 그가 열두 살 때 수술대에서 만났던 하나님을 기억해 낸다.

거기서 소년은 이스라엘의 모든 현자들을 골머리 앓게 했던 질문들을 하나님께 여쭙기로 생각하고,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지, 구원의 날은 언제인지를 물으려 하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던 때.

 

그런 생각이 방자하다며 일어나는 혼란을 쫓아버리기 위해서 언제 선이 악을 정복하게 될까요? 질문을 꺼내려 하지만,

말이 목구멍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던 때.

 

그때 하나님께서 소년의 모든 질문과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도 답변을 주시던 때의 모순되지 않은 하나님의 언어와 침묵.

절대적이고 순수했던 하나님이 말하는 동안의 절대적 침묵에 자신의 모든 의문의 답을 얻고 돌아올 때.

 

몇백 년을 걸어도 이르지 못할 거리에 계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들어 데려다주던 두 천사가 소년의 팔을 붙잡고 돌려보내 주며,

이 사람이 아까보다 무거워졌다는 한 천사의 말에,

다른 천사가 이 사람은 지금 아주 중요한 대답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라는 말을 주고받던 그때.

꿈까지 꾸며 자던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수술을 받고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려 그 말씀을 떠올리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눈물을 펑펑 흘리던 그때.

 

아파서 울고 있는 거니?’라고 묻는 이들에게 방금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그분이 나에게 하신 말씀을 하나도 기억할 수가 없어요라고 하자 수술을 집도한 사촌의사는 웃음을 터뜨리며,

네가 원한다면 다시 잠자게 해 줄 수 있지.

그러면 하나님께 다시 말씀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 테니까라며 웃고 소년은 울기만 하던 그때.

 

그때의 하나님을 교통사고로 수술대 위에 깊이 잠들어 있을 때는 만나지 못했다며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마음을 따라가 본다.

 

죽은 자와 산 자의 혼란 끝에서 비로소 인생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기도 한다.

한 여자의 사랑과, 모든 철학의 위협을 받지 않는 한 의사의 우정에 의해.

 

그리고 그는 짐짓 인류의 진보와 그 행복과 성취에 기여할 수 있도록 영구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복잡하고 과장된 말, 추상적인 표현을 빌어 정열적으로 이야기한다.

생명보다 더 신성한 것, 더 건전하고 더 위대하고 더 고귀한 것은 없으며 생명을 거부하는 것은 죄악이고 미친 짓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명에 순응해야 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337)고 그를 살려낸 의사 앞에서 말한다.

 

의사는 자신의 신념이 그를 살렸다고 기뻐하지만,

그는 나는 그가 암기하고 있는 원문을 암송해준 것뿐이다라며 죽은 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린 누이동생과 어머니가 수천 명의 동족과 함께 아궁이에 던져져 불타고 있는 화장장에서,

시커먼 연기가 똘똘 감긴 채 하늘 높이 치솟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던 열 다섯 소년을 향해  

 

 

 

상처는 죄이다.

상처는 용서하지 못한 자의 복수이다, 라며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일까?    

 

 

 

 

"인간은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에 의해 하나님을 향하여 스스로 성장해가는 거야."

라던 엘리위젤의 스승 '모세'의 말을……

 

"나는 내 마음속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그분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을 주십사 하고 기도하고 있어"라며

자신이 기도하는 이유를 말하던 회당 관리인 모세의 말을 되뇌어 본다. 

 

 

      ▲홀로코스트(Holocaust)

      나치가 12년(1933~45) 동안 자행한 대학살.

      ⓒ SlimVirgin/wikipedia | Public Domain

 

 

사진='사울의 아들' 스틸컷

 

 

 

정사각형이나 다름없이 느껴지는 화면비, 화면 정 가운데 놓인 사울에게만 초점을 맞춘 화면은 갑갑함을 더한다.

무심히 놓인 살색 시신의 실루엣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화면에 소음처럼 더해진 소리들

-닫힌 가스실 문 너머의 두드림,

죽어가는 이의 비명-를 듣다 보면 마치 사울의 뒤를 따라 지옥을 걸어다닌 느낌이다.

 

소년이 사울의 친자인지, 아니면 사울이 결국 미쳐 딴 소년을 아들이라 우긴 건지 하는 의문은 뒤로 하자.

는 이미 미치광이들 속에서 미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일을 해왔다.

 

분명한 것은 어찌할 바 없이 죽어간 소년이 산 채로 '토막'이 되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