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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과 창원 정씨 가문(上)

수로보니게 여인 2015. 5. 5. 23:41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6):김삿갓과 창원 정씨 가문(上)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평안도 사람들이 인조에게 불만이 많았던 이유

입력 : 2015.05.04 09:04 | 수정 : 2015.05.04 09:05 

 

 

1863년 3월29일 전남 화순군 동복면(東福面)에서 한 방랑객이 쓸쓸히 숨을 거뒀습니다. 김병연(金炳淵·1807~1863), 세상은 그를 본명보다 김삿갓, 혹은 한문으로 김립(金笠)이라 부르길 즐겼습니다.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57세였습니다. 그의 호(號)가 난고(蘭皐)입니다. 난초 ‘란’자에 언덕 ‘고’자인데 그 뜻이 새겨볼수록 서글픕니다. 고는 흰 머리뼈와 네발 짐승의 주검을 본따 만든 한자입니다. 그렇다면 난초 만발한 언덕에 스러진 초라한 주검 정도의 뜻이 되겠습니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있는 창원 정씨 구옥. 갈데 없는 시인은 생의 마지막 6년을 여기서 보냈다. 고단한 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한국적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있는 창원 정씨 구옥. 갈데 없는 시인은 생의 마지막 6년을 여기서 보냈다. 고단한 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한국적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메타세콰이어 길을 보기위해 담양(潭陽)으로 향했다가 김삿갓의 종명지(終命地), 즉 숨을 거둔 곳이 부근 화순(和順)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삿갓이라면 강원도 영월이 유명한 것으로만 알았는데 관심이 생겼습니다. 김삿갓의 묘는 왜 영월에 있는데 최후는 전남 화순에서 맞은걸까? 한국의 시선(詩仙)이라 불린 기인이사(奇人異士)의 생애를 되짚어보겠습니다.

김병연의 고향은 원래 경기도 양주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던 안동 김씨지요. 그런 그가 방랑시인이 된 것은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 때문입니다. 김병연이 네살 때인 1811년 평안도 땅에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이지요.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최대의 민란이었습니다. 당시 평안도는 조선 팔도 중 가장 천대받았습니다. 재능이 있어도 평안도 출신이라면 기피했다는데 평안도민들 역시 조정(朝廷)을 불신했습니다. 평안도민들이 반(反)정부 성향을 띤데는 뿌리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문이지요.
김삿갓이 죽은 뒤 묻혔던 초분지다. 3년 후 그의 아들이 찾아와 유골을 이장했다.
김삿갓이 죽은 뒤 묻혔던 초분지다. 3년 후 그의 아들이 찾아와 유골을 이장했다.
병자호란 때 조정은 후금의 철기(鐵騎)를 피해 산성(山城)에 웅거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후금이 조선의 수도를 최단기에 점령하려면 압록강→의주→선천→곽산→정주→안주→숙천→평양→개성으로 진격해야했습니다. 당시 나라를 지배했던 인조(仁祖)는 조선 역사상 가장 한심하고도 무능한 왕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는 이런 대책을 세운 뒤 자기가 앞장서 싸우기보다 강화도로 내뺄 궁리부터 하고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백성을 지킬 군사가 없는 평안도 땅은 무주공산(無主空山), 그야말로 허허벌판이 됐습니다. 후금 군사들의 칼아래 백성들만 애꿎게 죽었습니다. 백성들을 희생시키고도 인조는 강화도로 갈 틈조차 없어 겨우 남한산성으로 숨어 들어갔지요. 내친 김에 한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당시 선봉장으로 후금의 철기를 이끌고 내려온 장수 용골대(龍骨大) 휘하의 병력이 겨우 40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은 40여년전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참패를 못잊고 다시 ‘오랑캐’에게 농락당했습니다. 병자호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백성이 50만명이라고 합니다. 후금 군사가 경상-전라-강원-함경-충청도까지 가지 못했으니 대부분 평안도와 한양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백성을 버린 임금, 그것이 그야말로 ‘개피 본’ 평안도 사람들의 민심이었습니다.

각설하고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김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해야할 선천 방어사(防禦使)였습니다. 종2품의 고관이었지요. 그런데 김익순이 항복하면서 그의 집안은 한순간에 몰락해버렸습니다. 김익순의 아들, 즉 김병연의 아버지인 김안근은 연좌제에 얽힐 것을 우려해 자기 집안의 종복이었던 김성수가 살던 황해도 곡산으로 아들 병연과 그의 형 병하 형제를 보냅니다. 충성스러웠던 종 김성수는 형제에게 글공부도 시켰다고 하지요.

훗날 조정에서는 김익순이 항복만 했을 뿐 반란의 당사자는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멸족(滅族)의 벌까지는 주지않지만 이미 김병연의 가세를 기울대로 기울었지요. 경기도 여주-가평을 전전하다가 이들 가족이 마지막으로 깃든 곳이 영월입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것은 김병연의 생에 딱 어울리는 말입니다. 김병연은 할아버지의 일은 알지못한 채 나이 스물되던 해인 1826년 과거인 향시(鄕試)에서 장원급제, 즉 수석 합격합니다. 그런데 당시 시험문제가 화근이었습니다. <中편에계속>

Photo By 이서현

 

 


 

김삿갓이 지은 최고의 욕설시(詩)

가산에 있는 정시의 충절을 기리고 김익순의 죄를 탄(嘆)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병연은 일필휘지 붓을 휘둘러 이렇게 논박했습니다. “너의 혼은 죽어서도 저승에도 못갈 것이며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번 죽어 마땅하다.” 이 사실을 알게된 가족들과 조부를 맹공한 김병연의 실의가 상상이 가십니까? 장원급제의 기쁨보다는 조부에 대한 죄송함, 가세의 몰락, 고단한 신세가 연달아 떠올랐을 겁니다. 김병연의 가출은 지금으로치면 자살 쯤에 해당됐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을 등지고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 김병연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중 욕설의 백미(白眉)가 자신을 모질게 박대한 시골 서당의 훈장을 향해 날린 다음과 같은 시입니다. 제목이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입니다.

서당내조지(書堂乃早知)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학생제미십(學生諸未十)
선생내불알(先生來不謁)

'회향자탄'이라는 김삿갓의 시가 돌에 새겨져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한탄한다는 뜻이다. 방랑객에게 고향은 가고파도 갈 수 없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회향자탄'이라는 김삿갓의 시가 돌에 새겨져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한탄한다는 뜻이다. 방랑객에게 고향은 가고파도 갈 수 없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해석하자면 ‘서당을 내 일찌감치 알고왔는데 방안에는 모두 귀한 물건뿐이네. 학생 수는 채 열명이 안되는데 알량한 선생은 나와서 나를 보지않네….’ 참으로 재치가 넘치지만 입으로 암송하기는 쉽지않은 시인의 분노가 느껴지지요. 이런 김병연이 전라도 땅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1850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와의 인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병들고 늙은 그가 정씨 집 사랑채에서 숨을 거뒀을 때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마을 뒷편 ‘똥뫼’라는 곳에 매장합니다. 죽음을 예감했는지 정씨 집 앞에는 이런 시비(詩碑)가 서있어 오가는 나그네들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절반이나 이즈러진 서가(書架)에는 수권의 책이 있고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한 개의 벼루가 있어
묵향(墨香)에 스스로 깊이 취하니
마음이 한가롭구려
미약한 이 몸이 이밖에 또 무엇을 바랄소냐’
화순군에는 김삿갓로가 있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김삿갓 묘와는 또다른 시인의 흔적이다.
     화순군에는 김삿갓로가 있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김삿갓 묘와는 또다른 시인의 흔적이다.
똥뫼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있는데 행려병자로 연고없이 사망한 사람들을 묻은 곳입니다. 일종의 공동묘지지요. 그곳에는 김삿갓과 관련된 비석이 서있는데 바로 옆이 소와 돼지 키우는 축사입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분뇨냄새가 진동하지요. 땅에는 인연이 있는지 200년전 시인이 숨진 곳이 오늘날에도 소와 돼지의 우리가 되어있습니다. 흔히 김삿갓을 두고 사람들은 세계의 3대 민중시인이라고 하지요. 나머지 둘이 누군가 보니 미국의 월트 휘트먼(1819~1892)이 꼽혔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휘트먼은 목수(木手)로 일하며 민중의 대변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음이 이시가와 타쿠보쿠(石川啄木·1886~1912)지요. 모리오카중 중퇴 학력으로 사회주의적 계몽운동을 펴다 26세로 요절한 시인입니다. 나이로 보면 김삿갓이 가장 연장자이지요. 일본의 이시가와 타쿠보쿠는 가장 어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3대 민중 시인이 탄생했다는 것은 19세기가 양(洋)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얼마나 백성들이 살기 힘든 시대였는지를 말해준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왜 김삿갓은 이곳으로 온 것일까요? 지금 구암마

을에는 김삿갓이 숨진 옛 집이 잘 보존돼있습니다. 마당에는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우물에는 커다란 거미 한마리가 또아리를 틀고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줍니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종명지 근처 정자에 서 있는 김삿갓의 동상이다. 아름다운 봄날 시인의 감성을 자극할 것이다.

이 집은 백인당(百忍堂) 정치업 선생이 1728년 터를 잡은 곳입니다. 그 후손들이 290년을 떠나지않고 살고 있는데 백인당은 ‘백번을 참는다’는 당호(堂號)처럼 집을 찾는 식객(食客)을 후히 대접하고 쉬도록 하는게 가풍이라고합니다. 그의 6세손 정시룡(丁時龍) 선생 대에 김삿갓이 찾아오자 그는 오랜 기간 사랑채를 비워주고 1863년 김병연이 죽자 장제(葬祭)를 치렀으며 3년 뒤 김병연의 후손이 찾아오자 유골을 넘겨줬다고 합니다. 후덕한 인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그의 집 앞쪽에는 작은 정자가 서있으며 그 앞에는 죽장(竹杖)에 삿갓을 쓴 김삿갓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김삿갓은 정씨 가문의 후덕함 때문인지 세차례 이 마을을 찾았는데 그때마다의 족적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맨처음이 1841년으로 화순적벽(赤壁)을 보고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무등산고송하재(無等山高松下在)

적벽강심사상류(赤壁 江深沙上流)

‘무등산이 높다지만 소나무 아래요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위로 흐르는구나’라는 뜻입니다.

 

두번째가 1850년으로 협선루라는 누각에서 시상(詩想)을 얻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약경심홍선(藥經深紅鮮)
산창만취휘(山窓滿翠徽)
선군하화취(羨君下花醉)

호접몽중비(胡蝶夢中飛)                    ▲김삿갓이 보고 반했다는 화순적벽의 일부다. 중국의 적벽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해석하자면 ‘약 캐러 가는 길가엔 붉은 이끼가 깊고 산을 향해 난 창문에는 푸르름이 가득하다. 그대 꽃아래 취해있음이 부럽구려, 나비는 꿈속에서 날고있는데’ 정도지요. 세번째가 1857년으로, 그때부터 김삿갓은 평생을 짚고 다녔던 죽장을 내던지고 정씨 집에 6년을 머물다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후손이 그의 시신을 인수해간 다음에도 그의 묘가 제대로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下편에계속>          

                              

Photo By 이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