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국어 바루기

'우리말 정체성 확립'을 실현하다

수로보니게 여인 2013. 1. 23. 11:32

 

 
최현배는 일제 강점기 내내 오롯이 우리말 연구와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930년대에 <우리말본>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세상에 내놓아 우리말 연구의 기반을 닦았고,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하여 우리말 규범화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해방 후에는 국어 정책을 총괄 지휘하며 국어 정립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큰사전> 편찬 사업을 마무리 지으며 우리말과 글의 사용 규범을 확립하기 위한 활동을 했지요. 이극로, 신명균, 이윤재 등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했던 주역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월북한 후에는 조선어학회의 상징적 인물로서 일제 강점기 민족어 운동을 국어 정립 운동으로 재탄생시켜야 할 시대적 과제를 떠맡아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최현배를 통해 주시경과 조선어학회를 이해했고, 우리말과 우리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최현배를 알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신학문에 목말랐던 최현배는 1910년 울산에서 상경하여 관립 한성학교에 입학합니다. 이 학교는 국권이 강탈되면서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최현배는 바로 이곳에서 주시경을 처음 만납니다.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던 친구의 권유로 인근 보성학교에서 열리는 조선어강습원에 나가면서부터였지요. 최현배는 학교 수업이 없는 일요일마다 보성학교에 가서 주시경의 문법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주시경의 문법 이론만이 아니라 주시경의 민족 사상을 철저하게 받아들여 자기화합니다.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고 했던, 그리고 국어는 우리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 했던 주시경의 어문 민족주의가 '한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우리말본>의 서문라는 말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우리는 최현배의 글에서 우리말에 대한 주시경의 생각과 꿈을 발견하곤 합니다.

우리말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산물의 총합체이다. 메는 높고, 물은 맑고, 햇빛은 밝은, 아름다운 강산에 살아오는 우리 조선 민족의 심령에는 조선말이란 영물이 그 갖은 소리와 맑은 가락으로써 거룩한 탄강誕降의 대정신을 전하며, 아름다운 예술적 정취를 함양하여 왔으며, 하고 있으며, 또 영원히 하여 갈 것이다. 이 말이 울리는 곳에는 조선심朝鮮心이 울리며, 이 말이 펴나는 곳에는 조선혼朝鮮魂이 펴난다. 비록 그릇된 사상을 인하여 일시적 그 권위를 훼손한 일이 있었지마는, 그 본질적 미점•장처美點•長處는 조금도 그 때문에 떨어진 일이 없으며, 또 오늘날 조선 민족의 시대적 자각으로 말미암아, 장래에 그 움쳤던 날개를 떨치고, 세계적으로 웅비하려는 붕정鵬程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최현배, <조선 민족 갱생의 도>, 1926.
 
 
 
이처럼 우리말이 세계적으로 웅비하려는 붕정을 바라보고 있다고 믿었던 최현배였기에 그에게 우리말 연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當爲였을 것입니다. 그는 경성고보를 졸업한 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떠납니다. 전공이 국어일본어, 한문이었던 걸 보면 그의 뜻에 맞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본 유학은 일본어 연구 방법론을 공부하면서 조선어에 대한 관심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일본의 문법학은 서구 언어학 이론을 바탕으로 학문 문법을 정립하는 단계에 있었으니까요. 일본 문법학과의 만남은 이후 교토대학과 대학원에서 유학하는 시기에도 계속됩니다. 최현배는 교육학을 전공하면서도 일본 문법학자들의 강의를 듣거나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 서구 언어학을 접했으며, 이를 통해 주시경으로부터 배운 문법 이론을 심화했던 것입니다. 최현배는 자신이 걸어온 학문의 길을 회고하며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관비 유학의 의무로서 관립 고등보통학교에 복무하기를 병 청탁으로 회피하고 중략 동래군의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취직하여 한두 해 동안을 여기서 우리말을 연구하면서 가르쳤으니, 나의 <우리말본>의 초고가 맨 처음 여기서 비롯되었다. 중략 내가 대학 시대에도 우리말 연구의 뜻을 버린 일은 없었다. 언어학에 관한 강의를 해마다 들었으며, 대학원에 들어간 해의 봄에 먼저 옛날 동래에서 비롯했던 <우리말본>의 짓기를 다시 시작하여 그해 가을에 이르러 소리갈을 대강 끝내었던 것이다. 최현배, <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 1955.

최현배가 히로시마 사범학교 유학 후 <우리말본>의 뼈대를 만들었고,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할 시기에 <우리말본> 짓기를 다시 시작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최현배가 일본 문법학의 체계를 수용해 주시경 이래로 전개되어 오던 조선어 문법 연구의 수준을 끌어올리려 했었고 그 성과물이 <우리말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일본 문법학을 경험하며 새로운 조선어 문법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일본 문법학계에서 인정받는 문법서를 모델로 삼아 우리말 문법서를 기획했을 것입니다. 국어학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말본>이 야마다 요시오山田孝雄의 <일본 문법 강의>1922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앞에 기술한 영향 관계를 짚다 보면 자칫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본>은 일본 문법학의 성과를 우리말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일본 문법학과 <우리말본>의 영향 관계를 근거로 <우리말본>의 의의를 깎아내리는 것은 정당한 평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우리말 문법을 체계화한 것은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최현배는 교육 현장에서 조선어와 조선어학을 가르치면서 <우리말본>의 내용과 체제를 확정 지어 나갔기 때문에 <우리말본>이 우리말 연구와 교육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920년 <우리말본>을 계획한 후, <우리말본>의 첫째 매가 1929년에 연희전문 출판부에서 출판되었고, 이어서 <조선어 품사 분류론>1930과 <조선중등말본>1934이 발표된 후 193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간되었으니, <우리말본>은 17년 연구의 결실이었지요. 17년 동안 최현배는 우리말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였고 이를 귀납적으로 체계화하여 한 권의 문법서를 엮었던 것입니다. 자료의 풍부함과 설명의 상세함에서 <우리말본>을 능가하는 문법서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찾을 수 없으니, <우리말본>의 역사적•학문적 의의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최현배는 당대의 가장 주목받는 조선어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이었던 주시경과 조선어학회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최현배의 언어학적 관심은 이론적 탐구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어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에도 여름방학이면 조선에서 학술 강연회를 열어 언어 및 문자의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26년 이후에는 철자법 제정을 비롯한 언어 정책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930년대 조선어학연구회와 조선어학회 사이에 벌어졌던 철자법 논쟁에서 최현배는 탄탄한 언어학 이론에 바탕을 둔 논리로 대중들에게 형태주의 철자법의 우월성을 각인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지요.
그런데 실천적 학문을 지향했던 최현배의 삶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민족 운동의 차원에서 어문 운동을 기획하고 이를 추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우리말 연구에 몰두했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육을 통한 민족 개조였습니다. 그가 일본 유학을 통해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페스탈로치의 규범적 교육학에 매료되었었다는 사실은 그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 주지요. 그는 교토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지만 그의 전공은 교육학이었고, 학위 논문의 제목은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이었습니다. 그리고 1926년 교토제국대학의 대학원 과정 수업을 1년간 받으면서 쓴 것이 바로 <조선 민족 갱생의 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페스탈로치를 꿈꾸었던 최현배가 귀국 후 교육 운동보다 어문 운동에 주력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왜정의 동화 정책, 식민지 교육 방침에 굴레 씌워진 당시의 우리의 교육은 도저히 나의 교육 이상의 실현의 여지가 없음을 간파하게 나를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연구심은 교육학의 원리, 방법 등에 쏠릴 수가 없었다. 만세 불멸의 교육 원리도 왜정의 횡포한 칼 앞에는 아무 실행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중략 그러나 나의 연구의 노력은 나의 학교 교육에서는 부전공의 지위에 있던 우리말 우리글에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조선말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이 나의 주장된 학구적 사업이었다. 최현배, <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 1955.

최현배는 식민지 지식인의 한계와 민족어의 위기 상황을 절감하며 우리말 연구와 운동에 주력합니다. 교육을 통해 민족을 개조한다는 목표가 민족어 운동을 통한 민족 개조 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이지요. 따라서 최현배의 민족 개조 논리를 이해하는 것은 그의 어문관과 어문 운동 논리를 파악하는 데에서 중요한 고리가 됩니다. 주시경의 민족 사상을 내면화한 최현배는 민족을 절대적 대상으로 여겼지만, 자신의 눈에 비친 민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곡된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민족의 갱생更生'을 열망하게 된 것이지요. 이는 민족 개조를 통해 그 절대적 대상의 정수精髓를 발현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의 어문관과 어문 운동 논리도 이와 같습니다. '민족의 갱생'이 '민족어의 갱생'으로, '민족의 개조'가 '민족어의 개조'로 치환되었을 뿐이지요. 원리와 원칙에 충실한 어문 정리는 우리말의 정수를 발현시키는 유일한 길이었고, 일제의 민족어 말살 정책에 맞선 투쟁은 그에게 존재론적 요구였던 것입니다.
최현배의 어문 운동 논리는 해방 이후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더욱 빛을 발했고, 국어 정책을 추진하는 기본 논리가 되었습니다. 국어를 정립하는 일이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고 독립 국가를 세운 민족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로 생각되면서, 자연히 국어 정화와 한자 폐지를 통한 교육 언어의 정립이 국어 정책의 핵심 과업이 되었습니다. 그가 기획하고 추진했던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은 당시 국어 정책의 특성과 목표를 잘 드러냅니다. 특히 문교부 편수국장으로서 국어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그의 어문관은 곧 국어 정책의 논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그가 추진한 정책에 대한 저항도 거셌습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저항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지요. 국가의 발전 방향에 대한 생각이 하나일 수 없듯이 국어의 발전 방향에 대한 생각도 하나일 수 없었으니까요.
유일한 해결책은 실용 정신으로 타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어와 한글을 절대적 위치에 놓는 한 다양한 생각을 정책적으로 수용할 길을 찾기는 불가능했지요. 어문 운동의 각 진영이 정치권력의 힘을 어문 정책의 추진 동력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어문 관련 논쟁은 퇴행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책을 추진하는 쪽이든 이에 저항하는 쪽이든 그 사고의 틀은 더욱 편협해졌고 논쟁은 지루한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던 거지요. 어문 정책의 담론이 '비행기'와 '날틀'의 대립이나 한자 혼용론과 한자 전용론의 대립에 갇혀 버렸던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최현배가 이러한 담론의 중심에 서면서 최현배라는 큰 인물이 한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최현배는 국어 정책사와 우리 어문 운동사에서 그리고 국어학사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그 산은 역사적 성과이기도 하고, 미래로 가는 길의 이정표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가 풀고 넘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국어 정책과 국어 운동의 논리는 편협함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최현배라는 거대한 산을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거부감을 갖는 이들은 그 산의 거대함에 눌려 더 왜소해지고, 그를 숭상하는 이들은 그 산에 갇혀 더 편협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산을 내려다보며 우리말과 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최현배를 끝으로 '우리말을 빛낸 인물들'의 연재를 마감하며 국어 정책의 길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글_ 최경봉
최경봉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어휘 의미론, 국어학사, 국어 정책과 관련한 연구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글 민주주의>, <국어 명사의 의미 연구>, <관용어 사전>, <우리말의 탄생>,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우리말의 수수께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