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양순, 「미스터리 시간」 중에서
집주인이었다. 주인은 남자를 한차례 쏘아보고는 여자를 밀고 들어섰다. 너 아주 맹랑한 애네. 사람을 왜 이리 성질나게 만들어? 뒤따라온 주인 여자가 창문을 보며 혀를 찼다. 아유, 이렇게 움막 만들어 사니깐 좋으니? 친친 잘도 감아놓았네. 대체 어찌할 셈으로 이런 거야? 여자는 할 말을 잃었다. 언니가 곧 와서 해결한다 했는데 아직 안 와서요. 전 지금 공무원 시험 준비하느라 알바를 못 해서…… 언니라구? 아냐, 넌 강희선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넌 강희선이 맞아. 아니에요. 전 동생 강희명이에요. 그럼 민증 내놔봐. 여자는 가슴이 덜컥했다. 지금 언니 것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줘봐. 여자는 가방을 오래오래 뒤져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이거 너 맞잖아. 그때 주인 여자가 나섰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포기 각서나 쓰라 그래요. 주인 남자가 준비해온 서류를 여자 앞에 던졌다. 이건 니가 약속한 날짜까지 방을 비우지 않으면 여기 있는 모든 물건을 밀린 임대료와 공과금 조로 주인이 임의대로 처리해도 좋다는 포기 각서야. 잘 읽어보고 도장 찍어? 기한은 얼마면 되겠어? 여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일주일? 주인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용 잘 확인해보고 여기 날짜 쓰고 도장 찍어. ‘포기 각서’라고 명시된 문서를 보자 주인의 요구대로 모든 것이 깨끗이 포기되었다. 도장을 찾는데 주인 여자가 말렸다. 아니, 너 지장 찍어. 주민번호랑 이름도 그 옆에 쓰고. 여자는 가만가만 숨을 고르고 주인 여자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신상을 적었다. 거봐, 본인이잖아. 이거 앙큼한 기집애라니깐. 주인 여자가 달려들어 머리카락이라도 뜯을 것처럼 흥분했다.
이번에도 빠져나갈 생각했다간 큰코다쳐. 여자는 겨우 예, 하고 대답했다. 주인이 떠나고 그때까지 서 있는 남자를 보자 여자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화가 솟구쳤다. 방 뺄 거예요. 곰팡내 풀풀 나는 이깟 방, 저 얼마든지 뺄 수 있거든요. 남자가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언제, 어떻게요? 일주일 뒤에요. 우리 언니도 곧 온다구요. 홱 돌아서는 여자의 뒷모습을 남자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 작가_ 홍양순 - 1958년 제주 출생.
1994년 문화일보에 중편소설 「떠도는 혼」이 당선되어 등단. 소설집으로 『자두』가 있음.
졸지에 ‘언니’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말았어요. 언니가 돌아오면 밀린 월세를 한번에 청산할 거라고, 언니가 돌아오면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 버티던 이 생활도 끝이라고, 언니가 돌아오면 혼자 감당해야 했던 외로움도 없을 거라고, 언니가 돌아오면 냉랭한 세상의 괄시도 두렵지 않을 거라고, 언니가 돌아오면, 언니가 돌아오면…… 물론 언니는 돌아오지 않지요, 궁지에 몰린 순간을 모면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낸 환영이니까요. 그런데도 이 가공의 ‘언니’가 그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시각각 조여드는 긴장도 줄어들지요. 언니의 실체를 위해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대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녀가 그녀 또래 나이의 아가씨로 보이네요. 발칙하다고 나무라지는 못하겠어요. 저 또한 오래전 그렇게 언니를 둔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어쩌면 지금의 저 자신, 그때 제가 만든 환영일지도 모르겠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구체화된, 주와 객이 전도된, 아주 가끔 1센티쯤 허공에 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그 때문 아니었을까요.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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