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백컷을 찍고 나오다 갑자기 기자가 말했다. “거기 서서 목만 돌려보세요!” 변희재는 “10년 전 아스팔트에 누워보라고 한 기자 이후 이런 포즈는 처음”이라고 했다. 평소 사진 속의 그는 투사(鬪士) 같았지만 실물은 영락없는 노총각이었다. 모처럼 차려입었다는 와이셔츠는 다리지 않은 듯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빅뉴스'·'주간 미디어워치' 대표 변희재
나이 서른다섯에 3개 매체 편집장을 지냈다. 지금은 2개 매체 대표다. 인터넷, 신문, 방송처럼 전장(戰場)을 가리지 않고 적(敵)을 무자비하게 물어뜯었고 난도질했다. 인터넷 매체 '빅뉴스'와 매체 비평지 '주간 미디어워치' 변희재 대표를 만날 때까지 이런 생각만 했다.사진으로만 봤던 그는 각진 안경테에 치켜 깎은 머리 때문에 꽤 괴팍한 성격인 것 같았지만 키 1m83에 몸무게 80㎏의 양순한 노총각이었다. 촬영 때도 고분고분했다. 갖가지 자세 요구에 볼이 붉어지더니 "10년 전에는 아스팔트 위에 누워보기도 했는데요, 뭘"이라고 했다.
변 대표는 인터넷 인물 검색에서 '1등 단골'이다. 고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 국민장이 부당하다고 했을 때 그랬고, MBC 개혁을 외칠 때도 그랬다. 거대(巨大) 포털을 공격할 때도 그랬고 그의 대학 선배인 좌파 글쟁이와 10년 가까이 논쟁을 이끌어 올 때도 그랬다.
정확히 2002년까지 그는 좌파 진영의 편처럼 보였다. 그 이후 우파 진영의 편처럼 보이고 있다. 그래서 평가가 정반대다. 좌파들은 그에게 '꺼삐딴 변'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카멜레온처럼 자주 입장을 바꿨다는 뜻이다. 우파에서 그는 젊은 보수의 기수(旗手)다.
'단골로 공격하는 사람은 경(輕)비행기를 모는데 당신 취미는 뭐냐'고 물었다. 그는 0.5초 만에 소송(訴訟)이라고 했다. "소장(訴狀)에는 왜곡이 없고 팩트(Fact)만 있잖아요. 소장을 쓸 때마다 쾌감을 느껴요." 잠깐 의심했지만 그는 진짜 소송을 즐기는 것 같았다.
"대학 4학년 때 엉뚱한 학생이 성폭력 가해자로 몰렸어요. 그 친구 편을 들자 총학생회가 제게 '집단 다구리'를 놨어요. 교내 15곳에 저를 비방하는 대자보가 붙었어요. 모조리 고발하러 관악경찰서에 갔어요. 접수는 못했어요. 경찰관이 '술로 해결하라'며 고발장을 받아주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많은 이들이 애도한다는데 왜 노 전 대통령 국민장을 문제 삼았습니까.
"법 조문을 찾아봤어요. 전직(前職) 대통령이라고 무조건 국민장 하는 게 아니라고 나와 있어요. 세금이 들어가니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해요. 그런데 검찰 수사를 받다 자살한 전직 대통령이 국민장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통령으로서 기본 의무를 지키지 않은 거잖아요."
―좀 참지 그랬습니까.
"국무회의에서 심의조차 하지 말라는 식의 압력이 뻔히 보이는데요?"
―그 글을 쓴 뒤 좌우에서 융단폭격을 받았지요.
"인터넷 매체가 제 글을 발췌해 보도할 때까지 며칠은 잠잠했어요. 그런데 네이버 메인에 등장하면서 파문이 커졌습니다. 발췌는 전문(全文) 게재와 달리 뉘앙스부터 왜곡됩니다. 비판만 있었지 왜 국민장을 해야 하느냐는 논리는 아무 데도 없었어요. 저를 비난한 글들은 모두 정치적인 주장이었어요.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지요. 더 웃기는 사례도 있어요."
―뭡니까.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땝니다. 한 좌파 매체에서 '대통령에 대한 국민장은 그의 업적을 평가해서 해야 한다'고 썼거든요. 그런데 상황이 달라지자 입장을 싹 바꿔 저를 비난하는 겁니다."
―조선일보로부터도 비판받았지요.
"제가 조선일보에 글을 쓸 때부터 좌파 진영에서 부른 노래가 있어요. '변희재는 3~4년쯤 지나면 '팽(烹)' 당할 것'이라고요. 제가 비판받자 '거봐, 진짜 팽 당하지 않았느냐'는 조롱이 다음 아고라에 등장했어요."
―어떻게 되는 게 팽 당하는 겁니까?
"쓸모없어지거나 글의 수준이 낮아지면 용도 폐기된다는 뜻이겠죠."
―그런 사례가 있습니까.
"좌파 진영에서는 문부식씨 사례를 들어요.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이었던 분이요. 2003년인가 분쟁지역 다니며 쓰던 글이 중단된 적이 있지요. 저는 그 글이 별로였다고 보지만요." (당시 문씨의 글을 Why?팀 유석재 기자가 받았다. 그는 펄쩍 뛰면서 "문씨가 스스로 중단한 것"이라며 "좌파들이 그 문제를 그렇게 왜곡하는군요"라고 했다.)
―원래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안티조선(Anti-Chosun) 운동을 했었죠?
"그 운동을 처음 한 건 1998년입니다. 당시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조선일보 기자와 소송을 벌일 때 도와주자고 만든 것이었어요. 취지는 조선일보를 망하게 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선일보의 포지션을 정확히 밝혀 대체 언론을 키우자는, 제한적이고 생산적인 성격이 강했어요."
―그런데 왜 변질됐습니까.
"노무현 정권 차원에서 안티조선을 권력화시킨 거죠. 노 정권은 조선일보를 비판한 사람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줬잖아요. 백낙청 교수처럼 초기에 안티조선을 반대했던 인사들이 그래서 강경으로 돌아선 겁니다. 강 교수와 저는 그런 운동방식을 지지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명계남식(式) 안티조선 운동을 끊임없이 비판했지요. 저는 2002년 노 정권 출범 후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어요."
―왜 조선일보에 글을 쓰기 시작했나요.
"2005년에 제가 포털 사이트의 권력화 문제를 제기했어요.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미디어오늘 같은 진보매체에서 포털을 비판하는 글을 아예 받아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저를 음해했고 왜곡 보도했지요. 제가 강 교수와 홍세화 한겨레신문 전문위원, 이상기 당시 기자협회장에게 편지를 썼어요. '내가 알고 있는 안티조선 원칙에 따르면 조선일보 기고가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이견(異見)이 있으면 답신을 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요.
"나중에 강 교수는 '변희재의 조선일보 기고는 안티조선 기고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답이 없었고요."
―우파 신문은 우파만, 좌파 신문은 좌파의 글만 게재해야 한다고 봅니까?
"추상적인 글이라면 좌든 우든 해당 언론사나 기고자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봐요. 좌우 갈등이 극단적이 됐잖아요. 소통(疏通)을 위해서는 이런 것 저런 것 따질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소통의 장벽을 쌓은 게 우파입니까, 좌파 신문입니까.
"좌파 매체의 책임이 현재로서는 더 크다고 봅니다. 우파 신문들은 '장사'가 된다면 이념 성향을 안 가리고 필자를 섭외하잖아요. 좌파 매체들은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저는 좌파 매체만 변하면 우리 언론과 지식인 구도를 생산적으로 바꿔낼 수 있다고 봅니다."
'조문(弔問) 정국'에서 40대 이하의 이름 알려진 인사 중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변희재가 유일하다. 그는 "그 덕분인지 우파의 F4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고 했다. 나머지는 누구냐고 묻자 김동길(金東吉)·조갑제씨의 이름을 들었다.
그의 출발점은 좌파 진영이었다. 그가 창간에 간여한 인터넷 매체 '대자보'나 '서프라이즈' '브레이크 뉴스'는 그런 성향이 진했다. 그랬던 그가 노 전 대통령이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직후부터 강하게 자기가 서 있었던 진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F4로 불리니 기분이 어떤가요.
"사람들이 꼭 묻는 게 있어요. 보수냐 진보냐, 우파냐 좌파냐는 겁니다. 귀찮아서 그냥 우파로 부르라고 합니다. 대신 '뉴 라이트'는 사양합니다. 차라리 '올드(old) 라이트'가 좋지요."
―보수인가요, 진보인가요.
"우리 사회의 보수 진보는 이념·사상과 무관해요. 진영(陣營)으로만 판가름하죠. 제가 요즘 보수 인사들과 주로 술을 마시니 보수겠지요. 저는 존 스튜어트 밀의 '사회적 자유주의'를 지금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좌파 진영 사람들과 주로 술을 마실 때도 저는 자유주의자였어요."
―지지하는 정당은요?
"정치적 노선으로는 옛 민주당을 지지했지요. 햇볕정책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한 번쯤 했어야 할 정책이라고 믿었고요. 그 당이 열린우리당의 분당(分黨)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지금은 지지 정당이 없지요."
―열린우리당 분당이 왜 잘못된 겁니까.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당을 깼잖아요. 민주주의 파괴죠. 창당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안티조선 하다 조선일보에 기고하고, 민주당 지지한다면서 한나라당 추천으로 미디어발전 국민위원이 된 게 전향 아닙니까. 좌파 진영 말처럼 '꺼삐딴 변' 아닌가요.
"저는 변신한 적도 전향한 적도 없습니다."
―한나라당 추천으로 미디어발전 국민위원이 됐는데도요?
"저는 한나라당 지지한 적 없어요. 대선(大選) 때도 그랬어요. 다만 다른 좌파들처럼 한나라당을 완전히 사라져야 할 정당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한나라당과 저는 인터넷 개혁정책, 청년 창업정책, 대중문화 개혁정책에서 일치합니다. 미디어발전 국민위원은 인터넷 정책 문제 때문이었어요."
―그럼 한나라당에 애정도 없겠군요.
"보수우파 논객들은 한나라당에 애정과 실망을 동시에 느끼지요. 그 당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인의식이 없어요. 다만 제3자로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한나라당이 좀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
―어떻게 이상합니까.
"대표적으로 친이(親李) 친박(親朴) 논쟁을 보면 노선 투쟁도 아니고 정책 투쟁도 아니고 역사 투쟁도 아니잖아요. 단순한 자리와 차기 권력 싸움 아닌가요?"
―옛 민주당에서도 노선 투쟁이 있었지 않습니까.
"민주당에서 있었던 '난닝구 빽바지파(派)'의 논쟁은 그나마 역사와 노선의 논쟁이었어요. 결과가 파탄 나서 그렇지 영 알맹이가 없었던 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 문제도 냉정하게 볼 수 있겠네요.
"정권 잃은 좌파진영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 곳곳에 지뢰를 깔아놓고 칼을 갈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경제만 살려놓으면 되지 뭐가 문제냐'는 식의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일을 하려면 지뢰를 제거하고 칼부터 빼앗아야 하잖아요.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다 '강부자' 논란, 측근의 권력 사유화 논란에 휩싸이면서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겁니다. 좌파들에게는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지요."
―좌파와 야당은 신문이 방송에 진출하면 MBC를 빼앗을 것이라고 선전합니다.
"방송장악은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방송시장은 들어왔다가 죽을 확률이 훨씬 높은 상황입니다. 지상파 방송권을 따내도 KT가 쳐놓은 IPTV의 990개 채널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는 겁니다. 조중동이 미우면 빨리 방송에 진출하라고 하는 게 순리 같은데요?"
변 대표는 2005년부터 포털 횡포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작년 촛불 시위가 극성을 부릴 때도 그는 포털과 싸웠다. 그는 그 과정에서 수십명을 고소했다. 고소가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수천 개의 명예훼손 글에 개인이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소송은 약자의 수단"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거대 포털과 MBC의 서로 돕고 돕는 '이상한 관계'를 봤다고 했다. 그걸 추적해 들어가자 대표적으로 포털 다음과 MBC의 유착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아냈다. 다음과 MBC의 '홍보 양해각서'가 그것이다.
―포털과 MBC의 관계가 뭐가 이상한 겁니까.
"인터넷 여론이 자발적 의견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겁니다. MBC 100분 토론을 보면 '시청자 의견을 미디어 다음 아고라에 쓰십시오'라는 자막이 나와요. 다음은 100분 토론을 다음 뉴스 면에 잘 보이게 편집하지요. 얼마 뒤 인터넷 매체 기자들이 100분 토론 기사를 씁니다. 다음은 그걸 또 메인 화면에 부각시킵니다. 우연한 게 아니고 치밀한 각본에 의한 것이었어요."
―요즘 MBC PD수첩 작가의 이메일이 화제지요.
"세상을 바꾸려는 건 그 작가뿐이 아닙니다. 다음의 직원 중에도 '우리 목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참 놀랍지요. 한마디로 '서프라이즈'합니다. 문제는 PD수첩이 아닙니다."
―뭐가 문제인가요.
"저는 PD수첩보다 MBC 100분 토론이 더 위험하다고 봐요. 저도 그쪽에서 섭외를 받아봤는데 1시간가량 질문해요. 답을 다 해 줬는데 다음 날 또 물어봅니다. 그러다 패널 간에 게임이 안 될 것 같으면 제가 질문했던 주제는 빠지는 겁니다. 카메라가 비추는 기법에도 차이가 있더군요."
―카메라 기법까지 연구했나요.
"화면 분할이라는 게 있잖아요. 진보측 패널이 발언하면 화면이 둘로 나뉩니다. 진보측 발언에 보수측 패널이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 나와요. 시청자들은 그걸 보면서 '아! 진보 쪽 주장이 먹히는구나'하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화면 분할하는 비율을 조사해보니 진보측 패널이 등장할 때가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저는 이 문제를 계속 방송심의에 넘기고 있어요. 게다가 MBC의 인터넷 경영에도 문제가 있어요."
―포털하고는 왜 원수가 졌습니까.
"2005년에 한 개인을 짓밟는 걸 포털이 방치하는 걸 보면서부터입니다."
―포털의 속성이 뭡니까.
"그들은 기존 매체를 뒤흔드는 게 목표입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선동을 하게 돼 있지요. 그건 기본적으로 포털이 '언론권력'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언론권력만 놓으면 될 텐데, 그게 참 놓기 힘든 거잖아요. 그만큼 매력적이니까요."
―포털을 그렇게 집요하게 공격하면 보복당하는 일은 없나요.
"2005년에 포털과 싸움을 시작하면서 1~2년간 활동을 못했어요. 제가 운영하는 인터넷 신문을 포털 쪽에서 검색을 잡아주지 않는 겁니다"
―검색을 잡아주지 않는 게 치명적인가요.
"인터넷 매체는 검색에 잡히지 않으면 활동이 불가능해요. 포털을 비판하면서 방송이나 토론회 같은 곳에서도 섭외가 들어오지 않았어요. 특히 진보좌파 쪽이 집요하게 저를 배제했어요."
―어떻게 먹고살았나요.
"신문 기고로 먹고살았지요."
―인터넷 매체를 여러 번 만들었지요. 돈이 얼마나 듭니까.
"1999년 '대자보'라는 걸 처음 만들었어요. 지금 인터넷 매체에 대자보 출신 논객들이 많아요. 당시에는 한 20명 활동했지요. 돈은 많이 안 들어요. 도메인만 확보하면 2만~3만원 있으면 됩니다."
―대자보를 나와 '서프라이즈'를 만든 이유는 뭡니까.
"대자보에서 저를 포함해 4명이 나왔어요. 2002년 대선을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 논쟁이 활발했을 때였어요."
―그 뒤 만든 '브레이크 뉴스'까지는 편집장을 지내다 2006년 '빅뉴스', 올 3월 '미디어워치'를 만들면서부터는 대표가 됐지요. 언론 사주(社主)가 된 기분이 어떤가요.
"미디어워치가 주간인데 2000부 정도 나갑니다. 언론사 기자들, 공공기관 기자실, 언론관련 교수들과 연구단체에 배포합니다."
―구독료는 정상적으로 들어옵니까.
"1년 구독료가 5만원인데 100명이 보면 돈 내는 사람은 2~3명 정도입니다. 간신히 수지를 맞추고 있어요."
―왜 그렇게 매체를 자주 만듭니까.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신문 만드는 게 취미였어요. 반포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신문을 만들어봤습니다. 제호는 '타임머신'이었는데 갱지에 써서 복사해 돌렸지요. 그 후로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했고요."
―그렇게 매체가 좋으면 왜 기자 될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저도 취재를 하기 때문에 취재기법을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어요. 2003년에 딱 한 번 입사 지원을 한 적이 있어요. '프레시안'에 했는데 면접 때 안 갔습니다."
―앞으로도 매체를 만들 생각이 있습니까.
"제가 '실크로드 포럼'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실크로믹스'라는 청년경제 월간지 발간을 고려하고 있어요."
―다들 신문이 망할 것이라고 하는데 왜 신문을 만들었습니까?
"인터넷은 한계가 있어요. 인터넷으로는 절대 심도 깊은 분석기사를 볼 수 없습니다. 고급 시각 같은 것은 지면(紙面)이 아니면 절대 안 될 겁니다. 그래서 제가 발간하는 '미디어워치'도 전체 기사 가운데 2~3개 정도만 인터넷에 올립니다."
―그런데 왜 정작 신문·잡지 업계 종사자들은 인터넷을 대안(代案)이라고 볼까요.
"그게 참 답답한 겁니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인터넷은 '루키 리그'입니다. 종이신문 같은 일간지는 '메이저 리그'라고 봐야 해요. 그러면 '루키 리그'에서 마음대로 떠들도록 한 뒤 거기서 검증된 사람들을 메이저 리그에서 써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메이저 리그가 루키 리그를 베끼고 있잖아요."
변희재와 진중권의 관계는 웬만한 네티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남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말의 달인' 진씨가 변희재만 만나면 고전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변희재는 이렇게 설명했다.
"진중권씨와 10년 가까이 논쟁을 하면서 386세대, 특히 좌파 386세대의 본질을 알게 됐어요. 1990년대 이후 세대는 논쟁을 해도 객관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근거로 합니다. 386세대는 총체적인 분석만 하죠. 반미 하는 이유가 웃겨요. 미국을 '지존(至尊)'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진씨와 그렇게 으르렁댑니까.
"제가 폭로한 한국예술종합학교 30억대 부실사업 건은 그 학교 학생의 제보로 시작된 겁니다. 진중권씨는 핵심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본인이 광분하면서 오히려 제게 소스를 제공했지요. 덕분에 저는 취재를 편하게 했어요."
―어떻게 하는 게 '광분(狂奔)'입니까?
"제게 전화를 걸어 협박하고 진보신당 홈페이지 게시판에 저를 '정치권력의 행동대장'처럼 묘사했어요. '듣보잡'이라고도 폄하했고요."
―'듣보잡'은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라는 뜻이라면서요. 진씨는 '인터넷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용어'라고 해명했던데요.
"저와 논쟁을 피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겁니다. 저는 진씨와 인터넷 매체 '와이텐'의 아나운서, 또 다른 인터넷 매체 기자 2명을 고소했습니다. 인터넷 다음에 게재된 진씨의 글을 삭제해달라는 요청도 했지요. 다음이 받아들이자 진씨는 구글 사이트로 '인터넷 망명(亡命)'을 했고요."
―어떤 반응이 오던가요.
"기자 2명만 전화로 사과를 했습니다."
―언젠가는 진중권,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글을 좋아한다고 했다던데.
"강 교수의 글은 지금도 좋아합니다. 진중권씨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의 글을 '××범의 글쓰기' '××인간의 글쓰기'라고 봅니다."
―한예종과 관련된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저 같으면 변 대표를 상대로 소송이라도 걸 텐데.
"386세대들은 법(法)을 잘 몰라요."
―두 사람 다 미학(美學)을 전공했는데 왜 사용하는 용어는 그리 험악합니까.
"인터넷 글쓰기는 선동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