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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수로보니게 여인 2008. 2. 11. 12:04

 

 

  [애송시 100편-제30편]                                                    ▲ 일러스트 잠산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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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이별의 사건으로만 완성된다면 사람에겐 애초부터 마음이라는 게 없었을 것이다.

이별 뒤에 오는 축축한 망각의 시간이 훨씬 고통스럽다. 서서히 잊어가며 다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 축음기처럼 생생하게 이별 이전의 일까지를 재생시키는 모든 과정을 아울러 우리는 이별이라는 사건의 전모(全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잊는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생명 없는 사물처럼 안색 없이 돌아서기만 하면 될 것이다. 생명 없는 사물의 안색으로 헤어진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을 겪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큰 사랑은 사랑이 소멸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 꽃 이후의 꽃다발 혹은 열매 이후의 열매처럼 쇠잔하게 말라가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어떤 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는가.

무안의 회산 백련지를 찾아가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연꽃이 만개한 그 시간을 찾아가겠지만.

시인은 연못이 폐선처럼 가라앉는 시간에 거기를 찾아간 모양이다. 흰 연꽃도, 푸른 손바닥 같은 연잎도, 따뜻한 한 공기의 밥 같은 연밥도 없는 시간. 시인은 뒤늦게 그 연못을 찾아간 모양이다. 마치 애별리고(愛別離苦)를 겪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사람처럼. 그 연못에서 시인은 연밥과 연잎과 연꽃의 시간을 다시 살려낸다.

우리의 습관인 순차적인 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의 말대로 나희덕(43) 시인은 '울음의 감별사'이다. 그녀는 한 산문에서 마른 석류를 들여다본 일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붉은 석류가 마르면서 바람 빠진 공처럼 물렁물렁해지고 거기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삶이란 완벽한 진공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했다"라고 적었다. 세상의 통증 하나하나와 만날 때 투덜대고, 서운해하며 토라지고, 대놓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녀의 시편들은 시원시원하게 정직해서 비옥하다. 그녀는 복숭아나무 같은 시인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을 펼쳐놓는 복숭아나무. 복숭아나무가 그토록 눈이 부신 나무임을 처음 알게 해준, 복숭아나무와 친족인 시인.

 

                                                                                                     2008.02.09 22:51 문태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