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 ı ĿØЦЁ УØЧ/´˝˚³οο ı Łονё 문화

나스카 라인/양친재

수로보니게 여인 2008. 1. 3. 11:34

 

 

[2008 신춘문예] 나스카 라인
단편소설 당선작
양진채
 

상자 안으로 들어간다. 상자는 가로 52센티미터, 세로48센티미터, 높이40센티미터의 6호 택배상자 두 개를 위아래로 이어 붙인 것이다. 조금 비좁은 듯하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천천히 숨을 고른다. 상자의 열려 있는 윗부분을 안에서 누런 비닐테이프로 봉한다. 우체국 안을 희미하게 비춰주던 가로등 불빛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상자 안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미열이 있긴 하지만 견딜 만하다. 눈을 감는다. 상자 안에 붙인 그림처럼 나도 무생물이 된 느낌이다. 상자 위에는 EMS국제특급우편용지가 붙어 있다.

비닐봉투를 잔뜩 든 사내가 들어온다. 불룩한 비닐봉투가 사내의 양 손에서 부채꼴 모양을 만든다. 갈색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 단단한 근육에서 태양의 냄새를 맡는다. 숯불에 구운 감자를 쪼갰을 때 나는 냄새이거나, 불에 오래 달구어진 차돌에서 나는 싸한 냄새 같은. 사내는 대형 소포상자를 두 개 사서 비닐 봉투 안에 든 물건들을 꺼내 상자 안에 차곡차곡 담는다. 옷이다. 레이스가 달린 아동복부터 원피스로 된 부인복, 남성복까지 골고루다. 옷 위에 마지막으로 카세트테이프를 올려놓고 박스테이프를 두른다. 공단지역이 멀지 않은 이 우체국에는 자국으로 택배를 보내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볼펜을 쥔 사내의 손톱 밑이 까맣다. 사내가 내민 국제소포 우편물 주소기표지 신청서에 수취인 주소를 적어 넣는다. 우즈베키스탄의 한 도시. 나는 도착 국가명 약호에 UZ 라고 쓴다. 컴퓨터의 국제우편 발송조건표 비고란에 ‘서신불가’라는 글자가 뜬다. 나는 사내가 옷가지 위에 테이프를 올려놓던 것을 기억한다. 사내는 편지 대신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넣었을 것이다.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사내는 이국의 어두운 밤에 카세트 앞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떨리는 목소리로 가족의 이름을 부르거나, 밤새워 쓴 편지를 읽었을 것이다. 간 사 한 니 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사내의 검은 얼굴에서 미끄러진다.

조금 전에 넘긴 탁상달력에는 페루의 마추픽추 전경이 새로운 달 안에 있다. 달력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숲의 어디쯤을 가로질러 달리는 인디오 아이가 사진 속에서 숨을 헐떡이는 것 같다. 나는 그 아이를 안다. 아이의 이름은 굿바이 보이. 몇 년간 부은 적금으로 그와 내가 유일하게 호사를 부려 다녀온 여행에서 만난 소년이었다. 마추픽추를 떠나는 버스가 구비 돌 때마다 만나던 아이는 결국 버스보다 먼저 도착해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나와 그도 세상에, 하고 외쳤던 것 같다. 아이는 버스가 출발하려 할 때 깡충깡충 뛰며 관광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대던 바로 그 아이였다. 버스보다 더 빨리 숲을 헤치고 마추픽추를 내려오던 아이. 아이는 여행자들로부터 박수와 돈을 받았다. 나는 아이의 여린 발목을 보면서 신발 밑창보다 더 단단해졌을 발바닥을 떠올렸다. 아이는 잉카제국의 통신을 담당한 파발꾼 챠스키의 후예였다. 고립된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던 챠스키. 어쩌면 이제 우체국은 이제 굿바이 보이다. 무선통신에 의해 쇠락한 파발꾼이다. 나는 이틀 전에 푼 로직퍼즐의 그림이 나스카의 어떤 문양과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마추픽추, 나스카, 페루, 하고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 그림=황주리
나는 밤마다 로직퍼즐을 푼다. 로직퍼즐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취미나 마찬가지이다. 로직퍼즐은 모눈종이에 숨겨져 있는 그림을 제시된 숫자를 칠해가며 숫자들의 조합을 보고 알아내는 퍼즐이다. 나는 연필을 들고 윗줄과 왼쪽에 제시된 숫자만큼 모눈종이에 검게 칠해나간다. 세로 행에 쓰여 있는 숫자 배열과 가로에 쓰여 있는 숫자배열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무작정 한쪽의 숫자대로 칠하면 다시 지워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로직 실력이 뛰어난 편이다. 쉬운 로직은 가로세로 각각 열 칸짜리지만 나는 주로 가로세로 칠십 칸씩인 로직퍼즐을 공략한다. 사백구십 칸의 퍼즐을 맞추다 보면 서너 시간은 쉽게 흘러갔다. 작은 칸을 전부 메우면 어느 순간 떠오르는 전체 그림. 풀기 위해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로직퍼즐이 나는 편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내 ‘말’도 할머니 묘에 같이 묻혔다…

난 늘 운동장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어제도 로직퍼즐을 풀었다. 사백구십 칸의 모눈종이에 숨어 있는 그림을 풀려면, 먼저 큰 수부터 찾아 모눈종이에 연필로 칠해야 한다. 가로와 세로의 숫자들이 칸마다 맞아 떨어져야 숨어 있는 그림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집중해서 칸을 찾아나가야 한다. 똑같은 7이라는 숫자는 일곱 칸을 차지하지만 제각각 위치가 다르다. 나는 로직을 푸는 중간에 가끔씩 고개를 젖혀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주기도 하고, 손을 비벼 열이 나는 두 손을 눈두덩에 대고 가볍게 눌러주기도 한다. 눈의 피로가 풀리는 듯 눈자위가 따뜻해지고 새벽쯤이 되면 웬만한 로직은 다 풀 수 있었다. 숨어 있는 그림은 원숭이였다. 사백구십 칸 속에 들어있는 검은 원숭이는 백이나, 이백 칸짜리 로직에 비해 훨씬 정교했다. 긴 꼬리를 치켜 올리고 있는 원숭이는 무리를 이끄는 대장 원숭이 같았다. 나는 종합장을 펼쳐 그 원숭이를 옮겨 그렸다. 종합장은 언제나처럼 가방에 넣었다. 나는 종합장 크기보다 작은 가방을 산 적이 없었다. 그림은 어떤 위안보다 따뜻했다.

밤사이 갑작스럽게 영하로 내려간 기온 탓에 방안은 썰렁한 냉기가 돌았다. 이불을 돌돌 말고 눈을 감았다. 코끝에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찬 기운이 느껴졌다. 보일러 통에 석유를 채워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뒤척일 때마다 낡은 침대의 스프링이 찌꺽였다. 적막 속에서 스프링의 탄성이 녹슬어갔다. 이불깃으로 얼굴을 여미듯 덮었다.

“그 펜던트 특이하네, 무슨 문양 같다?”

뭐든 색다른 것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미스 신이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며 묻는다.

“벌새.”

“벌새? 어디서 들어 본, 아! 옛날 과학 시간에 배운 기억난다. 일 초에 수십 번 날갯짓을 한다는 그 새, 맞지? 그 새가 이렇게 생겼구나, 처음 보네.”

미스 신은 내 목걸이 줄에 걸린 펜던트를 신기한 듯 들여다본다. 내가 아는 벌새는 날갯짓과 상관없다. 내가 아는 벌새는 페루의 나스카 대평원에 그려져 있던 무늬였다. 로직퍼즐을 풀다 보면 7이라는 숫자라도 제각각 위치가 달라 무조건 일곱 칸을 채우면 제대로 풀지 못해 결국 지워야 한다. 말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 갈피에 숨은 의미를 해독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말을 이해했다고 말하지만 실상 이해 못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끔 옹알이할 때가 제일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둥근 몽돌 같은 그 옹알거림을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아들었을 테니까. 말 대신, 옹알거림으로, 눈빛으로 얘기할 순 없는 건가? 세상은 너무 시끄러워. 나는 말이 어긋날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손님에게서 소포를 받아들고 도착지를 확인한다. 뉴질랜드로 보내지는 소포다. 나는 슬쩍 소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내용물과 상관없이 캐나다나 뉴질랜드 쪽으로 가는 소포에서는 나무냄새가 난다. 소포에 대고 냄새를 맡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국제우편 요금 및 발송 조건표에 눈을 주고 검지손가락으로 나라명을 훑어 뉴질랜드를 찾는다.

“저기…”

퍼뜩 고개를 든다. 키가 껑충 큰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다.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

“주소를 정확하게 썼나요?”

“편지 안에… 그 편지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볼 방법이 없나요?”

“없어요, 혹시 모르니까 연락처를 적어놓고 가세요.”

남자는 실망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우물거린다. 나는 남자를 무시하고 다른 손님의 우편물을 받아든다. 남자가 주춤 옆으로 물러선다.

분실물로 들어온 두 대의 휴대전화를 본다. 하나의 휴대전화에는 긴 생머리의 여자와 남자가 다정하게 얼굴을 맞댄 스티커사진이 붙어 있다. 한 대는 최신형 휴대전화이다. 휴대전화의 플립을 열어본다. 창이 뜨지 않는다. 배터리가 다 된 휴대전화는 먹통이다. 번호를 꾹꾹 눌러본다. 02… 휴대전화를 귀에 갖다 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일일 분실 휴대전화 송부서를 작성한다. 이 휴대전화들은 모두 휴대전화 찾기 콜센터로 보내질 것이다.
▲ 그림=황주리
우체국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몇 사람은 문자메시지를 보내는지 계속해서 휴대전화 버튼을 눌러대고 몇은 통화를 하고 있다. 그 잠깐 사이에도 참지 못하고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어디를 가도 전화를 걸고 받고 통화하는 사람들이다. 휴대전화를 통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붙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향해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불안한 모양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교신하기 위해 스스로 중독됐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타전을 하는 사람들을 보자 문득 네로가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숫자대로 로직판을 검게 칠할 동안 네로는 침대 위로 올라와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다. 나는 로직퍼즐을 펼쳐 놓고 네로의 목덜미부터 온몸을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이건 원숭이야. 어때, 굉장하지? 넌 내 말을 다 알아들을 거야그치? 아웅. 기분이 좋아진 네로는 꼬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어느 날 네로가 현관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내 앞에서 꼬리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가만히 신발 등에 앞발을 올려놓았다. 검은 색과 흰 색이 섞인 새끼고양이로 눈동자가 크고 맑았다. 현관문을 열자 네로는 나를 따라, 제 집에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네로가 캔의 참치를 먹기 시작하자, 나는 네로의 엄마라도 된 기분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새끼고양이에게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고양이 이름은 네로 밖에 없었다. 검은 고양이 네로.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면 네로는 하루 종일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내 바지를 슬쩍 잡았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듯해 네로를 새삼스레 바라보곤 했다. 한동안 네로는 부쩍 발에 몸을 비벼대고 달라붙었다. 등뼈를 둥글게 하고 꼬리를 바깥쪽으로 감거나 아기 우는 소리를 내기도 했고, 식욕도 왕성해서 무엇이든 먹으려 했다. 아웅. 네로가 느리게 창턱에 올라앉아 움직이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멋진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네로와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우표 열 장만 주시오”

일주일에 편지를 두 통씩 붙이는 할아버지이다. 우체국 안 누구도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눠보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지금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직원들은 다 알고 있다. 할아버지는 밖의 우체통을 두고 꼭 안으로 들어와 바구니 안에 편지를 담는다. 우체국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잠깐 동안,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지팡이가 무색할 만큼 가벼워 보인다. 환한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얹혀 있다. 편지를 놓는 손길이나, 우표를 받아드는 손의 떨림이 할아버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니까. 봐, 얼굴에서 광채가 나잖아. 자기는 사랑하는 사람 없지? 언젠가 점심을 같이 먹고 나오던 동료가 말했다. 걷는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렇게 바쁜 걸음을 걷지 않지.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일부러 천천히 걸으려고 애썼다. 그 직원이 다시 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천천히 걸어도 가볍지. 발이 땅에 닿는지도 모르거든.

열 장의 우표를 건네주며 할아버지 얼굴을 바라본다. 고맙소. 소중하게 우표를 받아드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막 세수를 하고 나온 사람처럼 맑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우편물과 소포를 취급하지만 정작 나는 한 번도 소포나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우표를 지갑 사이에 구겨지지 않게 넣고는 지팡이를 고쳐 쥔다.

지팡이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린다. 어릴 적 내 옆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 손에는 언제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하고만 살아 온 나는 할머니처럼 얘기하고 행동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신이 나서 떠드는 로봇 태권브이나, 요술공주 세리 같은 만화영화 얘기에도 끼지 못했고, 아이들만의 은어를 쓸 줄도 몰랐다. 자연스레 아이들의 놀이에서 밀려났다. 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아이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내가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면서 망구망구 할망구, 하고 놀렸다. 아이들이 놀릴 때면 할머니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할머니가 지팡이로 땅을 땅땅 두드리면 아이들이 후다닥 도망을 갔다. 지팡이가 있으면 왠지 내 마음도 안심이 되었다.

할머니는 가는귀가 먹었다. 할머니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하던 나는 점점 귀찮아졌다. 할머니와 얘기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할머니와 나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할머니는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알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나마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 묘비 옆에 지팡이를 꽂아두듯, 내 말도 할머니 묘에 같이 묻혔다. 나는 늘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어느 날은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는 긴 뱀을 그리기도 하고,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그림의 주인공으로 삶기도 하고, 목을 길게 뽑고 있는 꽃을 그리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그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얘기도 나누었다. 저녁노을이 붉은 색을 덧칠해 검게 변할 때까지. 고아원 원장의 냉대도, 툭하면 건물 뒤로 끌고 가 나를 무릎 꿇려놓고 패는 언니나 오빠들도, 차가운 방바닥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다 잊을 수 있었다. 커서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그림의 형태나 종류도 세밀하고 다양해졌다.

자꾸 하품이 나왔다. 지독한 몸살감기 때문에 출근 전 약국에서 산 해열제와 편도선 약과 코감기 약까지 복용한 탓이다. 하루 종일 몽롱하다. 나는 기계적으로 소포 상자를 받아들고, 우표를 뜯으며 스탬프를 눌러댄다.

어제저녁 퇴근해서 지하방 문을 열었을 때 네로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내 발등을 핥았다. 나는 오다가 일부러 정육점에 들러 네로가 좋아하는 신선하고 연한 쇠고기를 샀다. 요즘 부쩍 식욕이 좋아져 무엇이든 먹고 싶어하는 네로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봉투를 문 앞에 내려놓고 네로를 번쩍 안자, 네로가 게으르게 내 목덜미를 핥으려 했다. 평화로웠다. 하지만 어두운 벽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고 네로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질겁하고 네로를 내동댕이쳤다. 네로는 자지러지듯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순간적으로 손등을 할퀴고 열린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다. 네로의 입 주변에 시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네로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했다. 달아나는 네로의 배가 불룩하게 늘어져 있었다. 가지마! 창턱에 올라선 네로가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네로의 날카로운 눈빛과 부딪쳐야 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창문 앞에 가서 네로를 불렀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검은 스웨터의 앞가슴에 묻은 흙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네로가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화장실의 좁은 창문으로 보이는 밖이 네로를 불러냈는지도 모른다. 나는 네로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지만 네로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손등에 맺히는 핏방울에 혀를 대보았다. 따뜻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로 들어갔다. 머리를 감고 싶었기 때문이다. 샴푸의 거품으로 머릿속을 비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이 나오던 샤워꼭지에서 갑자기 찬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대충 머리를 감고 수건을 터번처럼 두르고 나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건 밖으로 나온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 그림=황주리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점을 이루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방울과 물방울을 연결해나갔다. 일부러 머리를 흔들어 물방울들을 바닥에 뿌리기도 했다. 격자무늬 장판 모양 위에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폈다. 기하학적인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새. 하지만 새는 금세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건조한 방바닥의 물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그린 그림이 완전히 말랐을 때 나는 보고 말았다. 은행나무 옆의 벤치에 앉아 울던 나를. 도대체 너를 모르겠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공원 벤치에 어둠이 내려앉도록 앉아 있었다. 도대체 모르겠다니. 다 보여주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유일하게 나를 이해한다고 믿었던 그가 떠나려 할 때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내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볼펜을 꺼내 벤치를 긁어대고 있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러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나를 끌어안았다. 그 가슴은 넓고 단단했다. 나는 등 뒤로 안긴 채 울음을 삼켰다. 고개를 돌리려 할 때 그의 손이 스웨터를 우악스럽게 끌어올리고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전에 입술이 뭉개졌다. 들큰한 술 냄새가 확 끼쳐왔다. 놀라 뜬 눈 속에 낯선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때까지 힘주어 잡고 있던 볼펜으로 사내의 손등을 내리찍고는 도망쳤다. 뒤따라오던 낙엽 부서지는 소리.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까무러치듯 쓰러졌다. 공원 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었다. 그 일이 마음속에서 무심히 비껴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억이란 단단한 세월 속에서 느닷없이 톡, 하고 씨앗이 사방으로 터져버리는 봉숭아 씨방 같은 거라는 걸 나는 몰랐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보일러의 실내온도조절기의 확인램프를 보았다. 붉은 램프가 깜박였다. 단지 석유가 떨어졌음을 알리는 빨간등의 신호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냉기가 결국 가슴을 훑었다. 빨간등의 점멸이 우주 한끝에서 내게 보내는 모스부호처럼 느껴졌다. 그 작은 불빛은 점점 크고 깊게 보였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옹알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모스 부호를 해독이라도 한 듯 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지갑을 들고 공중전화를 찾아 나섰다.

그는 내게 근사한 저녁식사를 사주고 싶어했다.

빌딩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에서 적당한 음식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일식집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만개한 벚꽃이 그려진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이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그런 곳이었다. 벚꽃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등까지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두툼하게 썰린 회를 앞에 두고 조금 쓸쓸해졌다. 그가 내 앞으로 접시를 밀어놓았다. 많이 먹어.

살이 오른 그의 얼굴은 기름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몇 번이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 미묘한 차이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한 끼에 팔만 원씩이나 하는 식사를 앞에 두고 있는 만큼의 거리가 느껴졌다. 한 번도 그런 음식을 먹어본 적 없는 나는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젓가락을 들었다 놓곤 했다.

“페루의 나스카 라인, 기억나니?”

매실차를 마시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그래. 쿠스코의 태양제도 생각난다. 잉카제국의 태양제를 재현한다던 의식이었던가? 장관이었지. 라마인가 하는 동물 배를 갈라 꺼내 들던 그 시뻘겋고 뜨거운 심장은 우우, 대단했어.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그 심장의 펄떡대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니까.”

나는 더욱 쓸쓸해졌다. 같이 여행을 했지만 나는 나스카의 거대한 그림들을 먼저 추억하고 그는 쿠스코에서 보았던 태양제를 기억했다.

쿠스코에서부터 지루하고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을 달려 나스카에 도착한 뒤, 프로펠러가 달린 경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가 높이 떠올랐을 때에야 전체가 보인다던 거대한 그림들. 나는 긴장과 떨림으로 신음을 삼켰다. 아침에 식당에서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는 음식점 주인의 아기를 보았을 때 나는 그 그림을 보게 되리란 확신을 했다. 이 먼나라에서 우리 민족과 같은 몽골계통인에게만 있다는 몽고반점을 보았을 때, 나는 가볍게 흥분했다. 그림을 직접 보면 분명 무언가를 알게 될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낡을 대로 낡았고, 삐걱거리며 심하게 흔들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왼쪽 라인을 돌고 다시 접듯이 반대쪽으로 돌며 그림을 보여줬지만 비행기가 당장이라도 추락할 것 같아 안전벨트를 움켜잡아야 했다. 아찔했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벌새, 콘도르, 거미, 나무. 그 그림을 정확하게 볼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모은 적금을 타고 여행을 준비할 때의 설레던 마음이 사라졌다.

세계의 미스터리를 소개하는 책에서 나스카 문양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그림들은 내가 혼자일 때마다 그려왔던 그림과 많이 닮아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다. 그 그림 속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혼자라고 생각할 때에도 누군가는 나에게 교신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끔 농담처럼 말했다. 너 혹시, 외계인 아니니? 너는 외계인인데 네 기억이 지워져서 네가 외계인인 줄 모르는 그런 거 말이야. 나는 나스카 문양을 보면서 그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정작 나스카에서 내가 본 것은 거대하지만 희미한 그림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나스카 라인의 은으로 된 펜던트를 선물했다. 펜던트에는 벌새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말했다. 꼭 다시 오자고. 하지만 그는 나스카 라인을 다시 보여주겠다던 약속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음 달이면 삼 년 만기 정기적금을 타게 된다. 나는 다시 페루로 여행을 갈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또다시 나스카 라인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나는 아예 입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행을 주저하게 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 그가 슬쩍 손을 잡았다. 축축하게 땀이 밴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는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성급하게 나를 끌어안고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벨트를 풀었다. 내 몸을 더듬는 그 손길은 그대로였다. 도대체 너를 알 수가 없다고 말하던 그 이전의 그. 그러나 벽면의 대형 거울을 통해 담배를 피우는 있는 그의, 완강해 보이는 등은 내가 알고 있는 등이 아니었다. 등의 땀이 식고 담배를 연달아 피워대던 그가 옷을 꿰입으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번호 불러줘.”

“…없어.”

“왜, 싫어?”

“아니, 정말 핸드폰 없어.”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휴대전화가 없었으므로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휴대전화가 없는 나는 이 세계에서 다시 외계인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쓰는 이모티콘, 은어, 기호들을 전혀 몰랐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의미가 되고 말이 되는지도.

긴장이 풀렸는지 지하철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어쩌지 못하고 잠에 취해 있는 동안 지하철은 달렸다. 그를 만나는 내내 긴장했는지 어깨가 뻑뻑하게 굳어 아팠다.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설핏 잠이 깼을 때는 내릴 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여기저기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고, 그때마다 나는 순환선 밖으로 밀려나 까무러치듯 잠 속으로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잠에서 깨어 집에 도착한 시각은 한 시가 넘어 있었다. 어두운 거실에는 여전히 보일러의 실내온도 조절기 확인램프가 깜박였다. 네로. 어둠 속에서 네로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아무 기척도 나지 않았다. 몇 번 네로를 불러보다 찾기를 포기했다. 피곤해서 씻지도 못하고 그냥 침대 위에 쓰러졌다. 낡은 침대 스프링이 출렁였다.

배가 축축해왔다. 잠결에 배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까칠한 감촉과 끈적이는 무언가가 스웨터 속으로 스미고 있었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고 오싹 소름이 돋았다.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배 밑에 죽은 쥐가 내장을 드러낸 채 헤쳐져 있었다. 쥐의 검은 눈동자가 까맣게 빛을 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웨터에도 쥐의 내장이 너덜너덜하게 붙어있었다. 차마 손을 보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돗물을 틀기도 전에 구토가 밀려왔다. 변기를 붙들고 저녁에 먹은 부드러운 생선살을 와락와락 토해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까지 씻지 못한 손에 샤워기를 갖다 대고 스웨터를 벗었다. 몇 번씩 비누칠을 해가며 온몸을 닦고 나왔을 때, 오소소 한기가 몰려왔다. 샤워를 할 때는 물이 차다는 사실조차도 미처 몰랐다. 옷을 가지러 방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덜덜 이를 부딪치며 건조대에 널려있는 미처 마르지 않은 옷을 걷어 입을 수밖에 없었다. 드라이기로 머리와 몸을 대충 말렸다. 거실 겸 부엌으로 된 좁은 공간에 무릎을 세우고 팔짱을 끼고 쭈그려 앉았다. 몸이 떨려 누울 수가 없었다. 헤어 드라이어의 온풍으로 머리와 몸을 데웠다. 잠깐은 괜찮았지만 추위를 몰리게는 어림도 없었다. 둥그렇게 몸을 말고 냉장고 옆에 기댔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등으로 전해져 오는 것에 위안을 느꼈다. 모터 소리가 끊기면 다시 그 소리가 울릴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중간중간 드라이기를 켰다.

싱크대 밑에 있는 페스트푸드 점에서 주는 감자튀김용 일회용 케첩소스가 눈에 들어왔다. 케첩은 비닐이 뜯겨진 채 피처럼 짓이겨져 눌러 붙어 있었다. 네로의 입에 묻어 있던 검붉은 피가 떠올랐다.

행복을 파는 우체국?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오면 왼쪽 벽 액자에는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라는 시가 적혀 있다. 행복을 파는 우체국이라고 쓴 글귀는 시 제목 위에 있다. 아이 엄마는 번호표를 뽑고 금융 업무를 보는 코너에서 공과금을 낸다. 아이는 소파 위에 올라서서 띄엄띄엄 시를 읽는다. 오늘도, 나는, 에머, 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주연아, 뭐하니? 공과금을 낸 엄마가 아이 손을 잡아 끈다. 빨리 와! 엄마, 우체국에서 행복을 판데. 어떻게 행복을 팔아? 아이 엄마는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유리문을 연다. 그건 말이야, 아이 엄마의 목소리가 유리문에 잘려나간다. 아이가 서 있던 자리에 어느새 보험설계사가 앉아 있다. 그녀는 편지를 수십 통 쌓아놓고 수첩에 적힌 주소를 편지봉투에 옮겨 적고 있다. 우편물 중에는 행복이나 사랑을 속삭이는 편지보다는 카드회사나 공과금고지서 같은 공공성을 띤 우편물이 훨씬 많다.


내 그림 담은 소포 안에서 난 잠이 들고

소포는 페루의 나스카로 배달된다

그림이 상자 밖으로 나오자 난 눈물이…


집배원 아저씨가 몇 통의 우편물을 꺼내 놓는다. 우편물을 확인하는 동안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오십 원을 꺼내 준다.

“이 편지 좀 다시 붙여줘.”

아저씨가 내민 반송된 편지에는 이백 원짜리 우표가 붙어 있다. 이십오 그램 이상 나가는 편지는 이백오십 원짜리 우표를 붙여야 한다. 받는 사람은 포천 군부대의 김정석 이병이다.

“아들 군대에 보내 놓고 얼마나 구구절절이 썼겠어. 목 빠져라 답장을 기다릴 텐데 집으로 반송하지 말고 오십 원 보태서 다시 보내 줘.”

아저씨가 슬쩍 웃는다. 나는 오십 원짜리 우표를 이백 원짜리 우표 옆에 붙인다.

“저기…”

오전에 왔던 그 키 큰 남자이다.

“누가 그러는데 마감 시간에 오면 되돌아온 편지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요.”

“이름이 뭔데요?”

집배원 아저씨가 남자에게 묻는다.

“가만 있어보자.”

아저씨는 주소가 부정확해 되돌아온 편지들을 살핀다.

“그런 이름은 없는데요.”

남자의 어깨가 쳐져 돌아선다. 문으로 걸어가던 남자가 다시 돌아온다.

“저, 며칠만 여기 나와서 편지를 확인해 봐도 될까요?”

“이름을 적어놓고 가시면 연락 드린다니까, 좋으실 대로 하세요.”

남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이 차 편별 마감을 한다. 국제소포와 자국 편으로 보내질 것, 집중국으로 보내질 우편물을 분류해 커다란 자루에 넣고 송달증을 첨부한다. 집배원이 놓고 간 반송된 편지 가운데 주소가 불확실한 편지들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수취인 불명이거나, 주소가 부정확한 편지들이 하루에도 몇 통씩 되돌아온다. 보낸 사람의 주소가 없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버릴 수밖에 없다.

“슬슬 퇴근 준비 하라구.”

국장이 기지개를 켜며 코트를 집어 든다.

오늘 나간 사백 오십 장의 우표와 입금액을 확인한다. 일반우표 말고도 별납 처리된 편지만도 이천여 통이 된다. 몽롱한 약 기운 탓에 여러 번 다시 계산해야 했다. 나는 팔린 만큼의 우표를 주문하고 입금액을 맞춘 다음 자리를 정리한다. 내 눈길이 어둠이 내려앉는 우체국 안에 잠시 머문다. 국장 자리에 있는 CCTV가 희미하게 몰려드는 어둠 속으로 푸른빛을 흘린다. 여섯 군데 설치된 카메라는 어둠을 응시하며 저 혼자 밤새 눈을 뜨고 있을 것이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약을 털어 넣는다. 국장이 퇴근하고 직원들이 옷을 갈아입는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간다. 스팀이 들어오는 탈의실은 따뜻하다. 나는 냉기로 가득 찬 방을 떠올린다. 스팀에 등을 대고 두 손을 등 뒤로 넣는다. 할머니의 온기처럼 따뜻하다. 아니, 엄마의 자궁 속처럼 평화롭다. 쭈그려 앉자, 저절로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다 나갔지? 또각또각 구두 발자국 소리가 멀어진다. 철컥. 멀리서 쇠가 결합하는 소리가 들린다.

약에 취해 탈의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깨었다. 탈의실 문을 열자 가로등 불빛이 버티컬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실내는 CCTV만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낮 동안의 분주함이 사라지고 청록으로 빛나는 밤의 우체국은 낯설다. 문은 밖으로 잠겨 있다. 문을 밀어본다. 꿈쩍도 안 한다. 나는 불을 켤까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둔다. 국장의 자리로 다가가, CCTV모니터를 본다. 여섯 개로 분할된 화면 중에 위쪽 가운데가 내 자리였다. 나는 낮 동안 앉았던 자리로 돌아간다. 모니터의 여섯 칸 중 한 칸에 유령처럼 서 있는 내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서랍에서 EMS국제특급우편용지를 꺼낸다. 펜을 들고 꼭꼭 눌러가며 보내는 사람의 칸을 채우다가, 받는 사람의 주소지를 써야 할 때 나는 잠시 망설인다. 뉴질랜드나, 캐나다 어디든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쓴 나라는 페루이다. Nazca, Peru. 볼펜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마음이 설렌다.

마음이 들 뜬 나는 6호 택배상자 두 개를 위아래로 튼 다음 박스 포장용 누런 테이프로 여러 번 단단하게 두른다. 그리고 상자 윗면에는 EMS국제특급우편용지를 붙인다. 손이 가볍게 떨린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우편물과 소포를 취급하지만 정작 나는 한 번도 소포나 편지를 보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새삼 쓸쓸해진다. 가방 안에서 종합장을 꺼낸다. 그동안 그려왔던 그림들을 꺼내 뒷면에 풀칠을 하고, 상자 안쪽에 붙인다. 작은 방 안을 그림으로 도배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상자 밑면이 벌어지지 않도록 테이프를 여러 겹 겹친다.

나는 소포 안에서 잠이 들고, 소포는 페루의 나스카로 배달된다. 어려서부터 홀로 그려왔던 그림들과 똑같은 그림이 나스카 대평원에 펼쳐져 있다. 내가 그려왔던 그림들이 상자 안에서 나온다. 나스카인들이 천 년 동안 그린 지상 최대의 그림들 위에서 내가 그렸던 그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림들은 끝을 알 수 없는 크기로 늘어난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천오백 년 이전의 그림들과 포개져 합일을 이룬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옹알이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가슴 벅차게 한반도의 작은 땅덩이에서 페루의 소도시까지 시공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중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