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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침소로' 심포지엄 소감

수로보니게 여인 2017. 7. 4. 11:55

'왕의 침소로' 심포지엄 소감(아비가일 2셀 윤영애)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제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마 22: 1, 2, 6, 7절 말씀


할렐루야~


주님이 주인 되시는 포도원에 들어갈 자격은 물론이고, 주님의 신부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인생을 불러, 십일 시와 같은 때에 포도원으로 불러주신 은혜도 막중한데,

때마다 시마다 말씀으로 저를 비춰보게 하시고 죄 된 모습을 깨달아 주님의 신부로 단장시켜 가시는 나의 주인,

나의 신랑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2012년 10월 8~ 11월 5일까지 5주간 동안 열렸던 중보기도학교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장3절 말씀)를 주제로 하여 수료한 이 후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자의 특권, 즉 하늘나라의 계산방식에 따른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누리고 있는 은혜 위의 은혜를 찬양으로 올려드리기 원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때 2012년 10월, 제4기 중보기도학교가 열렸던 첫 시간을 기억해봅니다.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중보기도자'라는 타이틀이 걸린 현수막을 보던 그 때,     

제 안에는 ' 아~ 내가 공연한 호기를 부렸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어떤 감동 즉, 두 마음이 저의 생각 속에 밀려들 때를 생각해봅니다.

첫 시간을 마쳤을 때 성령님은 

전자의 생각은 아직 시작도 안 된 중보기도학교 분위기가 어떤 중압감으로 밀려왔기 때문이며,

동시에 따듯한 감동이 밀려와 설렘으로 가득했던 이유는,

2010년 등록 후 계속 중보기도에 대한 소원을 품고 있었던 것에 대한 응답이,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중보자'들의 무리 속에 제가 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세상에 내가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자라니'


그간의 종교인의 삶을 살았던 저의 삶 속에서 그저 기도는 신앙인의 호흡과 같아 안 하면 안 되는 것이고,

그에 대한 결과 즉, 응답은 아주 소극적이고 추상적이어서 현실에서의 기도, 더욱 중보기도는 신앙인으로서 해서 나쁘지 않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손을 움직일 수 있다니,

이러한 주제는 저를 셀레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 설렘은 '호기는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부터 오는 중압감을 밀어내고 수료하게 했으며,

그로부터 지금까지 중보기도(예중,목중)에 대한 응답을 한 번도 예외 없이 손에 잡게 하시고 목도케 하시는 은혜 속에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올려드리는 예배중보기도에 대한 응답은, 매 주 먼저 중보하는 저를 예배 때마다 말씀으로 만나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저의 얼룩지고 쓰라린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과 비밀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목회자 중보로 인한 응답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 곧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 목사님을 통하여 열방까지 흘러가는 것을 목도하게 하시는 것으로 감추어졌던 비밀(고전 2장 7절 말씀)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압감과 감동으로 시작된 중보기도,

그 사역은, 시간이, 달이, 해가 더해짐에 따라 나의 나 됨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저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고, 결코 주님의 신부될 자격 없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신부의 자격, 그 자격에 걸맞는 정결한 성품이 내 안에 주어지기를 갈망하며 성전 바깥 뜰을 서성이는 것만으로도 감사와 찬양이 나의 혼을 가득 채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바깥 뜰이긴 해도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특권은 결코 양보할 수도, 놓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또 믿으며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할 것이라는 결단에 사탄은 슬금슬금 금을 긋기도 했습니다.


가끔,

아주 가끔은 시계추처럼 쉼 없이 드나들며 드리는 중보기도에 대해 값지불 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고,

우리가 올리는 기도가 향이 되어 하나님보좌까지 올라가, 그 기도가 하나님의 동역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던 사모님의 말씀이 정함 없이 생각 속을 표류하며 혼에 보이지 않는 덫을 놓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중보를 멈추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 모세, 바울 등, 그들이 올린 중보기도를 도구로 삼아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래도 연약해질 때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제 안에서 저의 손을 붙들고 이끌어 오신 성령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음도 고백합니다.  


그런 중에도 충만의 비례로 종교인의 삶을 사는 동안 쌓아 놓았던 아직 남아 있는 쓰레기 정리로 오는 탈진,

심포지엄을 하는 동안 숙제로 주어진 기도에다 교제를 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하는 부담감은 7장을 할 쯤 더욱 영혼을 옥죄어 '올 해 까지만 예중과 목중을 하고 다음 해에는 둘 중 하나만 햬야겠다.'는 합리적 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것이 일상에서의 부담감을 조금 더 덜어줄지 저울질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여호와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의 앞에 이러하니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하였을지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이사야 26: 17,18절 말씀 


그런데 성령님은 8장을 교제하고 난 후 내가 신랑이신 주님께 무엇을 낳아 드렸는지 계속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왕의 침소로' 심포지엄을 마치며 새로운 결단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그저 성막 바깥 뜰만 오가며 예수님과 약혼한 것으로 만족하던 삶과, 혼의 기쁨으로 만족했던 성소에의 신앙에 머물지 않고 휘장 너머 지성소까지 들어가 열방을 향해 구애하는 그분,

그  주님을 닮은 자녀를 낳아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신부가 되기를 소원하고 소원합니다.


왕의 침소 심포지엄을 통하여 깨끗한 세마포를 준비하고 문을 두드리는 신랑의 소리에 귀 기울여,

결혼 관계의 결과를 안겨드리는 일에 동역을 이룰 열정적 기도와 중보로, 나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를 사는 예언적 삶으로 나갈 것을 선포합니다.


몸은 물론, 혼을 오로지 하여 영의 통치 아래 머물게 하기 위해 나의 때를 살고자 하는 생각을 다 내려 놓고,

21세기에 21주년을 맞아 복음이 생명 낳기를 향해 달려가는 교회 가운데서, 신실하고 친밀한 중보자의 삶으로 하늘신랑과의 사랑관계를 전하는 주님의 편지로 살것을 새롭게 결단하며,

내 영혼의 연인이며 신랑이신 예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