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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 하‘ㄹ’ 땅으로

수로보니게 여인 2014. 12. 27. 16:55

 

 

지시 하‘ㄹ’ 땅으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오늘이 두 번 째이다.

날아간 파일을 찾느라 좌충우돌 헤매는 것이.

이번에도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또 다시 쓰는 걸로 갈피를 잡았다.

 

첫 번째는 23일과 24일의 어간이다.

24일, 저장했던 파일이 날아간 것을 발견하고는 시쳇말로 ‘맨붕’ 그 자체였다.

무엇을, 어떻게는 다음일이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먼저 생각해야했다.

웬만한 일로는 당황할 줄 모르는 타고난 성격도 이때는 정말 어찌해야하는지, ‘정신적 혼란, 파탄, 공황’을 다 합쳐도 그때의 심경을 다 표현할 수 없어 그냥 ‘맨붕’이라고 쓴다.

시쳇말을 쓰는 이유를, ‘너희가 게 맛을 알아?’라는, 즉 고군분투의 쓴 경험을 한 마디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희대의 명대사 광고 문구를 여백으로 남겨두고.

 

암튼 다시 25일, 첫 번째 파일을 잃고 이틀을 잃어버린 파일 찾아 네모상자 속을 헤매던 날, 그날은 그냥 울고 싶었다. ‘나아가야 하는지 멈추어야하는지’의 사이에서 그 답을 구하는 마음으로, 없어도 그렇게 없는 시간을 할애해, 이주간의 어간동안 내가 신뢰하고 또 의뢰하는 그분께 묻고 또 묻는 마음을 옮겼었는데.

 

그 금보다 귀한 시간이, 아니 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이다.

 

‘하나님의 사인이 없는 감정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바 있는데 더하여, 말씀을 근거로 한 목사님의 말씀, 창세기 강해 외에도 모든 말씀마다에서 깨달은 그 진리를 생각과 생각 사이에 두고 보낸 시간 시간들.

 

그분의 뜻, 내 아버지의 뜻을 찾고 찾던 시간이기에 그 시간은 정말 ‘금보다 귀한 시간’이라 하여도 넘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더구나 1월 11일부터 ‘제4기 창세기 강해’가 있다는 게시물을 보고는, 강해가 시작되기 전에 이글을 마쳐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25일 성탄예배를 드리고 돌아와 삭제파일복원에 또 몇 시간.

파일복원은 시간만 낭비라는 생각에 서둘러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소제목까지 붙여 마음을 다잡고 다시 쓰기 시작한 이틀의 시간까지 사라져버린 오늘(27일)의 심정은 ‘참담’ 그 자체이다.

멈추라는 하나님의 사인인가? 하나님께서는 ‘두 번으로 그 뜻을 확증시켜주신다’고 요셉의 꿈을 들어 말씀해주시던 부목사님의 말씀도 들려왔고, ‘실수를 통해서도 일하신다’고 하시던 담임목사님의 말씀 아브라함의 예는 또 다른 메시지로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은,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확증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하나님 어찌 해야 할까요?

이 일이 저의 생각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는 아집의 소산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라는 마음을 그분 앞에 내려놓고 세 번째 답 구하기의 여정에 나선 것이다.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소제목을 흉패로 걸어두고 쓰기 시작한 마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고 하신 여호수아 6장 10절 말씀이 묵상되었다.

 

말씀이 떠오르는 순간 들레던 마음위로 고요가 내려앉았다. 비로소 말로만 앞세우던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를 바라보게 된 마음은 잔잔해졌고, 그 위를 소리 없는 바람이 지나갔다.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 9장14절 말씀을 마음 중심에 세워두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나의 감정으로만 들레던 날들을 실수로 날려버리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글의 큰 제목 소제목을 모두 바꾸었다는 변도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어휘선택을 어떻게 해야 하나?

처음 글은 그에게 쓰는 편지글의 형태를 취택 사용했었는데…….

.

.

.

독백형식을 빌어 글을 쓰고자 한다.

할 수 있는 대로 나의 감정은 배제시키고, 객관적 페이스를 따라 그분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역시 두 번의 파일을 날리고 난 후 일어난 커다란 변화이다.

글의 판도는 완전히 바뀔 것이며, 글이 닿고자하는 대상 역시 다른 곳을 향해 있다는 것이 독백을 취택한 근거가 되겠다.

 

 

 

하나님 앞에서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나선 길임에도 그 음성을 제대로 캐치하지 못한 건 내비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일상이 이유이다. 좌·우회를 지나쳐하다 보니 예상된 시간을 초과한 것이다. 초행이니만큼 조금 일찍 출발했으면 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으나, 나의 일상은 그 조금의 시간을 허락지 않는다는 변을 먼저 한다. 집에는 지난해에 모셔온 치매를 앓는 어머니가 계시고 그를 캐어하시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 시간이면 세끼 중 한 끼를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다. 아침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시간도 안 되지만, 지지난해 11월부터 시작한 금식이 아직 한 달여를 남겨두고 있던 때인 까닭에, 토요일이나 주일 아침에도 두 분만 식사준비를 해드리고는 한다. 애초의 서원은 건축기간으로 예정된 15개월 정도였는데, 그에서도 반년 이상을 더 보낸 지금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건축완공 소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새벽일을 마치고 돌아온 시간에 서둘러 점심을 준비해서 그나마 하루 한 끼의 식사를 부모님과 함께해왔는데, 그곳 일을 12시부터 4시까지 설정해서 약속한 이유로 집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서둘러 식사준비를 하며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두 주간 동안 12시부터 한 가지 일을 더하게 되어 식사를 함께할 수 없노라고. 내비게이션이 예상해준 소요시간이 20여분이라고 하니 11시 30분에는 출발을 해야 한다고. 식사를 막 시작하시는 두 분을 뒤에 두고, 죄송한 마음을 서리서리 안은 채 집을 나섰는데도 12시가 넘을 것 같았다. 5분쯤 남겨둔 지점에서 우회를 놓친 걸 알고는 얼른 그의 동생 분께 전화를 걸었다. 조금 늦을 거 같다고. 가다가 한 번 더.

 

“괜찮습니다. 월요일이라 집에 사람이 있으니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라는 허락은 받았지만 처음 방문에 완전한 실수를 한 셈이다. 당도해서 가르쳐준 현관 번호를 누르는데, 것도 생각처럼 되질 않아 결국 5분여의 시간을 지나 입성을 하게 되었다. 그 때의 조급함은 차라리 절박함에 가까웠다. 처음 이미지, 그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중문을 열고 넘어질 듯 들어서니 방 한 가운데서 그가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그의 동생 분도 함께였다.

동생 분은 ‘안녕하세요?’라고 한 것으로 기억되고,

그는 얼굴 가득 커다란 웃음을 머금은 표정인사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안녕하세요?’와 ‘반갑습니다’라는 나의 인사는,

두 분에게 한 다른 인사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대면을 한 것이다.

동생 분은 세탁기 사용법과 식사에 대해 몇 가지 알려주었고,

나에게도 그곳에서 식사를 하라는 권유의 말을 하고는 어디론가 나간 것으로 기억된다.

 

‘뭘 해야 하지?’라는 속엣 말을 들은 듯,

그는 휠체어를 책상 쪽으로 밀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언어가 안 되는 걸 몰랐던 터라 황망히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책상으로 가자는 말씀인가요?’라는 반문을 던졌고,

‘그렇다’는 신호를 그가 해왔다.

휠체어를 살피려니 개조된 듯한 손잡이가(아닐지도 모름)검은 테이프를 겹겹이 붙이고 있어 약간의 당혹을 일게 했다. 장애 정도를 말해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어설프게 휠체어를 밀어 책상 상판까지 그의 몸을 밀착시키고는,

‘됐나요?’ 하고 물으니

‘그렇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벽 쪽에 있는, 책상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를 향해 눈짓을 한다.

 

‘뭘 하라는 거지?’ 그때부터 나의 머리 굴리기는 시작되었다.

‘의자’ ….

‘벽’ ….

‘다시 의자’

……

 

거기 앉으라는 건 아닐 테고…,

 

10~15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의자를 책상 옆으로 당겨 놓으라는 건가요?’하였더니

그렇다는 사인을 주었다.

당겨 놓고는 ‘뭘 하려는 걸까?’ 하는 생각 사이로 캐치 못한 것들이 빠르게 지나갔고, 그는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나를 당겨놓은 의자에 앉으라는 뜻의 그의 다음 표정은 조금 전의 당혹스러움보다 더 크게 나를 동요시켰다. 의자와 그가 앉아있는 휠체어의 거리가 한 뼘도 채 안 된다는 것이, 초연을 가장하고 있는 내게는 드러낼 수도 드러내서도 안 되는 부담이었던 것이다.

 

‘저 일 해야 되는데요, 앉아있을 시간 없어요’라는 내게 그가 채근하는 표정을 보였다.

부담감을 털어내려는 마음으로,

‘주인이 앉으라시면 앉아야지요.’하면서 어설프게 다가앉았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마음으로 다시

‘저의 주인은 이제부터(선생님이라고 하려다)승호 씨이니 주인께서 하라시는대로 하는 것이 제 일이자 임무겠지요’하며 다가앉았다.

그는 다가앉는 나를 향해 고맙다는 목례를 하며 바탕화면의 파일 하나를 클릭하였고,

나는 모니터에 가득한 그의 인사말을 볼 수 있었다.

 

 

인사말은

‘만나서 반갑습니다’로 시작되었다.

다음은 나이,

그리고 자신을 ‘철저한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요일별로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기억된다.

빨래하는 요일은 월요일과 금요일.

세탁된 빨래정리는 장롱 서랍에는 무엇을 어떻게.

TV 밑 서랍도 위아래를 구분해 무엇 무엇을 것도 어떻게.

양말은 또 어쩌고저쩌고….

속으로 ‘보면 다 알 수 있는데….

식사는 미역국과 밥으로 하는데, 국은 시각적 효과를 주기 위해 건더기를 조금 넣어.

속으로 ‘그러면 건더기는 시각적 효과만…?’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던 듯한데,

기억나는 건 ‘철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속으로 ‘그렇다면 나의 철저한 근성이 빛을 발하겠군’이란 생각을 하며,

‘저는 몇 년생이고 이름은 OOO’에요.

그리고는 주위를 환기시키려는 요량으로

‘제가 누나네요’라고 했는데,

나의 그런 의도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몸으로,

그만한 인사말을 엮어내느라 보냈을 시간을 생각하려니

‘아픈 감탄’ 그것만이 내 안에서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세상에…’

……

‘이 글을 밤새 쓰셨나요?,

아니면 아침 내 쓰셨나요?’

.

.

.

열흘의 시간을 나에게 맡긴 선생님으로부터 ‘글을 잘 써요’라고 듣기는 했다.

나는 글을 잘 쓴다는 말을 장애의 경중으로 비례해 생각했고,

그날은 다큐의 한 장면을 눈으로 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내가 아는 상식대로

뇌성마비

급수는 모름

오른 팔 거동 안 되고

왼 팔 겨우

것도 손놀림 안 됨

검지만 겨우 펴 키보드 위로 끌고 다니며 자음 모음을 엮어냄.

여기까지가 처음 만남에서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이다.

2·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기까지.

 

그가 힘들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이

‘알았느냐?’는 표정이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마음이 약간은 긴장되었던 듯하다.

……

몇 초의 똑딱거림이 어색해 내가먼저 말을 꺼냈다.

‘철저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고,

취미는 어떤 것이 있나요?’

……

잠시 후

왼손 검지가 키보드 위를 왔다 갔다 하는가 싶더니

‘야동’

…(대략 어색)

또 잠시 후

‘오직 여자’

띵…, (대략 난감)

괜한 질문을 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

 

분위기 반전이 필요했다.

약간은 얼굴이 뜨뜻해진 걸 느끼며,

‘전 사실 얼마 전까지 야동이 뭔지 몰랐어요.

그것이 야한 동영상이란 걸 안 것은 몇 년 안 되었지요.

만학 시절 어떤 자리에서 학우들이 하도 야동 야동 하길래 야동이 뭐냐고 물었지요.

시선 집중 온몸으로 받아야 했답니다.

그중 몇몇 학우 정말 모르는 거야? 하더군요.

그 때 알게 된 또 한 가지 재밌는 일이 있어요.

탤런트 김태희 씨가 한 참 인기를 누리던 시기였는데

저는 그 유명하다는 김태희 씨를 몰랐답니다.

특히 남자 분들 김태희 하면서 블라블라…….

속으로 ‘누구지?’ 하다가 또 물었지요.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인데?

…….

그런 저를 학우들이 바보라 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이방인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했어요. 그렇다고, 그런 걸 모르는 제가 창피하다든지 시대를 못 따르는 무지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살아가는데 그런 사람을 꼭 알아야할 이유가 있다면 배워서라도 알아야겠지요. 단지 미디어와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런 걸 모른다는 것이 창피한 일이 될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야동을 본다고 욕구가 채워지나요? 물론 일시적으로는 해결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완전한 채움이 되지 못하니 반복으로 이어지고 결국 그 갈증은 자신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보는 것에 영향을 받게 되어있어요.

(내 생각이 그러한데 더하여) 우리 목사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말씀이거든요.

하와가 보는 것에서 실패한 결과가 죄로 이어졌다고.

……

 

‘분위기 반전시키려다 바닥 된 건 아닌가?’하는 염려에 그의 표정을 살피니 진지한 공감을 드러냈다.

 

……

 

우리 이제 뭘 하지요?’

‘식사는 몇 시에 하시나요?’

……

드러내지 못하는 어색한 마음은 상관없는 듯 별 반응이 없다.

 

‘그러면 오늘이 월요일이니 빨래를’하면서, ‘저 세탁기 돌려야지요?’ 물으니 끄떡인다.

‘그러면 세탁기 작동시키고 올게요’ 하며 일어나려니까 잠간 있으라는 사인을 준다.

그리고는 세탁물을 뭣뭣은 주머니에 넣으라고 자음 모음을 엮는다.

‘네 알겠어요’하고 나가 절전 스위치를 사용하는 세탁기를 작동시키는데 세탁기와 연결된 수도꼭지가 잠겨있어 그것까지 열어야 했다. 그네들의 생활습관과 제법 절약정신이 배어있다고 자처하는 나의 생활습관을 견주며 들어와 ‘세탁 망 사용법이 저와 다르네요’ 하니까, ‘어떻게’냐는 물음을 던진다. ‘저와 반대에요, 저는 속옷이나 수건 같은 걸 망에 넣거든요.’ 하면서 반대인 이유를 물었다. 왈, 겉옷에서 세탁부스러기가 흰 빨래에 묻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내가 반대로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했더니 ‘그래도’라는 반응을 보인다.

 

‘혹시, 망이 하나 더 없나요?

겨울옷이라 셔츠 하나만 넣었는데 가득 찼어요.

그래서 바지는 그냥 넣었어요.’ 했더니 알았다는 표정이다.

식사는 아직 더 있다가 하나요? 라는 질문에 그가 창문 쪽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본다.

대충 나머지 할 일을 계산하고 그럼 두 시에 할까요? 물으니 그러자고 한다.

남은 시간이 십여 분 남짓인 걸 확인하고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개켜놓은 세탁물을 다시 개키며,

‘이건 누가 개켰나요?’ 물으니 거실 쪽을 향해 턱을 들어 보인다.

‘제수씨요?’ 라는 나의 질문에 고개가 좌우로 움직인다.

동생이라는 대답으로 여긴 나는

‘그렇지 여자의 손길은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며 내친김에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선생님은 오신지 몇 년 되셨나요?’ 물으니

내 질문이 재미있는지 커다랗게 웃으며 5년이라고 쓴다.

그리고는 이름까지.

그를 웃게 하려던 의도는 적중했고,

궁금했던 선생님의 이름은 물론 그들이 공유한 시간까지 알게 되었다.

‘그분은 나랑 통화 중에 6년이라고 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그러면 눈빛만 봐도 뭘 원하시는지 다 알겠군요’ 했더니

매우 그렇다는 표정이다.

‘제가 그 선생님만큼은 못하겠지만, 하나님 앞에 있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래도 2프로 부족하다든가, 또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을 거예요.

그러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저도 바로 수정 보완토록 할게요’라고 했다. 진심으로.

그리고는,

(주저하며)

‘두 주간 승호 씨가 저의 주인이라고 했잖아요’라고 했다.

……

 

목사님을 통해서 어제도 오늘도 들었고, 또 듣는 말씀이다.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자세로 모든 사람 앞에, 또 모든 일에 임하라.’

‘자세, 즉 동기가 중요하다’라고 하신 말씀이 비수처럼 골수에 꽂혀 나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유로움인가!

그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은혜이며 비밀이다.

더러는 옛사람의 잔재가 비수에 재를 뿌리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란 표현이 익숙지 않은 듯 어색해 하던 그는 이내 ‘고맙다’고 했고,

하나님은 또 다른 말로 그를 위로하게 하셨다.

그의 가슴을 가리키며,

‘이 안에 예수님이 계실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거지요’라는 말로.

거듭 고맙다는 그의 주억거림이, 잘 익은 이삭의 흔들거림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다시 개킨 세탁물을 그가 말한 대로 여기저기 찾아 넣었다.

물론, ‘제가 서랍을 열어서 정리해도 될까요?’ 하고 물었고,

‘그렇게 해도 좋다’는 그의 답을 얻은 후의 일이다.

 

두 시 남짓인 시계를 보고는

‘이제 식사를 하셔야겠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는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휠체어를 주방으로 밀고 가서는

‘이쪽으로?, 저쪽으로?’,

식탁 가로와 세로 어느 쪽에 앉을 건지를 묻는 말이다.

세로 쪽이라는 답을 듣고,

그쪽으로 휠체어를 밀어 넣으며 식탁 다리가 약간 틀어져 있는 이유를 알았다.

휠체어에 얹힌 그의 다리가 식탁 다리를 중앙에 두고 깊게 밀어 넣어야 그나마 식사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걸.

 

비뚤어진 식탁 다리를 보고 속으로

‘저걸 왜 비뚤어진 채로 놔두었지?’란 생각이 들면서,

‘우리 거라면 내가 바로잡아 놓으련만’ 하던 생각이 얼마나 오지랖 넓은 생각이었으며, 남의 일을 함부로 재단하는 나쁜 습관이란 걸 깨닫는 순간 보는 이 없이도 부끄러웠다는 고백을 한다. 이러한 습관이 내 안에서 없어지기를 소원하며.

 

밥그릇을 어떤 걸 사용하는지 물었다.

‘그것’이라고 하는 그릇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놋주발과 대접 한 벌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컵 하나, 사기 주발 하나와 함께 쟁반에 세팅되어 있는 걸 보고는 궁금함을 못 이겨 밥그릇을 뒤집어 보았다.

'유형문화재 00호’라고 새겨져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귀한 것이라 형님 것으로 했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부모님께서 혹 문화재 보유자셨을까? 란 생각을 하며

밥을 반 그릇쯤 퍼 보였다.

‘이만큼이면 되나요?’ 물으니 고개를 양옆으로 흔든다.

한 주걱 더 얹고는

그를 향해 들어 보였다.

……

제법 오목한 주발에 살포시 올라온 걸 보고는

됐다는 사인을 한다.

국은 그가 말한대로 건더기를 섞어 반 대접 정도를 담았고,

냉장고를 열어 잘게 다져 넣어둔 김치를 꺼내 아까 그 사기 주발에 담았다.

접시가 아닌 주발이라는 것에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

이러한 성향은 또 다른 고쳐야 할 습관임을 인정한다.

 

물도 한 컵 따라 놓고

‘자 그러면 식사를 시작할까요?’라는 나의 말에

어린 아이의 눈빛으로 아니라는 대답을 한다.

내 밥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표정이다.

두 주간을 내게 맡긴 선생님도 도시락을 준비해 온다고 했고,

규정이 이용자 집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게 되어 있어 집에서 약간의 시장기를 면하고 갔던 터라 ‘저 집에서 식사하고 왔어요’ 했더니 아주 실망스런 얼굴로, 내일은 이곳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는 거 같아 나의 생각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고개를 아래위로 흔든다.

‘알았어요’

대답은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이 필요했다.

규정, 먼저 선생님이 전해준 말,

그리고 그의 요청이 있다.

이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수저를 들면서

‘하나님 식사를 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잘 먹고 소화도 잘되게 해 주세요’ 하는 독백을 흘렸는데,

그가 ‘아멘’이라고 하는 거 같았다.

그리고 ‘고맙다’는 표현을 잊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고마운지

고마울 것 없는 일에 고맙다는 그가 오히려 고마웠다.

 

밥을 떠 넣어주고

국을 떠 넣어주고

두세 번 쯤 반복한 다음에

‘김치?’하고 확인절차를 거친 후에 것도 떠 넣어주고,

쉽지 않았다.

넘기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더구나

식도를 통해 들어가야 하는 국물이

내 보기에 기도로 자꾸 들어가는 거 같았다.

그러면 한참 씩 애를 먹는다.

가뜩이나 구부러진 허리가, 밥그릇에 머리가 닿을 정도까지 더 꺾여서는 막힌 숨을 참아내느라 고개를 들지 못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밝은 얼굴을 해서 들고는 밥을 떠 넣으라는 표현? 표정? 말? 그래 말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말로 알아들으니 말이다.

오른 쪽으로 한 삼십도 쯤 기울어진 고개.

앞으로도 가슴이 그만큼 내려와 있고.

그 자세로 식사를 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건,

생명이 그만큼 거룩하기 때문이리라.

그 생명의 존엄을 긍정하는 그에게 무한한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힘든 식사를 얼마나 즐겁게, 또 맛있게 하는지……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덜 힘들지를

그는 아주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잘 하고 있다는 대답인 듯 했다.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은

‘주님 제게 지혜를 주세요,

어떻게 하면 승호 씨의 식사가 덜 힘들까요?’란 혼잣말을 하게 했다.

그는 또 고맙다고 주억거린다.

식사가 다 끝나야 물을 마시는데

이 또한 고도의 지혜가 요구되는 일이다.

한 컵의 물을 반쯤 밖에 못 먹이고서는

하루 쯤,

먼저 선생님이 하시는 걸 보아두었으면 좀 더 나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라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식가가 끝난 뒤

‘제가 좀 더 편하게 해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라고 했더니

기울어진 머리로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미안한 건

식사할 때의 나는

하고 싶은 자세를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일까?

내가 그의 불편의 경중을

어느 만큼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정도까지 체휼할 수 있을까?

최대한 편한 자세를 자제하려 했던 건

그의 불편을 알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냥 함께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방으로 먼저 가시겠어요?

아니면 저 설거지 끝나고 같이 가실래요?’ 했더니

후자를 택한다.

그의 불편함을 감안해 더 해도 좋을 일들을 뒤로 하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왔다.

그리고는

‘주방에 이것저것이 눈에 띄어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채 끝나지도 전에 그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린다.

그리고는 조금은 어두워진 얼굴로

그런 일을 하기보다 같이 있어주고 이야기하는 것을 원한다는 글을 모니터에 써 넣고 나를 바라본다.

이해되는 말이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우랴!

얼마나 말을 하고 싶으랴!

말을 할 사람도,

또 할 수도 없는 세월을 살아온 흔적이 외로움이란 이름으로 온 몸 가득 배어있는 듯했다.

얼른

‘네, 알았어요’ 란 대답을 주니

금방 얼굴이 밝아진다.

이제 씻어야 할 시간이다.

서둘러야 네 시 전에 마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이제 세수를 하셔야지요?’ 물으니

끄덕임으로 대답을 한다.

어떤 수순으로 씻겨야하는지 생각하는데

그는 옷을 벗기라는 주문을 한다.

놀란 마음을 감추고는

‘윗옷을 다 벗나요?’ 하니까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또 한 번의 난감함.

……

선생님이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세수를 하는데 옷을 다 벗나요? 물으니

머리를 감아야 한다고 한다.

띵……

시간이 부족할 듯도 하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이라 적잖은 당황을 해야 했다.

안된다고 할 수 없다는 판단을 순간에 하고는,

‘그러면 옷을 벗으셔야지요’ 하고 옷을 벗기려는데

처음이라는 것과

시간 없음이 이유가 되어 그 역시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어찌어찌 옷을 벗겨 내가 앉았던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 걸쳐놓고는,

‘혹 감기라도 들면 어떻게 하지요?’ 하는 말에

전혀 상관없다는 그를 밀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지시하는대로

양치를 먼저 시키고 물 온도를 맞추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물으니

머리를 세면대로 향하는 시늉을 한다.

대략 난감……

습관 같은 독백이 나온다.

‘하나님 어찌해야 할까요?’

흘리는 나의 독백에 그는 머리를 숙인다.

다시 휠체어를 세면대에 바짝 집어넣고는

‘됐나요?’ 물으니

됐다는 표정을 한다.

세면대에 가슴이 닿으면 차갑기도 하고 딱딱할 것이라는 생각에

‘여기 뭘 대야하지 않을까요?’ 했다.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준비된 것도 없고 해서 그냥 머리를 감겼다.

씻기는 나보다 그가 훨씬 불편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고는,

발을 씻기려는데

아니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몰라

……

‘아 머리를 먼저 빗기라고요?’ 물었다.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웃으며 그렇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의 바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을 ‘철저한 사람’이라고 했던 것을 증명이라도 시키려는 걸까?

순서를 바꾸지 말라는 주문을 하는 것이다.

슬쩍 눈을 흘기고는

‘철저한 데다 까칠하기까지?’ 하면서 머리를 빗기고는

‘이대팔로 할까요?

삼대 칠로 넘길까요?’

……

갑작스런 나의 질문에 대답 대신 재밌다는 웃음만 싱글벙글이다.

‘그러면 오늘은 제 맘대로 이대팔로 넘깁니다.’ 했더니

그러라는 표정으로 그냥 웃는다.

그의 웃음이 모처럼인 거 같아 나도 덩달아 유쾌해졌다.

 

발을 씻기려는데

바지를 무릎 밑까지 걷으라는 주문을 한다.

알아듣는 스스로를 신통해하며 다음 동작을 취해보지만,

그 역시 말처럼 수월치만은 않았다.

다리의 움직임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이라 행여 그 자유롭지 못한 몸에 무리가 갈까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안 그런 척 서둘러 발까지 닦고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3시 40분이다.

어찌어찌 옷은 입었던 옷을 입었는데

양말은 갈아 신어야 한다고 한다.

양말이 있는 서랍을 ‘서랍 열어요?’ 하고 열며

‘빨주노초파남보?’를 읊으며 선택하라고 했다.

양말 색깔이 서너 가지 밖에 안 된다는 걸 빨래 정리할 때 보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조금이라도 유쾌하게 하려는 생각으로 수다를 떠는 것이다.

아이처럼 순백의 웃음을 짓는 그를 향해

맨 뒤쪽에 있는 회색 면양말을 들어 보이며

‘이건 할아버지 거 같으니까 빼고’

두어 가지 되는 양말을 들어 보이며 선택하라고 했다.

자주 빛이 섞인 것을 선택한 그에게

‘굿 나도 그 색깔이 좋다’고 하고는 함께 웃었다.

네 시까지 십여 분의 시간이 남았다.

‘이제 청소하고 걸레 빨면 되겠네요’ 하며

‘걸레는 적셔서 해야지요?’ 내 생각으로 물었더니

아니란다.

마른 걸레로 훔치고 머리카락 따위를 집어 정리하면 된다고 한다.

속으로

‘독특한 취향이네’ 하면서 마른걸레질을 했다.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가 구석구석 훔쳤지만 마른 걸레질은 형식에 불과했다.

그래도 열심히 닦고는 걸레를 빨아 널고 들어와,

‘저 이제 가야할 시간이네요’ 라는 마음에 미안함이 스몄다.

여기든 저기든 불편한 사람들을 두고 돌아오는 마음은 언제나 그랬다.

퇴근 준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차림의 준비를 하며,

‘오늘 혹 부족했던 부분이 있으면 컴퓨터에 써두세요’ 하고 돌아보니

‘늦지 않기’ 라는 말이 모니터에 어느새 올라 있었다.

……

혹 있을지 모를 그의 서운함을 달래려는 마음으로

‘네 알겠어요.

오늘 5분 늦었으니 내일은 7분 일찍 올게요’ 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한 걸음으로 집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