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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옆 식영정

수로보니게 여인 2012. 2. 7. 16:52

[함성호의 옛집 읽기]<3>전통의 재구성

기사입력 2012-02-03 03:00:00 기사수정 2012-02-03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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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구식 집에 살고, 서구식 옷을 입으며 근 한 세기를 살아 온 우리에게 이제 전통이라는 것은 외계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음악 미술 문학과 같은 예술도, 철학도 모조리 서구의 것을 답습하고, 새로운 종교는 전통을 아예 미신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은 철학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 그 한마디로 동양철학은 미신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급격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전통과 완전히 유리되었다. 적어도 우리의 전통에서 우리는 외국인과 다름없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외국에서 건축가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안내를 맡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데 서구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전통건축들은 참으로 이상한가 보다. 기껏 힘들여서 그들에게 전통정원을 다 보여주고 나면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정원은 언제 보는가.” “정원은 어디 있는가.” 그들은 소쇄원에서조차 그런 질문을 했다.

그리고 조선의 반가들을 보여 주고 나면 그들의 반응은 다 똑같다. 좀 의아한 표정으로 양손을 마주대고 벌려서 거리를 늘렸다 줄였다 하는 손짓을 취한다. 집들을 보며 좀 크고 작은 차이밖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똑같은 집들이 더 붙어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그 후 같은 한국인들끼리 갔을 때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보고 나는 전통건축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아울러 나는 우리 사회가 서구의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통과 급격하게 단절된 우리가 기댈 언덕은 빠른 근대화를 통해 배운 서구식 모델이었다. 없는 전통에 기대봐야 넘어질 일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새것 콤플렉스는 유행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정신 차리지 못하고 이끌려온 상황이지만 한 사회가 외부의 힘에 이렇게 경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건축은 한 사회의 정신을 담고 있는 몸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정신없음을 지금 우리의 건축이 대변하듯이, 조선의 건축은 조선 사대부의 정신을 담고 있다. 21세기 정신문명의 위기는 전 지구적인 생태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이 톱니바퀴를 조화롭게 돌리는 새로운 전통의 재구성이 절실하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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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의 옛집 읽기]<4>‘소리의 정원’ 소쇄원

기사입력 2012-02-06 03:00:00 기사수정 2012-02-06 03:00:00

  

 

문득 아침에 일어나 간절하게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이 그곳이다. ‘소쇄’ 하고 입속에 넣으면 바람소리가 들린다. 소쇄소쇄소쇄, 이어서 발음하면 분명히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다. 깊고 맑을 소(瀟)자에 비바람 소리 쇄(灑)자다. 중국어로 발음하면 ‘샤오싸’로 대나무 숲에 부는 바람소리가 더 확실하게 난다.

많은 사람이 소쇄원의 조경에 대해 탄복하지만 소쇄원의 백미는 소리를 듣는 것에 있다. 소쇄원은 듣는 정원이요, 소리의 정원이고, 소리를 위한 정원이다.

소쇄원은 내원과 외원으로 나뉜다. 지금 우리가 즐기는 공간인 화계와 제월당, 광풍각, 대봉대 등이 내원에 속하고, 외원은 활을 쏘았던 후간장터, 입구의 대나무 숲 등이다.

소쇄원 입구에는 높은 대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져 있다. 원래 두 사람이 길을 가면 조금 넉넉한 정도의 길이었다. 기묘사화 후 낙향해 소쇄원을 지은 문인 양산보는 이 좁은 길 양편에 넓은 대나무 숲을 조성했다. 정원을 들어가는 사람들은 먼저 이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색과 소리의 조화를 먼저 안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좁은 길의 끝은 계류의 전모가 다 드러난 탁 트인 지형과 마주한다.

사실 내원의 지형은 탁 트였다는 표현이 부적절한, 작은 계곡에 불과하다. 이 협소한 계곡이 탁 트였다고 느끼게 하는 건 순전히 비좁은 대숲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강한 대비를 통해 심리적으로 내원에 개방감을 주었다. 동시에 우리는 거기서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를 만날 수 있다. 이 물소리는 두 줄기로 나뉘어 각각 다른 옥타브를 갖고 있는데, 하나는 오곡문 담장 밑에서부터 바로 계곡을 흐르는 큰 물소리고, 다른 하나는 수로를 이리저리 돌리고 돌려서 대봉대를 거쳐 이어져 계곡에 떨어뜨리는 낮은 물소리이다.

이윽고 다리를 건너면 물소리와 대숲의 바람소리가 장엄하게 연주된다. 그러나 아직 소쇄원의 연주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이 정원의 정점은 광풍각이다. 우리가 이 광풍각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대숲의 바람소리와 계곡의 물소리, 그리고 작은 수로의 낮은 물소리까지 장엄한 천지의 오케스트라가 연주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광풍각의 자리는 이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로열박스인 셈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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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의 옛집 읽기]<5>소쇄원 옆 식영정

기사입력 2012-02-07 03:00:00 기사수정 2012-02-07 03:00:00

 

 

◀담양군 제공

 

식영정은 전남 담양의 소쇄원 옆에 있다. 소쇄원이 지어진 지 꼭 30년 후인 1560년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이자 스승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정자의 관리는 김성원의 후손도 아니고 임억령의 후손도 아닌, 성산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의 후손들이 맡고 있다. 그만큼 이 정자는 주인이 누군지가 의미 없을 정도로 성산 일대의 문인들이 이용했고, 그들에게 사랑받았던 정자다.

식영정은 자미탄가에 높이 솟은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당연히 식영정에 다가가려면 절벽 위로 난 길고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절벽 위에서 풍경을 아래로 굽어보는 것도 좋지만 이 구불구불한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는 것도 식영정을 찾는 재미 중 하나다.

식영정은 정자다. 정자는 살림집과 달리 노는 집이다. 그냥 노는 집이 아니라 자기의 공부를 자연 속에서 확인하고, 증명하며 노는 집이다. 그런데 정자는 영남의 정자와 호남의 정자로 구분된다.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호남의 정자는 주위의 풍광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호방하게 서 있는 반면 영남의 정자는 살림집과 그리 멀지 않거나, 아예 살림집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그들의 학풍에 있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理) 중심의 정주계 성리학이 압도적이다. 단지 기의 작용을 어느 정도 비중을 갖고 보느냐에 따라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나뉜다. 이렇게 볼 때 호남의 사림은 주기론자가 많고, 영남의 사림은 주리론자가 압도적이다. 당연히 밖으로 드러난 현상을 살피는 호남의 정자들은 앞이 탁 트인 곳에 자리하고, 현상의 원리를 탐구하는 영남의 정자들은 한층 더 은밀한 곳에 자리한다.

식영정은 호남 정자의 대표적인 예다. 그것은 식영정이란 이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임억령은 정자의 이름을 지어 달라는 김성원의 부탁을 받고 장자의 ‘제물편’에 있는 그림자의 예를 든다. 흡사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같은 예를 통해 임억령은 인생이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신기루 같고, 그림자 같은 거라고 말하며 그림자(影)를 끊고(息) 존재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식영정이라고 지었다.

식영정에 오르면 거기서 보이는 모든 현상이 뜬구름 같은 것이고,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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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의 옛집 읽기]<6>‘푸름이 두른 집’ 환벽당

기사입력 2012-02-08 03:00:00 기사수정 2012-02-08 03:00:00 

 

 

                                                                                       

 

자미탄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의 남쪽에 환벽당(環碧堂)이 있다. 이 집을 지은 김윤제(1501∼1572)는 식영정을 지어 장인인 임억령을 모신 서하당 김성원의 삼촌이다. 그리고 이 자미탄 강가에서 놀다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에게 전격 스카우트된 송강 정철은 김윤제의 손주 사위다. 그러니까, 일컬어 호남 가사문학권에 모여 있는 식영정, 송강정, 서하당, 환벽당의 주인들은 모두 얽히고설킨 친인척들인 셈이다.

김윤제는 1501년생으로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동갑이다. 각각 남명은 낙동강 서쪽의 지리산에, 퇴계는 낙동강 동쪽의 청량산에, 김윤제는 지리산 서쪽 자미탄의 성산에 살며 한 번의 만남도 갖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명과 퇴계는 서신 교환을 통해 서로 견해를 주고받았고, 김윤제의 수제자이자 손주 사위인 정철은 기축옥사를 통해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을 수없이 죽였으니 험한 시대를 살았던 끈은 어떻게든 이어지게 되어 있나 보다.                    ▲문화재청 제공 

                                                                                                                                      

정철을 기른 업보가 환벽당에 이어졌는지, 지금 환벽당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산등성이에 엉거주춤 서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원래 담으로 둘러싸인 환벽당 아래의 빈터에는 김윤제의 살림집이 있었다. 환벽당은 식영정처럼 독립된 정자가 아니라 살림집의 뒤란에서부터 이어지는 뒷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정자인 것이다. 조성된 당시에 이 뒷산에는 거대한 대나무 숲이 환벽당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 대나무 숲의 푸름이 집을 두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환벽당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 그 푸름은 간 데 없고, 아래쪽에 있던 살림집도 흔적이 없다. 차 떼이고, 포 떼였는데 어떻게 집만 남아 그 옛날의 환벽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환벽당은 산세에 밀려 겨우 한쪽을 부여잡고 서 있는 모습이다. 김윤제는 대나무 숲의 수직성에 맞춰 세 칸 건물의 두 칸을 방으로 들이고 정면 전체에 툇마루를 들여 기둥에 좀 더 강한 수직성을 부여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대숲이 없어지자 그 옛날 대나무의 수직성과 조응하던, 흡사 대나무 같아 보였을 힘찬 기둥들이 이제는 왜 저러나 할 정도로 머쓱할 지경이다.

다시 한 번 조선의 집은 집이 아니라 집 바깥에 있다는 걸 절감한다. 그래도 아직 자미탄은 그 옛날 정철과 김윤제의 만남을 추억하고 있는지 용소의 물이 더 짙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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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의 옛집 읽기]<8>‘호남 정자의 원형’ 면앙정

기사입력 2012-02-10 03:00:00 기사수정 2012-02-10 03:00:00

     

하늘과 땅과 인간의 끝없는 변화를 살피고 그 흐름을 읽어 내려는 호남 유림의 철학적 사유가 건축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호남의 정자고, 호남 가사문학의 요체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는 뜻을 가진 면앙정은 송순(1493∼1583)이 1533년에 지은 정자다.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보면 ‘우러러(仰)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숙여서(俯)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송순은 이 두 문장의 첫 글자를 따오면서 부(俯)자를 같은 ‘숙이다’는 의미인 면(면)자로 바꾸어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러고 보니 맹자의 원래 의도인 자기성찰의 의미보다는 좀 더 호방하고 유쾌한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호남의 유림들은 철학자보다 문학가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이름대로 면앙정은 정말 호쾌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면앙정에 오르면(호남의 정자는 대부분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다), 영산강과 만나러 가는 오례천이 동서로 흐르고, 그 너머로 곡정들판이 눈이 모자라게 펼쳐져 있다.

먼저 면앙정 현판부터 예사롭지 않다. 당대의 명필 성수침의 글씨고, 그 왼편 마루에 붙은 편액에 있는 ‘면앙정 삼언가’는 송순이 지은 것이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년을 보내네.” 그리고 이 시가 그대로, 이후 호남 정자의 설계도가 되었다. 주변의 풍경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하고, 천지간에 내가 있듯이 좌우의 마루에 방이 있는 정자. 이 설계도는 그대로 임억령의 소쇄원 광풍각에서, 김윤제의 환벽당에서, 오희도의 명옥헌에서 각각의 땅의 논리에 맞춰 변주되었다.

집 바깥의 자연을 경영하는 수법들은 모두 다르지만, 집 자체에서 정면 세 칸에 가운데 한 칸을 방으로 꾸미는 것은 똑같다. 정자의 설계도뿐만이 아니라 송순의 ‘면앙정가’는 이후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집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면앙정은 오례천을 따라가다 제월산의 끝이 곡정들과 만나 절벽으로 떨어지는, 그 꼭대기로 오르는 길을 충분히 음미해야 한다.

송순이 이 땅을 살 때, 땅 주인은 이곳에서 옥대를 두른 학사들이 노니는 꿈을 꾸고 아들들을 교육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인은 따로 있었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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