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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은 안다, 대원군이 추사 흠모한 것을

수로보니게 여인 2011. 5. 14. 17:38

[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운현궁은 안다, 대원군이 추사 흠모한 것을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글과 그림을 배운 대원군은 운현궁의 모든 편액을 추사체로 집자해

만들었다. 양관 부근은 본래 대원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당이 있던 자리다. 일제는 가장 신성하다고 할 수 있는 곳에 양관을 지어 운현궁을 내려다보게 했다.

 

인사동에서 점심을 먹게 되면 종종 운현궁으로 발길을 옮긴다.


   운현궁 입장료가 그리 비싸지는 않다. 하지만 점심시간에는 무료로 개방되는지라 전혀 부담 없이 쉬어 갈 수 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인사동의 소란스러움은 솟을대문을 지나면서 이내 고요해진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살았던 집이다.

   운현궁은 구한말 천하를 호령했던 대원군의 위세에 걸맞게 그 규모가 장대했다. 덕성여대부터 옛 TBC 방송국, 교동초등학교, 일본문화원까지 모두 아우르는 옛 운현궁은 지금의 4배 이상 되는 거대한 저택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사랑채와 안채, 별당 정도만 남아 있다. 궁궐도 속절없이 없애버리던 일제 치하에서 궁집(宮家·왕의 가족들이 살던 집)의 규모를 줄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들의 관리주체가 제각각인지라 전부 돌아볼 수 없는 형편이니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노안당(老安堂)’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대원군 정치의 구심점이 되었던 건물이다. 원납전 발행 등 파격적인 국가시책부터 쇄국정책까지가 모두 이곳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판의 노안(老安)이란 말은 ‘아들이 임금이 되어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원군은 과연 건물의 이름처럼 왕의 아버지로서 편안한 노년을 보냈을까.

   흥미롭게도 1994년 운현궁을 해체보수하면서 상량문(집 공사의 내력을 적은 글)과 함께 은(銀) 덩어리가 하나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도 부족했던지 억년무강(億年無疆)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200g짜리 순은 덩어리는 ‘만일 운현궁을 다시 보수할 때 필요하면 팔아 보태 쓰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옛 사람들이 운현궁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툇마루에 걸터앉아 여러 곳들을 스케치북에 담았다. 우리나라의 옛집만큼 스케치하기에 좋은 환경을 선사해 주는 곳도 드물다. 편히 앉을 수 있는 툇마루에서부터 그늘을 만들어 주는 처마까지 말이다.

   담 너머 양관(洋館)이 보인다. 운현궁의 양관은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의 저택으로 일본인이 설계, 시공했다. 1917년 이준용이 죽은 후 의왕(義王·순종의 아우)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으나 지금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으로 쓰이고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양관 옆으로는 아재당(我在堂)이라는 별채가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란 뜻의 아재당은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에서 가장 즐겨 찾았다는 곳이다. 진정 위풍당당함이 느껴지는 멋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원대한 포부와 자신감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세월의 무상함이라는 말로 이 고즈넉한 마당의 적막함을 대변하기에는 그 시절의 역사가 아직 너무 가까이에 있는 건 아닐까. 운현궁 조용한 담장 위에는 이름 모를 작은 새 한 마리의 울음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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