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일기(東宮日記) 300여년 기록 중 소현세자·효종편 첫 번역·출간
"차세대 군주가 커가는 모습을 이렇듯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긴 사례는 세계적으로 아마 없을 겁니다. 왕조실록에 비길 만한 국보급 자료입니다."조선시대 왕세자의 성장과 교육 과정을 기록한 '동궁일기'(東宮日記) 가운데 소현세자와 효종 편(민속원)이 번역·출간됐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동궁일기'는 소현세자부터 순종까지 40종 566책으로, 1625년부터 1907년까지 300년에 걸쳐 있다. 왕세자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侍講院) 관리들이 매일 쓴 동궁일기는 내용의 70~80%가 행서나 초서로 작성됐고, 대부분 유일본이라서 연구자들이 활용하기 어려웠다.
동궁일기 번역은 김종수 서울대 규장각 객원연구원을 비롯, 성당제·나종면·김은정(이상 고전문학), 이남종·주기평(이상 중국문학), 박해당·신하령·유연석(이상 철학), 고승희·노관범·김남윤(이상 국사학) 박사 등 12명이 맡았다. 이들은 2005년 9월부터 2008년 8월까지 3년간 학술진흥재단 지원으로 소현세자와 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진종(眞宗·효장세자: 영조의 맏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이복 형) 편을 번역하고, 주를 달았다. 동궁일기 전체의 3분의 1분량이다.
- ▲ 동궁일기 역주팀이 규장각에서 동궁일기 원본과 번역본을 들고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나종면 김종수 박해당 김은정 성당제 박사./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번에 출간된 소현세자 동궁일기에는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전주에 내려가 분조(分朝)를 이끌었던 기록인 《소현분조일기》와 1637년 병자호란으로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서 쓴 《심양일기》, 그리고 1644년 귀국한 뒤에 기록한 《소현을유동궁일기》 등이 포함돼 있다. 《소현을유동궁일기》는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돌아와 벽제관에 도착한 1645년 2월17일부터 4월26일 사망해 장례를 치르고, 시강원을 혁파한 윤 6월13일까지의 5개월간 기록이다. 동궁일기 번역팀 의학자문을 맡은 사당한의원 김종덕 박사는 이 일기를 토대로, 소현세자 독살설을 반박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귀국 당시부터 몸이 쇠약했으며 약을 잘못 사용해 숨진 것이지, 일부 주장처럼 갑자기 숨졌거나 독살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현분조일기》도 사료적 가치가 높은 기록으로 꼽힌다. 성당제 박사는 "소현분조일기는 조선시대 분조(分朝)에 대한 유일한 기록으로 분조의 역할과 성격을 파악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말한다. '분조'는 전란을 맞아 조정을 둘로 나누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과 소현세자가 분조를 이끌었으나, 광해군 분조일기는 남아 있지 않다. 《소현분조일기》는 전란 시 왕세자가 무과(武科)를 실시하고, 군량과 군병을 조달하고, 지역 수비를 강화하는 실무를 처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관찰사부터 현감·군수까지 군량 조달·수송 현황, 군병 모집·수송 현황, 지역 수비 상황 등을 세자에게 보고한 '장달(狀達)' 87편이 실려 있다. 장달은 조선조에서 소현분조일기에 처음 나타난다.
동궁일기 역주팀을 괴롭힌 것은 원문이 빠졌거나, 일부가 좀먹고 훼손돼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곳곳에서 발견된 점이다. 이 때문에 나머지 원문 역주 작업도 하루빨리 마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동궁일기 역주팀 '작업장'은 규장각 4층 귀퉁이, 439호다. 프로젝트 기간이 끝나 이달 말이면 방을 비워줘야 할 처지다.
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9.05.19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