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³οο조용헌 살롱

백비탕(白沸湯)

수로보니게 여인 2008. 1. 23. 15:11

 

    

 

        

▲ 조용헌

백비탕(白沸湯) [정정내용 있음]

  

지금은 별로 알아주지 않지만, 옛날에는 보학(譜學)을 모르면 양반행세를 할 수 없었다.

'보학' 공부의 첩경은 '장판에 때 묻히는' 방법이다. 즉 전문가를 만나 각 집안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이 방법이다.

40대 소장파 가운데 보학에 밝은 인물이 경북 영주시에 있는 '선비촌'의 촌장인 서수용(48)이다.

필자의 보학친구이기도 하다. 기호지방의 보학은 이 친구가 나에게 묻지만, 영남지역의 보학에 대해서는 내가 이

친구에게 자문을 한다.

몇 년 전에 이 친구로부터 류씨 집안의 '백비탕'(白沸湯)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맹물을 끓인 것을 점잖게 표현하면 백비탕이 된다. 조선시대 선비집안에서 손님접대를 할 때, 밥상에다가 반드시

국(羹)을 올려놓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 국을 마련할 수는 없고, 접대는 해야 하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올려놓는 탕이 바로 백비탕이었다고 한다.


대원군이 안동김씨에게 밀려 지방을 떠돌아다닐 때였다.

대원군은 사람 욕심이 많아서 그 지방에 인물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면 찾아가 만나보곤 하였다.

상주의 낙동(洛東)을 지나다가 청렴강직하기로 이름 높은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1762-1834)을 만나게 되었다.

강고는 집을 찾아온 대원군과 만나 나라의 정세와 학문을 논한 다음에 밥 먹을 때가 되었다.

밥상에는 김치와 된장, 간장 한 종지, 보리밥, 그리고 백비탕이 전부였다.

백비탕이 올라간 밥상이었지만 강고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며칠 동안 이 밥상을 받다가 대원군은 예정보다 빨리 작별을 고했다. 강고는 떠나가는 대원군에게 노잣돈을 쥐여주었다.

이 돈은 친정을 다녀온 강고의 며느리가 가져온 몇 푼 안 되는 돈이었다.

헤어져서 얼마쯤 길을 가다가 대원군은 달려오는 강고의 하인을 만났는데, "노자로 준 그 돈을 다시 돌려달라"는 전갈이었다.

강고가 대원군을 보내고 난 직후에 강고의 사돈이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왔고, 사돈 부의금이 더 급했던 것이다.

이 일로 해서 대원군은 강고의 당당함과 청빈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후일 정권을 잡은 다음에 강고의 아들인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를 중용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권력 교체기가 되니까 '백비탕'이 생각난다.

                      

2008.01.09 22:57

♣ 바로잡습니다/수정 : 2008.01.22 10:32
1월 10일자 '조용헌 살롱'에서 대원군이 만난 류심춘(柳尋春)을 류후조(柳厚祚·1798~1876)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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