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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쇠와 쌀 세 가마 

수로보니게 여인 2011. 1. 22. 18:14

 

[문화 칼럼/안대회]마당쇠와 쌀 세 가마

 

 

2011-01-22 03:00 2011-01-22 03:00 여성 | 남성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몇 년 전부터 상조회사가 각 언론에 유난스럽게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마을과 집안에서 품앗이로 장례를 치르던 시대가 물러가고 상업적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갑작스러운 일을 미리 준비하자는 취지가 나쁘지는 않으나 각종 비리가 개입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연로한 부모가 계셔서 나도 여러 번 기웃거려 보았다.

“노비 위한 상조비 마련하자”

사람이 마지막 가는 예식을 존엄하게 치르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다. 살아 있을 때는 초라했을지라도 영원히 보내는 마당에서는 초라하지 않게 보내야 한다. 하지만 후장조차도 어려움 없이 치르는 부자와 달리 가난한 이들에겐 초라한 장례를 치르는 일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죽음에 관한 공공의 복지가 잘 마련된 것도 아니다. 상조회사에 시선이 가는 것은 그런 이유이리라.

과거로 올라갈수록 장례는 삶에서 가장 힘들고 중요했다. 그래서 ‘논어’는 상을 신중하게 치르고 먼 조상을 정성껏 제사하면 백성들이 후하게 돌아오리라( )라고 이르기도 했다.

고서를 읽다가 상조회사를 연상시키는 제도를 한 집안에서 시행했다는 기록을 찾았다. 19세기 초반에 살았던 정우용()은 명문가 출신 선비였다. 그의 문집에는 ‘귀후권()’이란 문서가 실려 있다. 1814년 작성한 이 문서는 그의 형제들이 각 집안 노비들에게 약속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이 자발적으로 노비들에게 만들어준 계약문서다.

 

정우용은 ‘주영편’이란 저명한 실학서를 저술한 정동유()의 막내아들이었다. 1814년 정월 열하룻날 밤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맏형이 새해를 맞아 새로운 계획 하나를 설계했다. 노비들이 늙도록 주인을 위해 온갖 봉사를 하지만 그들이 죽었을 때 죽음을 애도하지도 않고,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지도 않는다. 우리라도 대책을 마련하자면서 아우한테 초안을 잡아보라고 했다. 큰형의 말을 들은 정우용은 “귀천이 다르지만 똑같은 사람이다”라고 감격하며 문건을 작성했다. 형제가 모두 분가했으나 금전을 갹출하여 비용을 만들어 운영하기로 하고 계약의 취지와 운영방법을 문서로 남겼다. 그들이 합의한 취지는 이러했다.

노비가 주인에게 보탬이 되든 안 되든 주인에게 봉사한 점은 똑같다. 노비가 주인에게 보탬이 안 된다고 그를 박대하여 짐승인 양 다루는 것은 박덕할 뿐 아니라 대단히 상서롭지 못하다. 반면에 주인이 노비를 후하게 대우하려 해도 가난하여 비용을 대지 못하면 관도 없이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 매장할 수밖에 없다. 장례에는 큰 비용이 들어 주인도 갑작스럽게 비용을 대기 어려우므로 자금을 미리 준비한다. 올해부터 해마다 쌀 세 가마를 따로 거둔다. 세 가마를 돈으로 바꾸면 9냥쯤 된다.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 부자에게 대여하여 이익을 남기고 장례비로 쓴다. 이렇게 해야 죽은 노비들도 유감이 없을 것이고 우리 마음도 편안하다. 이 조목을 영구히 지켜 행한다.

조선 선비 정우용의 앞선 발상

간단한 취지문은 노비제도가 완강하게 유지되는 시기임에도 장례는 존엄하게 치러서 최소한의 인간적 위의를 지켜주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런 시도가 노비가 아니라 사용자인 선비 집안에서 자발적으로 등장했다. 한 집안에서 시행한 작은 규모일망정 예스러운 사회보장제도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노비들을 위해 만들지만 그래야 자신들도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조선시대 양반의 양심을 보여준다.

취지문에 이어 세칙을 일곱 개 덧붙여 계를 유지하는 구체적 조항을 만들었다. 중요한 조항만 들어봐도 구속력을 가지고 엄격한 관리를 한 계약이다. 계약 조문을 엄정하게 만들어 상전은 문서를 관리하고 노비 한 사람은 출납을 책임진다. 주인은 절대 비용에 손을 대지 못하고, 노비도 장례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자놀이는 술도가나 부자 상인처럼 안전하고 믿을 만한 곳에만 빌려준다. 3∼4푼을 넘지 않는 저리로 빌려주되 한 곳에 2∼3냥에서 최대 8∼9냥까지 빌려준다. 현재 노비로 일하는 자에게는 15냥, 노비에서 벗어났으나 남편이 없고 자식이 없는 경우 15냥, 한때 노비였으나 지금은 다른 일을 하는 경우는 차등을 두되 3∼4냥 정도 준다. 노비의 남편, 노비의 아내처럼 가족의 장례에도 차등을 두되 다른 부양가족이 있을 때에는 2냥, 없을 때에는 5냥을 준다.

세칙이 용의주도하다. 지속적으로 자금을 만들고 안전한 곳에 투자하여 무상으로 노비와 그 가족, 심지어는 노비에서 벗어난 사람의 장례를 책임지고자 했다. 이들이 제공한 비용은 당시 물가로 볼 때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노비의 권익이 올라갔다고는 하나 여전히 주인과 노비라는 주종관계가 엄격한 시대였다. 그 약자가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장례를 위해 주인은 인간적 연민과 사용자로서의 책임감에서 보험을 만들었다. 각종 사회보장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인간적 위의는 감퇴하는 시대다. ‘귀후권’을 작성한 정우용과 그 집안의 순수한 동기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정우용은 ‘주영편’이란 저명한 실학서를 저술한 정동유()의 막내아들이었다. 1814년 정월 열하룻날 밤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맏형이 새해를 맞아 새로운 계획 하나를 설계했다. 노비들이 늙도록 주인을 위해 온갖 봉사를 하지만 그들이 죽었을 때 죽음을 애도하지도 않고,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지도 않는다. 우리라도 대책을 마련하자면서 아우한테 초안을 잡아보라고 했다. 큰형의 말을 들은 정우용은 “귀천이 다르지만 똑같은 사람이다”라고 감격하며 문건을 작성했다. 형제가 모두 분가했으나 금전을 갹출하여 비용을 만들어 운영하기로 하고 계약의 취지와 운영방법을 문서로 남겼다. 그들이 합의한 취지는 이러했다.

노비가 주인에게 보탬이 되든 안 되든 주인에게 봉사한 점은 똑같다. 노비가 주인에게 보탬이 안 된다고 그를 박대하여 짐승인 양 다루는 것은 박덕할 뿐 아니라 대단히 상서롭지 못하다. 반면에 주인이 노비를 후하게 대우하려 해도 가난하여 비용을 대지 못하면 관도 없이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 매장할 수밖에 없다. 장례에는 큰 비용이 들어 주인도 갑작스럽게 비용을 대기 어려우므로 자금을 미리 준비한다. 올해부터 해마다 쌀 세 가마를 따로 거둔다. 세 가마를 돈으로 바꾸면 9냥쯤 된다.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 부자에게 대여하여 이익을 남기고 장례비로 쓴다. 이렇게 해야 죽은 노비들도 유감이 없을 것이고 우리 마음도 편안하다. 이 조목을 영구히 지켜 행한다.

조선 선비 정우용의 앞선 발상

간단한 취지문은 노비제도가 완강하게 유지되는 시기임에도 장례는 존엄하게 치러서 최소한의 인간적 위의를 지켜주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런 시도가 노비가 아니라 사용자인 선비 집안에서 자발적으로 등장했다. 한 집안에서 시행한 작은 규모일망정 예스러운 사회보장제도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노비들을 위해 만들지만 그래야 자신들도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조선시대 양반의 양심을 보여준다.

취지문에 이어 세칙을 일곱 개 덧붙여 계를 유지하는 구체적 조항을 만들었다. 중요한 조항만 들어봐도 구속력을 가지고 엄격한 관리를 한 계약이다. 계약 조문을 엄정하게 만들어 상전은 문서를 관리하고 노비 한 사람은 출납을 책임진다. 주인은 절대 비용에 손을 대지 못하고, 노비도 장례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자놀이는 술도가나 부자 상인처럼 안전하고 믿을 만한 곳에만 빌려준다. 3∼4푼을 넘지 않는 저리로 빌려주되 한 곳에 2∼3냥에서 최대 8∼9냥까지 빌려준다. 현재 노비로 일하는 자에게는 15냥, 노비에서 벗어났으나 남편이 없고 자식이 없는 경우 15냥, 한때 노비였으나 지금은 다른 일을 하는 경우는 차등을 두되 3∼4냥 정도 준다. 노비의 남편, 노비의 아내처럼 가족의 장례에도 차등을 두되 다른 부양가족이 있을 때에는 2냥, 없을 때에는 5냥을 준다.

세칙이 용의주도하다. 지속적으로 자금을 만들고 안전한 곳에 투자하여 무상으로 노비와 그 가족, 심지어는 노비에서 벗어난 사람의 장례를 책임지고자 했다. 이들이 제공한 비용은 당시 물가로 볼 때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노비의 권익이 올라갔다고는 하나 여전히 주인과 노비라는 주종관계가 엄격한 시대였다. 그 약자가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장례를 위해 주인은 인간적 연민과 사용자로서의 책임감에서 보험을 만들었다. 각종 사회보장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인간적 위의는 감퇴하는 시대다. ‘귀후권’을 작성한 정우용과 그 집안의 순수한 동기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