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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5일 경복궁을 상징하는 정문 광화문이 복원되었다. 경복궁은 조선 태조 때인 1395년 창건된 이래 영광과 수난의 시기를 거듭 겪었다. 위치 이동, 콘크리트 건물, 한글 현판 글씨 등 광화문 변천의 역사는 한국의 상징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경복궁은 1395년 태조 때 창건되어, 200년 가까이 조선시대 법궁(法宮)의 지위를 유지한 궁궐이다. 경복궁의 창건에는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경복궁의 이름을 짓는 것에서부터 궁궐의 배치 등 모든 면에서 정도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정도전은 그의 저술에서도 따로 「경복궁」이라는 항목을 두었다.
「신(정도전)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임금이 국정을 결정하는 곳이요 사방이 우러러 보는 곳이며,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이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존귀함과 위엄을 보이며, 그 명칭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臣按宮闕 人君所以聽政之地 四方之所瞻視 臣民之所咸造。故壯其制度 示之尊嚴 美其名稱 使之觀感] 한나라와 당나라 이후로 궁전의 호칭을 혹은 전에 있던 이름을 따르기도 하고 혹은 고쳐 쓰기도 했으나, 존귀함과 위엄을 보이고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그 의미가 같습니다.[漢唐以來 宮殿之號 或沿或革 然其所以示尊嚴而興觀感則 其義一也]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시어 먼저 종묘를 건립하시고 이어 궁실을 만드셨습니다. 다음 해 10월 을미일에 몸소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시고 새로 세운 종묘에서 선왕과 선왕후들에게 제사 지내시고, 새 궁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푸셨으니, 이는 대개 신의 은총을 넓히고 후대의 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殿下卽位之三年 定都于漢陽 先建宗廟 次營宮室 越明年十月乙未 親服衮冕 享先王先后于新廟 宴群臣于新宮 蓋廣神惠而綏後祿也] 술이 세 순배가 돈 후에 신 정도전에게 명하기를, “이제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궁궐이 완성되어 여러 신하들과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지어 국가와 함께 영원히 빛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酒三行 命臣道傳曰 今定都享廟 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 신이 명령을 받고 삼가 손을 모아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하고, 「주아(周雅)」편에 나오는 “술에 의해 이미 취하고 은덕에 이미 배불렀으니, 우리 임금 만년토록 당신께서 큰 복 받기를 돕겠습니다.”라는 구절로써 새로운 궁궐을 경복(景福)이라 이름을 짓자고 청했습니다. 여기에서 전하와 자손들이 만년동안 태평성대의 왕업을 누리시며 사방의 신하와 백성들이 또한 영원토록 보고 감동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臣受命 謹拜手稽首 誦周雅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請名新宮曰景福 庶見殿下及與子孫 享萬年太平之業 而四方臣民 亦永有所觀感焉] 그러나 『춘추』에서 백성들이 힘쓰는 것을 중히 여기고 토목공사를 경계하고 있으니, 어찌 임금이 되어 단지 백성들만을 부려 자신을 받들게 하겠습니까? 넓은 집에 편안하게 거주할 때는 추위에 떠는 선비 덮어줄 것을 생각하고, 서늘한 전각에 살면 시원한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런 후에야 만민의 받듦에 대해 저버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언급합니다.[然春秋 重民力謹土功 豈可使爲人君者 徒勤民以自奉哉 燕居廣廈 則思所以庇寒士 涼生1)殿閣2) 則思所以分淸陰然後庶無負於萬民之奉矣 故倂及之]」- 《삼봉집(三峰集)》권4,〈경복궁(景福宮)〉
1) 涼生 舊本作生涼 2) 一本 作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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