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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으로 이름을 지은 까닭

수로보니게 여인 2010. 8. 23. 19:24

 

‘경복궁’으로 이름을 지은 까닭

2010. 8. 23. (월)

  2010년 8월 15일 경복궁을 상징하는 정문 광화문이 복원되었다. 경복궁은 조선 태조 때인 1395년 창건된 이래 영광과 수난의 시기를 거듭 겪었다. 위치 이동, 콘크리트 건물, 한글 현판 글씨 등 광화문 변천의 역사는 한국의 상징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경복궁은 1395년 태조 때 창건되어, 200년 가까이 조선시대 법궁(法宮)의 지위를 유지한 궁궐이다. 경복궁의 창건에는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경복궁의 이름을 짓는 것에서부터 궁궐의 배치 등 모든 면에서 정도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정도전은 그의 저술에서도 따로 「경복궁」이라는 항목을 두었다.

 

 「신(정도전)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임금이 국정을 결정하는 곳이요 사방이 우러러 보는 곳이며,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이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존귀함과 위엄을 보이며, 그 명칭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臣按宮闕 人君所以聽政之地 四方之所瞻視 臣民之所咸造。故壯其制度 示之尊嚴 美其名稱 使之觀感]
  한나라와 당나라 이후로 궁전의 호칭을 혹은 전에 있던 이름을 따르기도 하고 혹은 고쳐 쓰기도 했으나, 존귀함과 위엄을 보이고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그 의미가 같습니다.[漢唐以來 宮殿之號 或沿或革 然其所以示尊嚴而興觀感則 其義一也]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시어 먼저 종묘를 건립하시고 이어 궁실을 만드셨습니다. 다음 해 10월 을미일에 몸소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시고 새로 세운 종묘에서 선왕과 선왕후들에게 제사 지내시고, 새 궁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푸셨으니, 이는 대개 신의 은총을 넓히고 후대의 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殿下卽位之三年 定都于漢陽 先建宗廟 次營宮室 越明年十月乙未 親服衮冕 享先王先后于新廟 宴群臣于新宮 蓋廣神惠而綏後祿也]
  술이 세 순배가 돈 후에 신 정도전에게 명하기를, “이제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궁궐이 완성되어 여러 신하들과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지어 국가와 함께 영원히 빛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酒三行 命臣道傳曰 今定都享廟 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
  신이 명령을 받고 삼가 손을 모아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하고, 「주아(周雅)」편에 나오는 “술에 의해 이미 취하고 은덕에 이미 배불렀으니, 우리 임금 만년토록 당신께서 큰 복 받기를 돕겠습니다.”라는 구절로써 새로운 궁궐을 경복(景福)이라 이름을 짓자고 청했습니다. 여기에서 전하와 자손들이 만년동안 태평성대의 왕업을 누리시며 사방의 신하와 백성들이 또한 영원토록 보고 감동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臣受命 謹拜手稽首 誦周雅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請名新宮曰景福 庶見殿下及與子孫 享萬年太平之業 而四方臣民 亦永有所觀感焉]
  그러나 『춘추』에서 백성들이 힘쓰는 것을 중히 여기고 토목공사를 경계하고 있으니, 어찌 임금이 되어 단지 백성들만을 부려 자신을 받들게 하겠습니까? 넓은 집에 편안하게 거주할 때는 추위에 떠는 선비 덮어줄 것을 생각하고, 서늘한 전각에 살면 시원한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런 후에야 만민의 받듦에 대해 저버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언급합니다.[然春秋 重民力謹土功 豈可使爲人君者 徒勤民以自奉哉 燕居廣廈 則思所以庇寒士 涼生1)殿閣2) 則思所以分淸陰然後庶無負於萬民之奉矣 故倂及之]」- 《삼봉집(三峰集)》권4,〈경복궁(景福宮)〉

 

1) 涼生 舊本作生涼
2) 一本 作閤

 

▶ 광화문(경복궁의 정문)_경복궁 홈페이지 인용

 

  위의 기록에서 보듯 정도전은 태조의 명을 받아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으로 정하였다. 시경의 「주아」편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도전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궁궐 건축이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넓은 집에 편안하게 거주할 때는 추위에 떠는 선비 덮어줄 것을 생각하고, 서늘한 전각에 살면 시원한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만민이 받드는 것에 대해 저버림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대목에서는 왕도정치와 민본정치를 국가의 이념으로 설정한 사대부 출신 학자 정도전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런 이념이 반영되어 1395년 첫 출발한 경복궁은 광화문에서 강녕전까지 390여칸의 전각으로 구성된 소박한 규모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 때 중건한 경복궁의 전각이 7,400여칸에 달한 것과 대비하면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2010년 8월 15일 광화문이 복원되었다. 1867년 고종이 근정전에 임어하여 “근정문을 열 때 흥례문과 광화문 정문도 함께 여는 것을 규례로 세우도록 하라.”(『고종실록』 고종 4년 11월 15일(갑자).)고 지시할 때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조선 태조 때인 1395년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완전히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가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과 광화문. 경복궁과 광화문은 일제 치하와 현대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또 다른 수난을 겪은 후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은 것을 계기로 조선 왕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를 기대한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복원과 더불어
‘조선 왕실의 역사’ 즉 ‘390여 칸의 전각’으로 구성되었던 그 시절의 정치 이념(민본정치)이
오늘날의 정치실현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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