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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少論)과 해저영구(海底靈龜)

수로보니게 여인 2008. 6. 12. 18:59

 

 

 

   소론(少論)과 해저영구(海底靈龜)

  

    조선시대 정치는 3당 구조였다. 조선후기 200년 동안 여당을 했던 노론(老論), 그리고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南人),

  그리고 그 중간에 있었던 소론(少論)의 3당이었다. 노론은 너무 오래 장기집권을 했다. 남인은 야당을 오래하다 보니까,

  국정의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특히 영남 남인은 철저하게 벼슬길을 봉쇄당했다.

   노론들이 경상도 사람에게는 당상관(정3품) 이상 벼슬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조령(鳥嶺)을 넘어 한양에 들어가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영남의 남인들은 완전히 '재야'(在野)세력이었다. 호남이 아닌 경상도 경주에서 체제를 흔드는 동학(東學)이 탄생한 것도 이러한 정치적 소외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남인집안이었던 경주 최부잣집도 동학의 최제우와 같은 최씨 집안이다. 최부잣집이 '진사(進士) 이상 벼슬을 하지 않는다'를 철칙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론정권에서 영남 남인이 고위직에 갈 수도 없었거니와, 설령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정치차별 끝에 결국 재산을 뺏긴다고 보았던 것이다. 소론은 노론의 국정경험도 있었고, 재야의 남인이 지니고 있었던 문제의식도 있었다. 중도통합(中道統合) 노선이었다고나 할까.

   유명한 소론집안이 전주이씨 덕천군파이다. 원교 이광사, 연려실 이긍익, 영재 이건창이 모두 같은 소론집안이다.
강화학파(江華學派)의 멤버들은 소론들이었다.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성재 이시영 집안은 경주이씨로서 소론집안이다. 또 한 군데가 충청도 논산의 명재 윤증 집안이다. 명재는 임금이 우의정을 준다고 해도 벼슬을 거절하였다. 그만큼 '대'가 센 인물이었다. 명재가 벼슬을 거부한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노론이 고집한 '지역차별 인사'였다.

   남인이 배제되는 인사정책이 계속되는 한 정권에 참여할 명분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번에 대통령 비서실장 물망에 오르내리는 윤여준씨도 소론에 속한 윤명재 집안 후손이다.

  윤씨와 함께 거론되는 후보들도 여럿인 것으로 전해졌다. 과연 누가 이 불타는 정국을 식혀줄 수 있을까.

                 

                                                                     2008.06.12 09:22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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