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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디드' / 비관주의(혹은 염세주의 le pessimisme)

수로보니게 여인 2009. 4. 12. 22:14

 

고전 읽으면 논술이 술술 <9-4> 볼테르 '깡디드'

고전 속에 논술의 해법이 있다. 논술의 기술보다는 근본적인 배경지식을 쌓는 게 우선이다. 국제신문은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와 함께 고전 강좌를 연재한다. 중·고생들이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며 논술시험에 나올 만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해답을 고민해 보는 자리다.

◆ 주요 의제

① 볼테르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악이라고 주장하는 비관주의를 거부한다.

② 볼테르는 "우리의 뜰을 경작해야 합니다"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다.

③ 페르네의 영주 볼테르는 인간이 노동 덕분에 물질적 발전을 추구하고, 헛된 논쟁을 피하고, 이성이 도약하는데 공헌할 것이라 믿는다.


◆ 생각해볼 문제

① 우리 각자는 깡디드처럼 자신의 고유한 견해를 갖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는가

②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노동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숙고한 적 있는가

③우리 각자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과 '우리의 뜰을 경작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가


◆ 핵심용어

▶비관주의(혹은 염세주의 le pessimisme)

이 용어는 19세기 초에 쇼펜하우어가 염세철학을 주장한 후 곧 낙천주의를 반대하는 데 사용된다. 여러 세기에 걸쳐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악의 문제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마니교도(3세기에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의 우두머리인 마네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이 명제를 설명하는데, 이 세상을 지배하는 커다란 두 가지 원칙, 즉 선과 악이 있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법칙의 싸움으로 우주를 설명하는데 그들에 의하면 악의 힘이 더 강하고,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부패와 많은 자연재해를 설명한다. 이 이론은 '깡디드'에서 마르탱에 의해 나타나고 19세기부터 비관주의라는 이름을 지닌다. 이론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첫째, 악이 선을 이긴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낫다. 둘째, 삶에서 고통은 기쁨을 이긴다 혹은 현실은 오로지 고통일 뿐이다. 기쁨은 고통의 순간적 정지일 뿐이다. 셋째, 자연은 선과 도덕적 악에 무관심하고, 피창조물들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넷째, 사물의 나쁜 면만 보는 정신 상태이다.


왕권의 추격에 늘 위협을 받는 철학자 볼테르가 프랑스 땅이지만 스위스 제네바가 지척에 있는 페르네에 거처를 정한다. 75세의 볼테르가 농부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1. 비관주의에 대한 거부

작품의 전반부에서 예상치 못했던 악의 불합리한 형태에 직면한 깡디드가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낙천주의 철학에서 구하고자 했지만 결국 "인간이 불행할 때도 모든 것을 선이라고 우기는 일종의 광기"로 정의하면서 실망을 표시한다. 그러나 콩트 중반부에 이르러 깡디드는 정치와 종교의 이상적 가치 실현이 모든 사람들을 선하고 행복하게 하는 엘도라도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로 인해 사고의 전환기를 맞는다. 즉 악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엘도라도에서의 체류 후, 볼테르는 갑자기 깡디드를 수리남에서 비참한 상황에 처한 흑인노예와 만나게 해서 다시금 불행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다행스럽게 깡디드는 이제 악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인간의 행복에 관해 스스로 해답을 찾으려는 능동적 태도를 취한다. 이 중요한 변화는 그가 성인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즉 볼테르는 성숙한 인간의 긍정적 의지를 아이의 수동성에 대립시켜 깡디드가 자신을 쟁취하는 행위들을 할 수 있게 한다. 새로운 세계에서 다양한 여정 중에 아이로서 여러 사건들의 희생자였던 깡디드가 이제 삶을 이해하려 하고 악과 행복의 문제에 관해 개인적인 견해를 갖기 위해 탐구를 시작한다.

깡디드의 이러한 시도를 위해 볼테르는 빵글로스와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생각을 가진 노학자 마르탱을 등장시킨다. 마르탱은 악의 문제를 이론만으로 설명하는 빵글로스와 달리 자신이 겪은 경험에 의거해 악을 정의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악을 경험했다고 자처하면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믿으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고 나 악의를 가진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악이다. 그의 이러한 견해에 비추어 보면 마르탱은 빵글로스의 교육을 반박하는 근본적인 비관주의자이다.

마르탱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엘도라도에서의 체험과 뀌네공드와의 재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은 깡디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마르탱이 악의 변호인이라고 자처하며 모든 악을 깡디드에게 환기시키고 끈질기게 악의 편재를 강조할 때마다 깡디드는 "그렇지만 선한 것도 존재합니다"(20장)라고 외치며 그와 대립한다.

마르탱의 극단적인 결론을 거부하는 깡디드가 그에게서 배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바로 모든 견해를 경험으로 알 수 있었던 것에 근거를 두는 그의 사고이다. 이는 계몽주의 철학이 요구하는 중요한 사항들 중의 하나이다. 볼테르는 실제로 과학적 명철함으로 삶에 임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모든 추론이 현실을 사유에 종속시키는 태도에서 생겨서는 안 되고,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도처에서 악을 보고, 자신과 상반되는 많은 것을 경험한 덕분에 깡디드가 빵글로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고 사물에 대해 상대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테르는 낙천주의와 상반되는 비관주의를 제시하면서 하나의 사고에만 특권을 부여하고 그 사고를 극단적인 결과로 발전시키는 체계를 경계하라고 충고한다. 왜냐하면 진실은 우리가 삶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을 참작하는 환경 속에서 구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혹독하게 수련했던 깡디드. 이제 그는 체계적인 정신보다 비판적인 정신을 더 선호하고, 세상을 시종일관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는 일방적 태도가 낳은 광신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계몽주의 철학자가 된다. 그러면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는 무엇인가

 

2. "우리의 뜰을 경작해야 합니다."


'깡디드'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30장은 작품의 결론으로 볼테르의 생각을 집약하고 있다.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마지막 남은 다이아몬드로 깡디드는 프로퐁티드 해안(오늘날 마르마라해.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바다이자 터키의 아시아 쪽과 유럽 쪽을 가르는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작은 소작지를 사서 뀌네공드와 결혼하고 모든 등장인물들과 함께 지낸다. 악과 불행, 선과 행복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위해 깡디드는 전통적으로 지혜를 상징하는 이슬람 수도승과 선한 터키 노인을 찾아간다. 이슬람 수도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인은 인간의 불행에 대한 처방으로 노동을 권한다. 노동은 소박하지만 베니스에서 만난 여섯 폐왕(26장)의 헛된 권세보다 더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현명한 노인의 말을 깡디드는 깊이 생각한다.

반면 빵글로스는 이슬람 수도승의 "침묵해야 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말 자체를 위해 말하는 것을 기뻐하고, 레토릭의 훈련에 몰두한다. 제각기 불행하게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빵글로스는 또 헛되이 추론한다. 그의 추론을 요약하면 모든 것이 최선을 위해 되어 가고, 이 모든 불행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소작지에 없을 것이고, 결국 모든 일에는 엄밀하고 미리 예정된 질서에 따라 연계된 선험적인 조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볼테르는 작품 속에서 마지막까지 빵글로스를 비난한다. 무지해서 용감한 듯한 빵글로스를, 볼테르는 여전히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현실을 개념으로 대체하는 독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연설자로 묘사한다. 아마도 볼테르는 빵글로스 이상으로 말과 사물을 많이 혼동한 탓에 삶과 관계없는 체계 속에 갇혀 있는 모든 지식인을 고발하고 싶었을 것이다.

행동을 더 좋아하는 깡디드는 이 시점에서 예전부터 착수했던 철학적 탐구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뜰을 경작해야 합니다." 깡디드는 삶과 세상의 의미에 대한 헛된 질문을 거부한다. 이제 성인이 된 깡디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선의의 인간으로서 지혜를 변호한다. "우리의 뜰을 경작해야 합니다"라는 명령어는 용기 있고 통찰력 있는 결의를 강조한다.

'경작하다'라는 말은 마르탱이 한 "추론하지 말고 일을 합시다"는 말에서 '일하다'라는 동사에 정확성을 부여하는 행위 동사이다. 합리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키는 문명의 발전과정을 가정한다. 더 이상 헛된 명상에 잠기는 상태는 없고 일해야 할 땅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라는 애정 어린 형용사는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한다. 불안과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다시 집결해서 공동 작업에 참여해야 한다.

'뜰'이라는 말은 육체적이고 지리학적인 의미를 가진다. 소규모의 농업과 관계가 있는 뜰은 공동체 일원들에게 생존을 보장하는 유익한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진보는 주로 농업의 발전에 근거를 둔다고 판단하는 중농주의 사상가들의 이상을 반영한 것이다. 작품의 구성에서 '뜰'은 세 번째로 상징적인 장소이다. 작품의 초반부에서 툰데르 텐 트롱크 성은 오랫동안 깡디드에게 지상 낙원이었다. 중반부의 엘도라도라는 유토피아는 잃어버린 지상 낙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상세계에 대한 계시로 나타난다. 이야기의 끝에서 '뜰'은 툰데르 텐 트롱크의 잘못된 가치를 포기하고 엘도라도의 완벽함을 모델로 는 최후의 행복을 상징한다. 다시 말하면 '뜰'이란 깡디드가 어린 시절을 보낸 툰데르 텐 트롱크 성 같은 곳도 아니고, 접근 불가능한 이 세상 최고의 낙원인 엘도라도 같은 곳도 아니다. 볼테르가 행복과 노동의 관계를 설정한 이 '뜰'이야말로 소박하지만 현실적인 삶의 진정한 공간이다. 작은 사회는 모델이 없다. "작은 땅에서 많이 수확"하는 것이 전부이다. 봉건제도 하에 국가 간의 갈등으로 폭력에 휩쓸린 툰데르 텐 트롱크 성에 비해 협소하지만 근본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뜰'은 지속성을 상징한다.

"우리의 뜰을 경작해야 합니다"는 깡디드의 지적·도덕적 발전을 결론짓는 말이다. 경험으로 성숙해진 그가 어린 시절의 환상에서 해방되고 현재의 소작지에서 제한적이지만 탄탄한 행복을 구축하려 한다. '뜰'을 시도하는 것이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깡디드와 그의 친구들이 삶의 의미와 행동 방식을 스스로 찾으려는 근본적인 시도를 의미하고 있다. 볼테르에게 있어서 행동은 말보다 낫다. 또한 헛된 체계의 논리 속에 갇히는 것보다 노동으로 문명을 건설하고 구체적인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 더 낫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사물을 체계로 변형된 안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기와 경험이 세상을 올바르게 판단하게 하는 능력, 즉 이성이 이끄는 대로 살기를 충고한다. 또한 그는 인간 운명의 최종목적을 노동에 근거를 두고, 사색보다 행동으로 행복을 구하는 실질적인 지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3. 페르네의 원로가 된 볼테르의 교훈

작품 속에서 깡디드에게 노동에 대한 가치를 일깨운 터키 노인은 노년의 볼테르와 동일시된다. '깡디드'가 출판되자마자 명성을 얻었을 때 볼테르는 페르네에 정착한다. 페르네는 지리적 위치로 보면 프랑스 땅이지만 스위스 국경에 접해 있어 왕권의 위협에서 볼테르가 벗어 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땅을 사서 영주가 된 볼테르는 농부들의 운명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애타주의를 실천하고, 75세까지 밭에서 일하면서 남은 여생을 보낸다.

그가 이곳에 처음 정착할 때 페르네는 백여 명 남짓한 주민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여러 해 살면서 볼테르는 집, 교회, 학교, 병원, 저수지와 분수를 건설하는 등등 그 스스로 경작되지 않은 지역을 개발한다. 깡디드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고향이 아닌 곳에 모여서 더 잘 사는 곳을 만든 것처럼, 볼테르도 종교·정치권력과 무관한 곳에서 더 실천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페르네의 볼테르는 인간이 노동 덕분에 물질적 발전을 추구할 것이고, 헛된 논쟁을 피할 것이며, 이성이 도약하는데 공헌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도덕이 "우리의 뜰을 경작해야 합니다"라는 유명한 표현을 발견해냈을 것이다.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볼테르는 최고이며 선한 신을 믿는 이신론자(신을 세계의 창조자로서 인정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적 존재로는 생각하지 않고, 세계가 창조된 후 신의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계시나 기적 등을 거부하는 이성적 종교관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신의 의지에 대해 무지하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개선시키고 자신에게 도덕을 부여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엘도라도가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깡디드는 소작지에서 관용, 우정, 노동에 기반하는 사회를 성공적으로 건설했다. 이것이 바로 페르네의 원로 볼테르가 '깡디드'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현실적인 교훈이다.

김영리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kyl7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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